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개론 게시판

  프랑크 크뤼제만, 성서에 나오는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 타종교들에서 다양한...
  박경철
  

성서에 나오는 바로 그 하나님 한 분이
타종교들에서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섬김을 받는 것인가?

Wird der eine Gott der Bibel in vielerei Gestalt in den Religionen verehrt?
Frank Crüsemann(1938년생, 독일 빌레펠트 베텔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은퇴)

번역 박경철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대화는 기독교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 변화의 움직임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 그리고 이 다음에도 무언가 완전히 다른 도전들 앞에 직면해 있는 것은 아닐까? 거기엔 여러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점점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오늘날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일상에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타종교들로부터 도전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더 많은 관용과 대화를 하도록 말이다. 만약 다양한 종교들 내에서 무언가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타종교들과 그들의 신앙의 고백들로 인해 부딪치는 논쟁들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이들에게 하나님은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이완 반대로 유대교 신앙의 중심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그의 절대적인 배타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는 오직 한 분이시다.” 예전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저 유명한 신조인 신명기 6장 4절 말씀은 유대교의 신앙고백이 되었고, 오늘날 유대교의 모든 예배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은 바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를 통해 이방 민족들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살전 1:9) 저들의 우상을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겐 더 이상 다른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 세계에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왕하 5:15)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 스스로도, “나보다 먼저 지음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사 43:10)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들은 어쩌란 말인가?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아주 오랫동안 자명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처럼, 이제 타종교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하는가? 참되신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이 곧 유일한 진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모든 것은 곧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이러한 “절대적 진술”은 우선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는 데에 쓰였다. 이는 유럽에서 시작된 세계정복을 정당화 시켰다. 모든 지역마다 종교적 통일성을 위한 강압이 이루어졌고, 기독교 안에 수많은 신앙고백의 갈등들을 부추겼으며 심지어 전쟁마저 야기했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종교적)중립국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하면서도,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갖도록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여러 종교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오랜 역사 가운데 지속 되어왔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기독교 교회들에 대항하여 이는 관철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공학교에 걸려있는 십자가상으로 인한 갈등들이 표출되고 있으며, 도시마다 울려 퍼지는 이슬람교의 기도소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일 신앙만이 진리임을 고수하려는 것과 다양한 종교와 세계관을 인정하려는 상호 관계를 서로 대립시키는 양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이 지키고 있는 신앙의 진리가 상대화되면 안 되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종교간의 평화를 위해서 엄격한 성서의 유일신앙을 포기하면 안 되는가? 그도 아니면 다신교 신앙의 또 다른 형태를 모색해야 하는가? 여러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되어지는 그런 하나의 신성 같은 것 말이다.
참되신 하나님, 오직 그분만을 섬기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신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곧 진리라는 신앙은 유럽 교회들의 독선과 잔인함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성서 곳곳을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의문시 된다. 특히 매우 중요한 것으로, 세 번에 걸친 족장의 부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 이미 에집트에 있을 때, 그가 좋지 않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창 12장), 창 20장에서 아브라함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던 이방 민족의 땅에서 체류할 당시, 또 다시 그의 부인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부인으로 인해 혹이나 해를 당할지도 모를 불안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방 블레셋 왕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자신의 궁중 안으로 데려오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은 그 이방 왕과 한 밤이 깊도록 오랜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실수로 죄를 짓지 않도록 그를 지키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일로 인해 블레셋 왕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엄청난 화를 불러 올 수도 있는 일을 했냐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여겼소”(11절). 그런 다음 서로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이방민족과 축제의 계약 체결이 이루어진다. 서로가 평화를 맺고 좋은 이웃임을 확인된다(21:32; 참고 26장). 성서의 표현인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윤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우리가 ‘종교’라 일컫는 것과 상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에겐 사악한 우상들이 판을 치고,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어떤 기본 예의나 권리도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분명 우상숭배를 하던 이들이었다. 사무엘상 5장에 의하면 (블레셋의 땅) 곳곳에 다곤 신이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전에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법궤를 갖다 놓았다. 이로 인해 참되신 하나님이 우상과 함께 놓여짐으로써 둘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우상은 땅에 떨어졌고, 그 다음엔 부러져 몸통만 남게 되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모든 우상들을 죽이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희망이었다(습 2:11).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이냐 아니면 우상을 섬길 것이냐? 어떻게 이 둘이 공존할 수 있나? 그 둘의 차이를 어떻게 말 할 수 있나? 만약 누군가 자신 스스로 둘 중 어딘가에 관련되어 있다면, 그 차이는 실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상숭배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세력들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남들은 신도 많고 주도 많다고 하고,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고전 8:4-6).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그의 대요리문답에서 제1계명을 주석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 한 분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또는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대답: 한 분 하나님이란, 어떤 경우에라도 모든 선한 것을 주시며 피난처를 주시는 분이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그를 의지하며 믿습니다. 마음의 의지와 신앙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국 하나님과 우상 둘을 만듭니다. 당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며, 무엇을 의지할 것인지, 그것이 바로 당신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반복적으로 크고 강한 우상숭배를 의미하는 세력들이 나타난다. 돈이 좌우되는 곳에서나 또는 어떤 성공을 결정짓는 곳에서 그렇다. 또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우상이 지배하는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그렇다. 우리들에게나 또는 다른 이들에게도, 교회에서나 또는 다른 종교들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로 우리를 지배하려는 우상들이 늘 존재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의 계명들을 알지 못하는 세계의 민족들은 마태복음 25장에 따라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도움을 주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된다. 이는 창 20장에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어떤 종교이든지 무관하다. 우상숭배를 하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든지 그 중 어느 하나가 지배하는 곳에선 다른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낯선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성서의 근본적인 계명 중 하나로 하나님 자신과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해주는 것이 있다: “너는 너를 위해 그 어떤 상도 만들지 말라.” 십계명 중 한 계명이다. 이는(형상금지계명) 우선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상들을 의미할 수 있고, 다음으로는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설정한 개념들과 정의들이 만든 모든 상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을 전부 다 아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상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를 구별 짓는 것이다. 그 무엇도 하나님과 상대할 수 없고, 그 어떤 신적인 것으로 경배될 수 있는 그렇게 경험될 수 있는 것도 없다. 비록 하나님과의 경험을 매개로 전해진 전통과 전승들이 말해주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우리는 단지 그 하나님(전통과 전승이 말해주는)을 알 수 있을 뿐이며, 그에 대해 말 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영원히 우리가 아는 것 그 이상으로 다른 분이다.
형상금지의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타종교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개방시킨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곧 이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것에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을 역시 다른 문화와 종교들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다음의 것들만이 유일한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할 지라도, 우리들에게와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며, 또 무엇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를 구별 짓는 그 척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곧, 곤궁에 처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해 정의를 실천할 것이냐 아니냐?, 유대백성과 맺어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 생명과 자유를 위해 일하시는 그 분을 따를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이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성서의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기독교 교회들이 형상금지계명을 종종 뒷전으로 젖혀놓았던 것 보다 더 분명히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고유한 하나님에 대한 표상들이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 분 하나님 신앙을 보다 더 강하게 붙들어 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고 있는 표상들과 개념들로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종교들의 도전들에 대해 보다 큰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해 준다. 우리가 타종교인들과 동일시되지 않아도 또는 우리의 고유한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2017-03-14 07: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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