오경 연구사

박경철

17세기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모세오경의 저자는 바로 모세라고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이런 전통적인 교리는 신명기 34장 모세의 죽음 보도에 대한 문제로 전통적인 모세 저작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당시까지 전해지던 오경 형성에 대한 생각들은 잡다한 여러 단편들을 한 사람이 짜집기하듯, 모자이크 작품을 만든 한 저자의 작품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다 오경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오경을 일반 역사 문서로 이해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실질적인 오경 비평 연구의 시발은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그 처음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름과 그에 대한 여러 상이한 표시들을 발견하면서부터다.

1711년 개신교 목사였던 비터 (Henning Bernhard Witter)가 '이스라엘의 법'(Jura Israelitarum)에서 창 1,1-17,27을 주석하면서 창 1,1-2,3과 2,4하반절을 서로 구분하여 창세기안엔 최소한 서로 다른 두 자료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그다지 큰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후로 한 40년이 지나 독실한 유대집안에서 자란 의사였던 아스트룩 (Jean Astruc)이 1753년 "창세기 모세 저작에 대한 믿을만한 전승들에 대한 추측" (Vermutungen über die Überlieferungen, deren sich Mose bei der Abfassung der Genesis bediente)에서 창세기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바뀌며 나타나는 중요한 두 문서 자료를 구분하여 엘로힘 문서와 야훼 문서로 나눈다. 17779년 비평학의 기초를 세운 당시 예나 대학 교수였던 아히히호른(Johann Gottfried Eichhorn)은 이 두 문서자료외에 더 많은 여러 단편 자료들을 전체 오경에서 분류해 내게 된다. 오경비평연구의 틀을 놓기 시작하는데 결정적인 진보는 바로 아히히호른의 제자였던 일겐(Carl David Ilgen)에게서 나온다. 그는 창세기안에서 독립적인 서로 다른 세 자료를 발견한다. 그리고 신명기 역시 완전히 독립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거의 100년 이상을 이끌어 오고 있는 4 문서설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는 것이다.

괴팅엔대학 셈어 교수 에발트 (Heinrich Ewald, 1803-1875)의 제자였던 벨하우젠 (J. Wellhausen, 1844-1918)의 1878년 '이스라엘 역사 제1권' (Geschichte Israels I, 2판 이후 제목이 바뀌어 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은 이스라엘 종교제도의 역사 연구였으며, 그의 연구 결과로 오경의 자료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이미 오경은 여러 시대 자료들의 혼합이라는 학설들이 있어 왔었고, 대체로 이론들은 둘로 나누어졌었는데, 하나는 원래 한 문서였는데, 점차 여러 자료들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과, 둘째는 이완 반대로 여러 잡다한 자료들이 서로 얽히고 혼합되어 방대한 오경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들은 점차 오경에 4개의 자료들(E1, E2, J, D)이 있는 것으로 모아지게 된다. 이미 드 베테 (W.M. de Wette, 1780-1849)의 신명기 연구 결과로 신명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D자료는 바로 요시아 종교개혁때의 그 율법책이라고 받아들여졌다 (Wilhelm Martin Leberecht de Wette, Dissertatio critica exegetica qua Deuteronomium a prioribus Pentateuchi libris diversum, alii cuiusdam recentioris auctoris opus esse monstratur, 1805). 그러던 중 불란서의 슈트라스부르크의 그라프 (K.H. Graf)가 오늘날 P(제사문헌)라고 부르는 E1(First Elohist) 자료가 오경중에 가장 후대 자료라고 주장하게 된다 (K.H. Graf, Die geschichtlichen Bücher des Alten Testaments, Leipzig : Weigel, 1866. - VIII, 1 Bl., 250 S.). 이로부터 이 자료안에 들어있는 이스라엘 제의에 관한 여러 규정들이 포로기 이후라 밝혀진다. 이로 인해 율법서는 결국 예언서보다 그 시기가 더 늦은 것으로 드러난다 "lex post prophetas". 벨하우젠은 바로 그라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연구하면서 이 역사서들이 E1의 정교한 제사 율법 규정들을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벨하우젠은 이제 구약사에 획을 긋는 작업을 한다. '육경의 구성 Die Composition des Hexateuch' 연구와 이 연구결과의 토대로 쓴 '이스라엘 역사 서설 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 1878'은 이스라엘 종교제도의 발전사를 개괄하게 된 업적이다. 이러한 연구결과의 핵심은 오경안에 있는 여러 제의관련 법과 예식 규정들(P)이 가장 후대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발전된 문서설은 육경의 기원에 관한 설명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비록 벨하우젠의 가설이 너무 정밀하게 한 절에서조차 각 층들과 자료들로 나누었다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이로써 오경 내지는 육경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새로운 틀을 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사제적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연대는 후대 포로기 이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신정국가 개념이 포로이후에야 비로소 생겨났다는 것이다. 때론 벨하우젠의 이스라엘 역사 연구가 헤겔의 영향을 받아 너무 진화론적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경에 대한 역사 비평연구는 이스라엘 종교 발전의 전반적인 새로운 이해를 불러일으켜 준 것만큼은 그의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연구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육경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라고 해봤자, 주전 9세기 중엽 이후라는 것이다. 즉, 육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최초의 종교 성격을 규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른바 벨하우젠-그라프 가설은 오경안에 4문서들에 대한 연대를 확정짓는데 이른다. 즉, J-9세기, E-8세기, D-7세기, P-6세기. 그런데 이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바로 궁켈 (Hermann Gunkel, 1862-1932)에게서 나타난다 (Werner Klatt, Hermann Gunkel : zu seiner Theologie der Religionsgeschichte und zur Entstehung der formgeschichtlichen Methode, Götingen : Vandenhoeck & Ruprecht, 1969. - 280 S. : 1 Portr., FRLANT 100).

벨하우젠의 가설은 탄탄해 보였다. 이제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어 보였다. 단지 그러한 문서 이전 단계인 구전, 즉 지금의 문서자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구전들에 대한 질문이 남았고, 이에 대한 양식비평과 전승비평의 새로운 방법론을 확립시킨 이들이 바로 헤르만 궁켈, 마틴 노트 그리고 게르하르트 폰 라트였다. 이들이 세운 이론들을 크게 보면 다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전승의 모체가 된 각 작은 단편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삶의 자리 Sitz im Leben"을 갖고 있다는 것, 둘째는 개별 전승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출애굽, 시내산 등)은 각자 서로 다른 지역과 역사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것, 끈으로 세 번째는 각 전승들이 하나로 모여지게 된 것은 국가이전시기 제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궁켈의 연구는 고대사회내에서 문학의 위치와 그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 일으켜준 것이다. 그로 인해 생겨난 양식비평은 그의 두 제자 디벨리우스 (M. Dibelius)와 불트만 (R. Bultmann)에게 까지 영향을 끼쳐 양식비평 이후, 전승사비평과 편집사비평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 되고 만다. 궁켈은 초기 성서와 고대근동 신화와의 관련들에 관심이 많아 종교사학파하고의 관련을 맺게된다. 이스라엘 주변 고대 근동과 성서와의 관련은 벨하우젠이 단지 이스라엘 역사, 종교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으로부터 더 한층 진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이른바 비벨-바벨(Bibel-Babel) 논쟁이 일어난다. 이는 1902년 독일 베를린에 있었던 '독일 근동연구소'에서 행한 델리취 (Friedrich Delitzsch)의 강연이 논쟁의 발단이 된다 (F. Delitzsch, Babel und Bibel : ein Vortrag - 4., durchges. Aufl. Leipzig : Hinrichs, 1903. - 81 S. : Ill., Kt.). 논쟁의 중심은 1차대전 이후 새로이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에집트 유물들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종교(바벨)와 성서(비벨)간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논의들이었다. 이런 논쟁은 궁켈로 하여금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우선 벨하우젠과 궁켈의 큰 차이들을 보자면, 벨하우젠이 오경의 여러문서들이 각기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시대의 기록이며 이는 바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본 것이고, 궁켈은 그 문서들이 기록된 것은 아주 후대의 일이지만, 이미 그 자료들은 그 이전에 구전의 형태로 전해져 왔다고 보았다. 또한 여러 설화들과 율법 규정들의 배경은 어떤 특정한 장소와 관습들과 연관을 갖고 각기 독립적으로 보존되어 왔다고 보았다.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유명한 말이 바로 이런 각각의 문학유형들이 발생하고 전달된 본래적인 배경을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다. 궁켈의 작업은 설화와 율법규정들을 개별 단위로 취급하고 이 문서들이 최종적으로 문자화 되기 그 이전 단계의 이스라엘의 생활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결국 벨하우젠이 육경안에 4개의 자료층을 발견해 각 단계의 이스라엘 종교제도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궁켈의 연구는 이를 보다 더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궁켈의 이런 작업은 그의 창세기 주석(H. Gunkel, Genesis, Göttingen : Vandenhoeck & Ruprecht, 1901. - LXXIV, 450 S.)을 통해 히브리 족장들의 설화에 적용시켜 이스라엘 초기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를 살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설화들은 특정 목적에 따라 결정된 어떤 기본 틀들이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히브리 족장들의 설화들은 어떤 특정 장소가 어떻게 후에 성소가 되었는지, 또는 어떤 특정 관습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 이 개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후대에 특정 인물과 지역에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로 형성되었고, 바로 이것이 후대에 확대되어 자료들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 자료들에 연구가 바로 벨하우젠의 공헌이다. 창세기 주석에서 궁켈의 관심은 바로 각 개별적인 설화들이었고 이 개별 설화들이 갖고 있었던 각자의 고대 사회상이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초기 종교 및 사회상에 대한 연구는 예언자 이전의 시대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J와 E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궁켈의 양식비평방법을 그의 동료였던 그레스만 (Hugo Gressmann, 1877-1927)은 출애굽기에 나타난 각 설화들에 대한 연구에 적용했다 (H. Gressmann, Mose und seine Zeit : ein Kommentar zu den Mose-Sagen, Göttingen : Vandenhoeck & Ruprecht, 1913. - VIII, 485 S., FRLAN 18). 그의 출애굽기 연구는 전승사비평방법을 이용하여 개개 단위들의 원래 배경과 목적들을 살피는데 있었고, 이로부터 시내산은 활화산이라 그 장소를 시나이 반도 동편으로 잡는다든가, 십계명 연대에 대해 벨하우젠이 후대 연대를 잡은 데 (Wellhausen, Prolegomena, 392-393) 반대하고 예언서보다 더 오래된 이스라엘 종교의 기본 전승들중 하나라고 보게된다 (Gressmann, Mose, 471ff.).

그 이후 약 20-30년간 오경연구의 방향을 종합해보면, 하나는 오경비평이라는 맥락에서 4가지 문서 자료들에 대한 연구와, 또 다른 방향은 오경의 각 부분들에 대한 세밀한 연구방향으로 나타난다. 특히 E문서의 각 단락들이 잘 맞질 않고, E에 있던 어떤 설화들이 J에서도 약산 수정되어 나타난다는 점등으로 인해, E를 단독 작품이라고 보지 않는 견해들이 나왔고, E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서사시체이며 이는 많은 부분이 J 기사와 병행하는 점을 들어, 프록쉬 (Otto Proksch)는 후대 편집자가 이 두 서사시체의 역사를 종합해 하나로 만들 때, J를 기초로 하고 E를 여기에 결합시켰다고 본다 (O. Proksch, Das Nordhebräisch Sagenbuch, Die Elohimquelle, Leipzig, 1906). 그러나 폴쯔 (Paul Votz)는 문서 형태로 존재했던 E라는 문서에 대해 부정한다 (Paul Volz und Wilhelm Rudolph, Elohist als Erzähler - ein Irrweg der Pentateuchkritik?, BZAW 63 Berlin 1933. - 182 S.). J로부터 분류해 낼 수 없으며, 낸다고 해도 이는 J에 첨가된 주해정도일 것이라고 일축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단독 자료로서의 E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이스펠트 (Otto Eissfeldt, 1887-1973)는 그 둘을 나누어서 오래된 것을 L(J나 E에 비해 신학적인 내용이 없다고 보아 이를 '평신도자료' Laienquelle의 앞자를 땄다), 후대 것을 J로 본다 (Otto Eißfeldt, Hexateuch-Synopse : die Erzählung der fünf Bücher Mose und des Buches Josua mit dem Anfange des Richterbuches / in ihre vier Quellen zerlegt und in dt. Übers. dargeboten samt einer in Einl. und Anm. gegebenen Begr. 2., unveränd. Aufl. Darmstadt : Wiss. Buchges., 1962. - XVI, 285). 포러 (G. Fohrer)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갖았지만, 다만 그 이전 문서를 N(유목민 자료 Nomadenquelle) 이라고 부른다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 begr. von Ernst Sellin. Neu bearb. von Georg Fohrer. - 11., durchges. und erw. Aufl. Heidelberg : Quelle & Meyer, 1969. 598 S.). J와 E에 비해 D는 문체에 있어서 특징적이고 신명기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욱이 드 베테(de Wette)의 연구 이래 D는 요시아에 의해 발견된 성전 율법서와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폰라트(G.v.Rad)는 D의 많은 자료들이 북 지파들의 초기 역사들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신명기 배후에 있는 자료들과 전승의 흐름에 대한 연구들이 활성화를 띠게 된다. P에 대한 연구는 한때, 유대인 학자 카우프만(Y. Kaufmann)이 연대를 포로기 이전으로 보았지만, 그리 인정받는 이론이 되진 못했다 (Y. Kaufmann, The religion of Israel : from its beginnings to the Babylonian exile. Transl. and abridged by Moshe Greenberg. - 6. Aufl. New York, Schocken Books, 1986. - XII, 486 S.). 제사문헌으로 불리우는 P에 대한 연구는 P가 원래 한 설화군이었고, 여러 제의 규정들이 여러 단계를 거쳐 그 안에 통합되어간 것으로 본다. 레위기도 P에서 나온게 아니라 오히려 후기 단계서 통합된 여러 규정들이 수집되어 형성된 책일 가능성이 크다 (M. Noth, Levitikus; K. Elliger, Levitikus, HAT 4 Tübingen 1966, 9-20).

궁켈이 창세기 주석을 마친 뒤 연구 관심을 이제 시편에 집중하게 되는데, 바로 민속설화에 있는 기본 유형과 같은 것을 시편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런 그의 관심에 주의를 기울인 이는 그의 제자였던 모빙켈 (Sigmund Mowinckel, 1884-1966) 이었다. 예레미야서와 시편에 궁켈의 방법론을 광범위하게 적용시킨 모빙켈은 출 20,2-17의 십계명 연구에서 시내산 야웨계시 그 이면에 고대 전승이 있음을 주장하게된다 (S. Mowinckel, Le Dékalogue, Paris : Alcan, 1927. - VII, 162 S. E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 16). 그는 십계명은 오랜기간에 걸쳐 성장한 수집물이라고 보았다. 특히 시편연구를 통해 모빙켈이 본 '삶의 자리'는 포로기 이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었던 가을축제를 떠올렸고, 이를 그는 '야웨의 대관식 축제'라고 불렀다. 즉 십계명과 같은 율법 규정들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제의에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궁켈이 오경 설화의 구전의 전승 단계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었다면, 모빙켈은 이것들의 이야기가 구성되고 형성되는 데에는 제의와 예식 규정들이 작용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덴마크 학자 페터슨 (J. Petersen)은 출 1-15장 출애굽 이야기는 유월절 축제 의식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J. Petersen, 'Passahfest und Passahlegende', in: ZAW 52, 1934, 161ff.).

모빙켈과는 다르지만 양식비평과 전승사비평 방법을 통해 알트 (A. Alt, 1883-1956)는 1934년 이스라엘 율법 기원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발표한다 (A. Alt, Die Ursprünge des israelitischen Rechts, Leipzig : Hirzel, 1934. - 71 S. Berichte über die Verhandlungen der Säch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Leipzig, Philologisch-historische Klasse ; 86, H. 1). 여기서 알트는 율법의 중요한 두 가지 형태를 발견하는데, 하나는 "만약 ...하면"으로 시작하는 '결의론적 법'(출 21,18-19.20-21)으로 이는 고대 근동의 법과 아주 유사하다고 보고 궁극적으로 이 법은 바로 이 고대근동의 법들로부터 기원했다. 그리고 이 '삶의 자리'는 일상적인 판결이 행해지던 지역 성문이라고 보았다. 또 다른 하나는 명령, 금지령, 저주문, 분사구문형 법조문등 이런 형태의 모든 것들을 총괄하는 것으로 이를 '정언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정언법이 이스라엘적이고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는 면에서 이는 야휘스트적이라고 본다. 이후 마틴노트에 의해 제기된 암픽티오니 가설처럼, 국가 이전 암픽티오니 중앙제의 제도들을 통해서 이 정언법이 시행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크뤼제만은 법전들의 어느 한 부분을 특별히 이스라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법전의 연대, 본래성을 주장하려는 시도들은 타당성이 없다고 비난한다 (F. Crüsemann, Die Tora, 19).

오경 연구는 무엇보다도 문서 이전 단계에 대한 연구들로 주를 이루게 되었고, 거기에 또한 이스라엘 제의에 대한 인식들이 자리를 넓혀가게 되었다. 오경연구에 있어서 양식사 비평 결과는 벨하우젠 이론에 다음과 같은 수정을 요구하게 된다. 양식비평이 관심을 두었던 제의와 관습을 말해주는 수많은 설화와 규정들은 벨하우젠이 그의 문서별로 나눈 연대기 구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종교 제도들의 실제 역사는 벨하우젠의 명백한 연대기 구조를 따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궁켈의 오경 연구보다 그 자취를 훨씬 더 크게 남긴 이가 바로 폰 라트 (G. v. Rad, 1901-1971)와 마틴 노트(M. Noth, 1902-1968)이다. 폰 라트의 연구 업적은 구약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폰라트의 신학에 대해 정리한 것으로는 H.W. Wolff, Gerhard von Rad : seine Bedeutung für die Theologie, drei Reden von H. W. Wolff; R. Rendtorff; W. Pannenberg. München 1973; James L. Crenshaw, Gerhard von Rad : Grundlinien seines theologischen Werks, München 1979; Rolf Rendtorff, "Gerhard von Rad", In: Gesammelte Studien zum Alten Testament, 1975, S. 277-280 등을 참고하라), 우선 그의 신명기 연구는 신명기 배후에 있는 전승들과 함께 신명기 전체가 전제하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계를 보여준 것이고, 1933년 P문서의 구조와 신학 연구에서 P가 초기 다른 두 자료들로부터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두 개의 초기 자료를 그는 PA 와 PB 라고 불렀다 (G. v. Rad, Die Priesterschrift im Hexateuch : literarisch untersucht und theologisch gewertet, Stuttgart, 1934, BWANT 65, 4, 13). 또한 1938년 육경의 양식비평 연구 (Das formgeschichtliche Problem des Hexateuch, Stuttgart 1938 BWANT 78, 4, 26)는 육경 편집 비평연구에 획을 긋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특별히 J의 구조들에 관심을 갖았고, 이른바 그에 의해 만들어진 '작은 역사적 신앙고백'을 발견하게 된다 (신 6,20-24; 26,5b-9; 수 24,2b-13). 이것을 그는 역사적 신앙고백의 전형이며, 이는 한때 예배행위속에서 신앙을 제의적으로 확증하는 순서에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폰라트의 연구는 이전 벨하우젠이 오경의 자료들에 대해 연구하면서 각기의 자료들의 기원의 문제가 바로 그 자료들의 역사적 신뢰도에 중심을 두었다면, 폰라트는 J가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였는가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결국 이는 이스라엘의 과거사에 대한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과거역사에 대한 표현을 통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로 그 방향이 전환된 것이다.

마틴 노트의 작업은 벨하우젠에서부터 폰라트에 이르기까지 줄 곳 오경 내지는 육경의 연구가 여호수아서에까지 이뤄져 온 것이었는데, 노트는 1938년 여호수아 주석을 통해 여호수아서안에는 J, E, P 자료는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M. Noth, Das Buch Josua, HAT 7, Tübingen 1938, 21953). 그는 오경 이외의 두 가지 역사설화 연구를 하게 되는데, 이른바 신명기사가 작품이라 불리는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서 까지와 역대기사가 작품인 역대기서와 에스라 느헤미야서이다. 여호수아서에는 창세기에서부터 민수기까지 있는 자료들과 동일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신명기의 D자료는 그도 인정을 했고, 이로써 그에 의한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4경(Tetrateuch)신학이 나오게 된다 (M. Noth, Überlieferungsgeschichte des Pentateuch, Stuttgart 1948). 폰라트의 이론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노트는 가장 초기의 짧은 설화들이 어떻게 복잡하고 커다란 복합 설화로 자라나게 되었고 후에 이것이 어떻게 민족 역사를 서술하게끔 되었는가를 밝혔다. 이것을 가능케 했던 5가지 주요 주제가 있다고 보았고, 이는 족장들에 대한 약속, 출애굽, 광야유랑, 시내산 계시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노트는 자료들과 그것의 배경이 되는 전승들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고, 이는 궁켈이 각 자료들 배후엔 역사적 깊이가 있다는 점을 더욱 확실하게 해 준 것이다. 폰라트와 마틴노트에 의한 오경 내지는 육경 연구는 문서비평 작업에 전승사연구비평 방법을 결합시킨 것이었는데, 바로 여러 수많은 작은 단편들이 J와 E 자료군으로 들어오기 이전 각 단편들 나름대로 각자의 배경과 성장단계들을 갖고 있었고 이것들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전승사 연구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서비평과 전승사비평 방법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문제를 제기하며 나선 이가 롤프 렌토르프(Rolf Rendtorff)이다. 그는 전승사 비평방법은 과거 4문서자료가설을 필요치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Rolf, Rendtorff, Das Überlieferungsgeschichtliche Problem des Pentateuch, BZAW 147, Berlin 1977). 폰라트가 야웨기자를 신학자로 보는 것이 바로 육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본데 반해, 렌토르프는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다 (R. Rendtorff, "Der "Jahwist" als Theolge: zum Dilemma der Pentateuchkritik, in: Congress volume (SVT 28), Edinburgh 1974, 158-166). J를 신학자로 본다는 것은 그를 한 명의 저자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데, 사실 족장들에 대한 약속의 주제는 유독 오경중 창세기에만 두드러질 뿐 나머지 책들에선 편집되어 간간이 보여진다는 점이다. 또한 출애굽 소식을 접한 에집트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질 땅이 조상들에게 약속되었던 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 시내산 계시와 광야유랑, 땅 정복 기사등 일련의 이야기들이 편집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현재 오경은 다양한 자료들의 결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이 초기 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J기자의 시기는 아니었다는 것이 렌토르프의 주장이다. 오경이 어떻게 하나로 결합될 수 있었던가에 대한 마지막 단계에 대한 관심을 렌토르프는 P에게 주목하고 이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 신명기학파에게서 찾아야 할 것을 말한다. H.H. 슈미트 (H.H. Schmid, Der sogenannte Jahwist : Beobachtungen und Fragen zur Pentateuchforschung, Zürich 1976)는 오경의 편집구조는 이스라엘 왕정 말기 시대로 추정한다. 이미 8세기 예언자들이 오경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벨하우젠의 문서가설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특히 J와 E에 대해서 매우 많은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지난 20년간 전통적인 오경 문서 가설을 뒤집게 되는 달라진 최근 오경 연구들의 현황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W.H. 슈미트 (W.H. Schmidt, Einführung in das Alte Testament, Berlin, 51995)는 그의 구약개론 서문에서 최근 오경연구의 달라진 상황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오랫동안 오경 연구의 가장 큰 중심역할을 해왔던 이론들이 이제는 점차 무너지고 있다고 최근 오경연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즉, 폰라트의 '작은 역사적 신앙고백'에 의한 오경해석, 노트의 지파동맹설에 의한 초기 이스라엘 역사 이해, 알트의 결의론적 법과 정언법에 따른 족장들의 신앙 재건연구와, 그외 신명기와 요시아 종교개혁과의 연결, J의 초기 연대설과 아울러 오경의 문서 자료 구분설 자체에 이르기까지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다고 말해준다.

1980년대 들어서 오경 연구에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H.H. 슈미트이다. 이미 1976년 '이른바 야휘스트에 대하여 - 오경연구에 대한 관찰들과 질문들'에서 그는 시내산 전승층과 출 3장 연구를 통해 J 자료들이 신명기 역사서 (Dtr.)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민 11,1-2과 21,4의 도식은 사사기 2,14이하; 3,8이하; 10,6이하에서 보이는 "불순종-야훼의 진노-부르짖음-구원"의 도식과 같다는 점, 모세의 소명기사는 문서예언자들의 소명 도식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점, 갈대바다 구원 이야기에 보이는 것도 사사기 7,4-9의 것과 비슷하고 모두 '거룩한 전쟁' 모티브를 사용한다는점 등을 들어 J는 바로 신명기사가의 연대와 동일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 군네벡(A.H.J. Gunneweg)은 H.H. 슈미트가 J와 후대 편집층을 구분하지 않고 그 모두를 신명기사가 시대로 본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A. H. J. Gunneweg, "Anmerkungen und Anfragen zur neueren Pentateuchforschung", in: ThR 48 (1983), H.3, 227-253, 특히 227-245 참고). 아무래도 최근 오경연구에 가장 주목할 이 중 하나가 렌토르프일 것이다. 그의 '오경 전승사 문제' (1977)에서 그는 오경의 중심 전승군들인 원역사, 족장사, 에집트체류, 출애굽, 시내산, 광야유랑, 땅 점령등은 개별적인 독립 전승들이었다고 본다. 창세기 있는 족장들에 대한 약속 주제가 그 다음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로써 지금까지의 J.E.D.P의 오경문서설을 부정한다. 그에게 있어서 문서설의 용어들 대신에 오히려 '원역사신학', '족장사 신학', '시내산 전승신학'으로 쓴다. 그는 현재의 오경이 이루어지게 된 것에는 4단계가 있다고 보는데, 1. 최소단위, 2. 소단위, 3. 대단위. 4. 최종단계 이다. 예를들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은 소단위에 속하고 이들은 각기 독립적인 성장단계가 있었고, 이것이 신학적인 작업을 통해 족장사라는 대단위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대단위들이 모여 오경을 이루게 되는데, 이 대단위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오경의 최종단계에 속한다고 본다. 이러한 오경의 최종 마무리 작업을 그는 '편집' 또는 '편집자' 라는 말 대신에 '수집자 Sammler' 또는 '개작자 Bearbeiter'라는 용어 사용을 제안하기도 한다. 오경의 최종편집자가 P라는 종래 학설에 반대하고 '신명기 영향을 받은 개작자 (신명기 사가하고는 다름)'가 오경 전체를 연결해서 현재 최종형태의 오경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포로기전 예언자들이 오경 전승이나 인물들에 대해 침묵한다는 사실은 오경의 형성 시기는 포로기 혹은 포로기 그 이후일 것이라 추측한다.

전통적인 4 문서설을 고수하되 오경 전체가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지는데 각각 편집의 과정들이 있었다고 보는 이가 본 대학의 W.H. 슈미트이다. 그는 다음 세 가지 유형의 편집들이 있었다고 본다. 첫째는, 가장 오래된 J와 E를 연결시킨 편집으로 이를 RJE로 칭한다. 그것의 구성이 이루어진 것은 북 왕국 멸망후 (722)이다. 포로기 이후 결정적인 편집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J/E를 P에 끌어 들여와 열결시킨 것으로 RP로 칭한다. 그 다음은 신명기와 열왕기서에 이르기 까지 신명기 사가 작품에 가까운 여러 본문들이 편집되어 들어오게 된다. 단지 이 편집단계가 D가 JE와 연결된 JED 다음에 P가 편집단계로 들어와 JEDP가 된 것인지, 아니면 P가 먼저 JE와 연결된 다음 따로 D가 이 JEP 다음에 편집되어 JEPD가 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말한다.

1970년대부터 일어난 전통적인 문서가설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선 다음과 같은 것들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첫째, 주로 문서가설 유형의 대상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전반부에 해당하는 것들이었고 이것을 통해 오경 전체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 더 큰 문제는 도무지 무엇을 갖고서 J. E. P 를 가르는가 하는 문제다. 각 주석가마다 서로 다른 결과들을 나타냈고 형성시기 또한 달랐다. 특히 E에 대한 문제가 가장 심했다. 더군다나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J에 속하는 창 12,1-3과 출 3장은 이제 누구도 옛 문서로 또는 포로기 이전의 것으로 거의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문서비평방법에 따른 문서설이 본문을 심지어 어느 한 절에서조차 자료를 나눈다는 것은 너무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전승에 대한 이해와 비평학에서 점차 받아들여지는 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문서가설에 있어서 가장 취약부분이 바로 E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유들은 E는 우선 단지 단편 조각들로만 되어 있다는 것, E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지에 대해 모호하다 (비록 창 15장 부터라는 설들이 있다 해도). J와 비교할 때, E는 계속 이어서 써 내려간 이야기를 찾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80년대부터 논의 되어온 것으로 E의 중심 본문인 창 22장 아브라함 시험에 관한 이삭 제물에 관한 이야기는 포로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과, 엘리야에서 E로 그리고 호세아로 이어진다는 전승의 연결고리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이는 엘리야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찾을 수 없고, 호세아서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들 또한 최근 호세아서 생성시기의 논의들에 의하면 이는 매우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문제제기는 종교, 사회사적인 것으로 창조로부터 땅 점령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J의 초기연대설과 E의 신학적 입장 역시 지난 십여년간 논쟁거리가 되었고, J안에 있는 유일신신앙과 E의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들은 최근 유일신사상 연구들로 인해 거의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J의 역사신학에 대한 초기 연대설이 점차로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10세기에 이스라엘 안에 J가 말하는 그러한 '국가'란 없었다. 도대체 이미 10세기에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문서로 이미 저들의 문화사를 전제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과거 문서설들에 대한 문제제기들로부터 나온 최근 지난 몇 년간 오경비평연구의 결과들은 무엇일까?

첫째는, 기계적 문서설의 오류로부터 전승들의 그 과정에 중심을 두고 일어난 '편집'에 대한 관심이다. 언어와 신학적 손질을 통해 보다 다른 유형을 지니게 된 편집사 연구가 그것이다.

둘째는, 지금까지 보다 덜 주의했던 오경에 나오는 법전들, 계약법전, 성결법전, 신명기 법전들에 대한 연구이다. 여기서 여호수아에서부터 열왕기서까지의 책들의 성장과 관련하여 후대에 가서야 오경의 틀이 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연대기적인 것으로, 더 이상 초기 왕정시대로 볼 수 없고, 초기 역사문헌들은 기껏해야 포로기 이전 말엽인 7세기에나 가능하다는 것으로 J의 후대 연대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쩽어를 비롯한 뮌스터 학파 이론은 포로기 또는 포로기 이후 초로 보기도 한다). 이런 근거는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역사 경험중 아주 큰 위기를 겪으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다는 것인데, 즉, 722년 앗시리아에 의한 북왕국 멸망과 남 유다에 대한 위협으로 인한 것이든지, 아니면 586년 남 왕국 유다의 멸망으로 인한 결과일 것으로 보는 것이다.

넷째는, 오토(E. Otto)의 견해로 본문의 층들에 있는 연대기가 바로 신명기의 핵심이 된다고 보고 그 연대를 7세기로 본다.

다섯째, P의 연대를 550遁녀에서 400년 사이로 보고, 이것이 하나의 문서 층인가 혹은 여러 저자들의 것인가에 논의의 중심을 둔다. 이것이 원래 개별 작품으로 남아 있었던 문서자료일지, 아니면 편집층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못하다.

여섯번째, 오경편집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단지 이전의 자료들을 편집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본인의 구상에 따라 전체 구조를 맞추어 수정, 가필 또는 더 많이 기록함으로써 생산되었다는 제안이다.

이상의 새로운 오경 연구의 문제제기들로 나온 결과에 따른 새로운 경향들과 새로이 등장한 모델들을 학자별로 구분해 본다.

첫째, 가장 큰 변화의 움직임은 통시적인 물음들에 대한 포기이다. 이는 전통적인 문서비평들이 해 온 생성시기들에 대한 연구들이 아니라 그 동안 도외시 되어왔던 오경의 현재 모습인 최종 형태에 대한 공시적 연구를 의미한다. 이런 경향은 특히 영.미계에서 더욱 불고 있다. 그러나 최종형태 본문의 복잡한 문서층들을 단순히 공시적으로 볼 수만 있을지는 의문이다.

두 번째, 루퍼트(L. Ruppert)와 바이마(P. Weimar)로 대표되는 것으로, 자료들이 성장단계에 더 많이 증가된 것으로, 편집층들과 이전 대본들이 있다는 모델이다. 이는 전통적인 J.E.P 각자 완결된 작품이라는 것이, 전승과정들에 대한 연구결과 오경의 여러 본문들에게 있어서 모두 적용되어지지 않는다는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전승과정들이 사회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사적으로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방법론상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문서비평에 대응하는 것일지 의문이다. 요즘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세 번째, 4경인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가 신명기에서 열왕기서까지 일련의 작품보다 그 시기가 더 오래된 것이라는 모델로 이를 대표하는 학자들은 M. Rose, J. van Seters, N. Whybray 등이다. 이는 창세기에서 출 1-15장까지에서 나온 문서설을 가지고 전체 오경에 적용시킨 문제를 제기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560경 작품으로 간주되는 이른바 신명기사가의 역사서 (DtrG, 신-왕하)를 갖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바로 신 1-3장과 신 5-11장안의 중요한 부분들, 그리고 신명기사가 역사서는 남(유다) 신학을 그려주는 것이며, 이들은 창세기,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무언가 그 강조점이 달라져 나타나는 비제사문헌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경안의 비제사문헌들은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신명기사가역사서를 만들어 준 그 이전 구조물이며 이것이 제사문헌에 까지 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신명기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타나는 평행본문들간의 상관관계가 정확할지는 의문이며,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그 복잡한 비제사문헌들을 규정한다는 것도 물음이 되고 있다.

네 번째, 렌토르프 (R. Rendtorff), 불룸 (E. Blum), 알버츠(R. Albertz); 카(D.M. Carr)등이 주장하는 모델로, 오경은 전체 이야기들과 오경 각 단원들을 구성지게 만든 후기 구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1) 오경의 각 책들은 저마다 언어와 신학적 특색들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약속/언약신학은 출애굽기에선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였던 각 문서 자료들에 따른 저자설에 반대하는 것이며, 오경의 각 책들 또는 책의 단원들은 각자의 생성연대를 갖고 있다가 후에 오경이 만들어지면서 함께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2) 오경 각 책들의 언어와 신학적 유사성이 포로기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 나타난다는 점은 창-민까지 이에 해당하는 분분들의 구성은 바로 DtrG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며, 아직 제사문헌은 여기 들지 않았다. 이를 신명기적 구성 KD 라고 부른다.

3) 오경의 최종 구성엔 분명 사제신학이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이때, P문헌이 단독적으로 구성을 이뤘고 (이를 제사문헌 구성 KP라고 부른다) 그것이 KD와 서로 대응관계를 유지하며 나타난 것일지(불룸, 알버츠), 아니면 P문헌은 단지 하나의 편집층일지 (렌토르프)는 논의중이다. 만약 제사문헌 구성 KP이 단독 작품이라면 오경의 최종형태의 생성은 그 뒤에 편집 자료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 편집자료들안에서 제사문헌 구성 KP이 신명기적 구성 KD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신명기적 구성 KD이 그렇게 늦은 시기로 잡힐 수 있을지가 첫 번째 물음이다. 또한 이 모델은 신명기 생성과 그것과의 평행본문들(신 1-3장과 민 11장 13-14장; 신 9-10장과 출 32-34장)간의 이해가 고려되지 못한 점이 있다. 또한 제사문헌 구성 KP과 신명기적 구성 KD에 대한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설명되어져야 한다.

다섯 번째, 오토 (E. Otto)가 주장하는 것으로 포로기 제사문헌이 오경 자료의 가장 먼저 것이며, 오경 편집은 바로 오경의 저자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가장 초기의 설화자들의 이야기와 출애굽전승들을 연결시킨이는 바로 515년 제2성전봉헌 이전에 생성된 제사문헌이며 이는 창세기 1장 천지창조에서부터 시나이에서의 제의 규정 (출 29장)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오경 자체가 바로 P와 신명기간의 상호 연관성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제2성전이 재건된 이후 P의 관점으로, 신명기는 P의 시나이의 제의 규정들과 율법 계시는 포로기이후 공동체들을 염두에 두고 일어난 것이며, 여기에 출 20장의 십계명과 계약법전 그리고 성결법전들이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P와 신명기의 오경편집은 P에게 있던 짧은 족장들의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야곱 이야기들이 덧붙여지면서 확산된 것으로 보고, 포로기 이전 신앗시리아의 왕조이데올로기를 갖고 이스라엘의 계약신학을 만든 출애굽이야기를 이끌어 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오경편집은 창 1장의 작은 창조이야기를 2-3장에 의해 보충시켰고, 한편으론 창조로부터 레위기 16장 속죄일까지, 그리고 다른한편으론 거기서 부터 모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 34장)를 긴장감 있게 연결시켰다고 본다. 이런 오경 편집이 갖고있던 관점이 오경과 여호수아서를 잇는데까지 작용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경편집 모델은 오경의 복잡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 세부적인 것들과 나아가 그 전체를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증거를 마련해야만 한다.

여섯 번째, K. Schmid의 이론으로, 오경의 생성은 창세기에서 열왕기서에 이르는 역사서의 생성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족장들의 이야기와 모세-출애굽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된 것은 비로소 포로기 이후이며, 창 12-49장에 나오는 여러 기원에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부터 왕하에 이르는 것 역시 포로기 이후 초기 생성된 제사문헌고 함께 창 2장부터 왕하에 이르는 대 장편 역사서에 함께 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창조로부터 포로에 이르는, 그리고 구원시대 (창-수)와 심판의 시대 (삿-왕하)에 대한 구분은 페르시아의 관점(Behistun 문헌)이라고 본다. 창-신까지 구분은 창-왕하에서 떼어낸 약 400년경 페르시아시기라고 본다. 오경의 마지막인 신 34,10-12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이스라엘엔 없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오경편집의 의미는 바로 창-신까지에 대한 예언의 재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부터 왕하에 이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 가설에 제대로 들어맞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포로기 이후 본문이라고 보는 창 15, 출 3장과 수 24장이 정당할지는 의문이다. 아울러 창세기 안에 있는 약속주제 신학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와 있는 것과 차이를 보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의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 것인지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독일 뮌스터대학 카톨릭신학부 구약교수인 쩽어는 1980년 "오늘날 오경연구의 상황"이라는 그의 소논문에서 오경의 자료설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문서모델, 단편모델, 보충모델들의 그 어떤 결합된 새로운 모델이 나와야 할 것을 제안했었다 (E. Zenger, "Wo steht die Pentateuchforschung heute?", in: BZ NF 24 (1980) 115). 그로부터 건 20년이 지난 현재 그는 도멘(Ch. Dohmen)과 호스펠트 (F.-L. Hossfeld)와 더불어 뮌스터 학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E. Zenger,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3판 1999, 119 이하, 1995년 제1판이 나올 때만해도 그의 새로운 대안 모델은 나타나질 않았었다). 쩽어는 이 모델은 중립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델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통해 현재 오경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1) 오경은 처음에 세가지 전승의 흐름들이 있었을 것이다 (비제사문헌으로의 J, 제사문헌 P, 신명기적 문헌 D). 이들은 각기 역사를 갖고 전해져 내려오다 서로 얽히면서 오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2) 전승들이 그 모습을 갖추게 된 그 처음이 무엇일지는 아직 분명치는 않으나, 오경 문헌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설화들, 법령들과 그외 잡다한 족보이야기, 영웅적 전설들, 성소에 관련된 이야기와 지역전승들이 작게 또는 커다란 하나의 설화 구성을 이루는데에로 묶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3) 초기 역사이야기는 7세기에 아모스, 호세아와 이사야등 예언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앗시리아로 부터의 북이스라엘 멸망과 남유다의 위협에 처한 저들의 역사인식에 기초한다. 벨하우젠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J 후기 연대설이고, 이를 예루살렘 역사서 JG (Jerusalemer Geschichte)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신명기의 가장 옛 자료로 이는 우선 법규정들을 모은 것이고 이야기 설화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약 700년경 히스기야 시대로 이를 히스기야신명기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옛 계약법전(출 20,22-22,33)이 여기 들어가고, 예루살렘 역사서 JG와 함께 신학적으로 함께 묶이게 되었다. 이 히스기야신명기는 요시야 시대 더 확장되었고, 역사신학을 이루는 신 1장에서 수 22장을 포함할 것이다.

5) 586년 유다의 멸망과 함께 처음부터 포로기까지의 새로운 역사인식이 필요하게 되었고, 많은 편집과 계속 이어서 써내려간 포로기 역사서 EG의 단계가 있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은 포로기이전 말엽에 속하는 원역사인 창 2,4b-8,22, 예루살렘 역사서, 계약법전, 포로기이전 말엽의 신명기, 사사시대로부터 왕들에까지 일련의 이야기들(삿, 삼상하, 열왕상하)이다. 이 포로기 역사석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신명기적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6) 바벨론 포로기때 이루어진 제사문헌의 기초문헌 Pg (Priesterliche Grundschrift)이다. 여기는 특히 에스겔,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신학 영향을 받았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제의에 관련된 문헌들이 대폭 들어온 보충제사문헌 Ps (여기서 S는 보충을 뜻하는 supplementum에서 따온 것, 또는 이차자료의 뜻으로 sekundär로 보는 이들도 있다)이다. 여기 성결법전인 레 17-26장이 들어간다.

7) 그 다음 단계로 신명기적 신학과 사제신학이 함께 어우러진 시대로 약 450년경 이후 느헤미야 시기 이후포로기역사서와 제사문헌집이 집대성되며 나온 게 대역사서인 창 1-왕하 25장까지이다.

8) 400년경 창1-왕하25장으로부터 앞의 다섯권을 따로 떼어내어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오경이 만들어진다. 이를 에스라는 '토라'라고 부른 것이다. 바로 이때 오경의 결론구인 신 34,10-12이 들어간 것이고 전기 예언서와 구분을 지은 것이다.

이상의 것을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뮌스터학파의 오경형서 모델

독일 빌레펠트 베델신학대학의 프랑크 크리제만 교수는 이미 1987년 6월5-6일간 Fribourg에 있는 'Faculés de théologie de Suisse romande'에서, 그리고 Berlin(Oder)과 Paderborn 신학대학에서 행한 초청 강연 "토라로써의 오경-오경의 최종형태 해석에 대한 서론"과 이를 1989년 EvTh 잡지 49호(Frank Crüsemann, 'Der Pentateuch als Tora' -Prolegomena zur Interpretation seiner Endgestalt)에 게제 할 당시, 역사비평은 그 시작서부터 큰 덩어리인 오경을 조각조각 해체해가면서 그 이전 단편들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했었다는 점을 비판하고, 오래된 단편들로부터 오경이라는 틀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인해 오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만큼 서로간에 간격이 커졌고 이것이야말로 오경비평의 위기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그의 최근 오경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과 결과들과 최근 연구동향에 대한 이해와 함께 오경을 이스라엘의 법제사를 통해 이해한 토라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 (Frank Crüsemann, Die Tora. Theologie und Sozialgeschichte des alttestamentlichen Gesetzes, München 1992)는 오경의 최종형태가 주는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