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개론 게시판

  롤프 렌토르프, 새 계약(신약)이 옛 계약(구약)을 대체했는가?
  박경철
  

새 계약(신약)이 옛 계약(구약)을 대체했는가?
Hat der neue Bund den alten ersetzt?
Rolf Rendtorff(1925년생,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구약교수 역임, 1990년 은퇴)
번역 박경철


‘구(舊)-오래된 것’과 ‘신(新)-새로운 것’이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때,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를 둘로 나누어 표현할 때 이미 들어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곧 ‘구(舊)약성서’와 ‘신(新)약성서’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 둘을 이렇게 서로 대립시켜 표현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오래된’이라는 말이 무언가 낡아빠져 이젠 벗어 버려야 하는 그런 것을 뜻하는가? 아니면, 이 말은 무언가 오래된 것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처럼, 그런 긍정적 요소로서의 고귀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 아울러 ‘새로운’이라는 말은 ‘새 것’혼자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옛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새 것’이라는 말 안에도 역시, ‘옛 것’에다 무언가 새로 더 쌓아올리는, 다시 말해 옛 것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그런 의미를 내풍기는가?
필자는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지 그 여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개념은 여러 해석과 적용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의 두 부분에 대한 명칭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들어있다. 바로 ‘계약/언약(Testament)’이라는 단어다. 이 말의 어원은 일반적으로 ‘계약’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라틴어 ‘테스타멘툼(testamentum)’이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이는 헬라어 ‘디아테케(diatheke)’에 해당하는 말이다. 성서를 둘로 나누어 각기 이름을 붙일 때 이 두 단어를 결합시킴으로써, ‘옛 계약’과 ‘새 계약’이라는 서로 부합할 수 없는 문제를 야기 시킨 것이다. 이 문제는 곧 모든 신학적 문제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사고는 모두 이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것들 역시 성서 본문들로부터 끄집어 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서를 제대로 살펴보면 결코 맞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본고의 문제제기로 삼은 “새 계약(신약)이 옛 계약(구약)을 대체했는가?” 라는 질문은 ‘그렇다’라고 대답될 수 있는 폭넓은 여러 견해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새 계약’이라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하나의 새로운 실존인 반면, ‘옛 계약’이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그들의 삶의 실재였고, 이제 이것은 ‘새 계약’을 통해 사라져버리고 대체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들에 대해 성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옛 계약’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뿐 아니라 신약성서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몇 가지 논쟁의 소지가 있는 본문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하라). 이는 ‘옛 계약’과 ‘새 계약’이라는 둘을 서로 대립시키는 표현은 성서의 언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신약성서 안에 ‘새 계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아래 참고) 원칙적으론 구약성서에서 ‘계약’에 대해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들과는 분명히 관련이 없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신다는 생각이 매우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의 첫 번째 인간을 추방한 다음, 인류 역사의 두 번째 장을 여는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과 나아가 온 생명체와 계약을 체결하신다(창 9:8ff.). 이 계약의 내용은 비록 인간의 죄악이 여전히 존재할지라도(참고 8:21), 8장 22절에서 분명하게 밝히듯, 창조세계를 보존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계약은 온 창조세계의 보존에 대한 일종의 보증 같은 것이다. 창조세계와 맺으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이 첫 번째 계약의 특징은 “땅이 있는 동안” 결코 파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서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과 계약을 맺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창 15장의 계약체결은 아직 “떠돌아다니던” 아브라함에게(18-21절) 땅을 주겠다는 약속과 맺어져 있다. 창 17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7절 이하) 아브라함에겐 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계약의 표시”로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모든 남자는 할례를 행해야 했다(9-14절). 이제 계약은 쌍방에 걸친 것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계약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앞으로 나아온다. 이런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는 시나이 장면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제 “계약 준수”, 곧 계약의 의무사항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출 19:5). 여기서 말하는 계약은 모세가 ‘계약의 책’에 쓴 준수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 사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꺼이 받아들인다(24:3-8). 여기 모세가 쓴 것을 다른 곳에서는 ‘토라’라고 부른다(예를 들어 신 30:10).
그 뒤에 하나의 새로운 위기상황이 생긴다. 모세가 없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세우고 경배한 것이다(출 32장). 하나님은 당신의 분노로 저들을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모세의 중보로 인해 그의 결정을 철회한다(7-14절). 그리고 새로 계약을 맺는다(34장). 여기 또다시 홍수 이후에 있었던 일이 재현된다: 비록 인간-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죄를 짓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약을 굳게 붙잡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 후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항상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약을 놓지 않는다(참고 레 26:40-45). 이처럼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역사란,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의무사항을 지키시는 분이며, 이는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상의 기본적인 입장이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새 계약”(렘 31:31-34)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실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과 맺었던 첫 번째 계약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그 형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계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고,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토라 안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 이후에도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코 잊지 말도록 또는 이를 거슬리지 않도록 “그들의 마음에”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희망이다. 이는 근본적인 문제가 계약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나약한 그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렇기에 이 ‘새로운’ 계약은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 바뀌지 않고 있을 동안만큼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계약을 없애거나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지금까지의 계약이 여전히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은 바울 자신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로마 교인들과의 논쟁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이 자신의 동족이라고 말하고 뒤이어,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다)...”(롬 9:4)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 시대 유대인을 의미하는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아울러 그는 이 계약이 결코 파기되거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보았다. 바울이 바로 신약성서에서 유대인의 성서인 ‘구약성서’를 의미하는 ‘옛 계약’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유일한 사람이다. 바울은 유대인이 그들이 갖고 있는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이 ‘옛 계약’을 읽을 때에 그것에 덮개를 씌웠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했다(고후 3:14). 물론 여기 나온 ‘옛 계약'이라는 말이 우리 주제와 관련한 ‘옛 계약’에 대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기독 신학자들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새 계약”의 약속을 신약성서의 “새 계약”을 가리키는 말로 연결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로 인해 매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선 예레미야가 무엇을 희망했는지 그 내용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새기라’는 토라가 미래의 소망인 신약성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다음으로,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자체를 “새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문제다. 이와 관련해 이 개념이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 바로 성만찬을 제정하는 본문이다. 마태(26:28)와 마가(14:24)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잔을 돌리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하고, 반면에 누가(22:20)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언약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누가의 것을 떼 왔다(고전 11:25). 공관복음서 모두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것”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마태는 여기에 “죄를 사하기 위하여”라는 말을 덧붙인다. 근본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새 계약”이란 예수의 피다. 여기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의미가 들어있다(참고 사 53:12). 바로 여기서 시나이에서 계약 체결시 나왔던 소리를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곧 “계약의 피”라고 말한 것이다(출 24:8). 그렇다고 이것이 ‘옛 것’과 ‘새 것’이라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거나, 그 둘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런 연유로 이제 우리는 “계약”이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하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고, 그 반면에 비록 신약성서에서는 “계약”이라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새로운 기독교의 자기이해를 위한 기본적인 개념으로 확장된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덧붙여 논의할 주제로 위에서 본 것과 유사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즉,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에 대한 논의다. 지난날 신학적인 사고와 언급들은 교회가 바로 ‘새로운’ 또는 ‘참된’ 이스라엘, 나아가 ‘육적’인 이스라엘에 상대해 자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여겨 온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렇게 굳어진 신학적 표상과 성서 본문 사이의 모순은 보다 더 현저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위해 쓰인 ‘새로운’, ‘참된’, ‘영적’이라는 개념들은 신약성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는 결코 그 어디에서도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2017-03-14 07: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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