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학기 감신대학교 성서와 문화 강의

  김상룡 [ 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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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도시화·농민분해: 매춘자원의 지속적 동원과 사회적 순환

김상룡(신96), 전웅제(신00), 기지혜(신01)

1960년대의 한국은 '증산·수출·건설'의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국가·민족지상주의는 조속한 조국근대화와 '중단 없는 전진'의 목표를 단기간에 이루어내기 위해 조급한 이데올로기 논리들을 양산해낸다. 그 논리들 주변엔 창녀들이나 호스티스들도 조국 근대화의 엄연한 주역일 수밖에 없다는 억지까지 등장한다. 사실상 이 말은 그 내면에 한국의 매춘을 인간의 얼굴을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자는 논리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조장하거나 그 치부를 미화시킬 수 있는 한 최대한 수식시켜 보자는 모순마저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 논리는 70년대의 개발독재기를 거쳐 80년대의 관광기생 출현단계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된다. 권력이 매춘을 비호하고 국가가 매매춘 현상을 묵인하며 관광정책이란 미명 아래 일방적으로 대외 종속경제의 한계를 보상받고자 했던 또 다른 모순의 출현.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어도 이 땅에 뿌려진 매춘문화의 씨앗을 걷어내고 그 암울한 시간들의 끈끈한 찌꺼기들을 치울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 땅의 매춘문제에 대하여 언제고 한번이라도 제대로 쳐다본 적 없었고, 고작 최소한의 복지나 알량한 사회정의의 슬로건 정도 떠들어대면서 그 안에 이 문제까지 섞어 처리하곤 했던 것이 지난 시간들 속의 공식적 추억거리일 뿐이다. 아니 더 솔직히 얘기한다면,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매춘문제에 관해 정부나 국가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보건증을 발급하고 성병 검진이나 해주면서 보균자를 관리·통보하는 업무나, 이른 새벽 여관문 앞에서 작업을 마치고 나서는 창녀(혹은 여관바리)들 몇 명 잡아다 관할 파출소에서 심문·취조하고, 그녀들 뒤에 있던 포주의 주머니에서 돈이나 뜯어낸 얼굴 없는 형사들을 두둔했던 일들이 모두였다.
이와같이 기묘한 이중·삼중의 '반매춘'(反賣春)논리는 이 땅에 일찍이 국가적 차원에서의 매춘정책이란 개념은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책이 있어도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겉으로는 방지하면서도 내면적으로 이를 조장하는 모순을 범해 왔던 불일치의 오류 또한 심각한 것이었다.
매춘여성의 공급을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지는 비인간적인 인신매매가 횡행하는 장소인 남문시장이나 양동이 시경 바로 옆에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국가에서 이를 묵인 또는 방지하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직적 범죄를 없애야되는 책임을 가진 부서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결국 이러한 사실이 매춘은 물론 인신매매를 지속시키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모순, 즉 매춘 현장과 공권력간의 '근거리' 문제는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알아도 눈 감아주고 이따금 곁눈질하면서 적당히 손만 보는 매춘 묵인의 관행이 이 땅에 자리잡은 지도 꽤 여러해가 되어간다.
앞서 몇 차례 밝힌 바와 같이 매춘 주체들의 인구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통계수치는 이제껏 공식적으로 집계된 바 없고, 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연구자료 하나 옳게 정리된 것이 없었던 우리의 현실은 그 동안의 매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매춘 통계가 사라지는 시점이 1964년 경임을 알 수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난 30년간 매춘문제에 관한 한 '통계불모'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고, 동시에 정치 행정의 민주화와는 달리 '정책부재'와 '연구부진'의 다중적 모순을 경험해 왔다고 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이러한 모순들이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임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즉 통계를 낼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정책이 나올리 없고 미래를 예측·대비하기 위한 현실조치로서 정책이란 개념 자체가 전무한 상황 속에서 지적인 연구만을 기대한다는 것 또한 공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1964년 당시 한국의 매춘여성 인구는 33만 명으로 집계되었고 이 숫자는 한국전쟁 직후 1955년 당시 11만 명 대비 만 10년만에 3배의 증가추세를 반영했다. 1947년, 공창제도가 없어지고 법적으로 매춘을 막았어도 수적으로 매춘여성들이 급증했다는 사실은 매춘방지에 대한 정부 정책의 실패를 여지없이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제 휴전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의 정확한 매춘인구 역시 헤아릴 길이 없고 다만 다양한 판매형태를 고려, 최대 150만으로 추계할 따름이다. 휴전 후 40여년 간, 결국 한국의 매춘여성 인구는 최고 15배의 증가현상을 보인 것이다. 그 정확한 통계가 얼마인가 하는 문제와 관계없이 여전히 오늘 이 시간에도 매춘여성들의 상업적 성 행위나 그 주변집단, 혹은 매춘 수요자들 모두의 욕망사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적 강제장치라곤 '윤락행위등방지법'(淪落行爲等方地法) 하나밖에 없다. 이 법은 5·16 직후인 1961년 11월에 사회악 일소의 일환으로 제정·공포된 이래 현재까지 시행 중에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제정된 이래 성의 판매형태와 루트 역시 매우 다양하게 발전했고, 매춘의 불법화 조치와는 달리 보다 근본적인 사회문제로서 도시의 빈민여성 문제나 여 취업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법을 제정하고서도 매춘을 막지 못했고, 더 나아가 매춘 유휴遊休)자원들을 포함하여 빈민여성 다수를 취업시킬 수 있는 법적 유인장치를 마련해 주는 역활도 담당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해방 후 제정·공포된 법률 가운데 '선언적 의미'만이 가장 컸던 법률이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법 제정만을 통해 매춘 행위를 근절시키고자 했던 1961년의 시도는 오히려 가난했기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절대빈곤층의 여성들에 대한 성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현실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는 '모순의 법'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해방후 특혜적이고 불철저한 토지개혁과 50년대의 미국 잉여농산물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한국농촌경제는 피폐화되었고, 60년대 이후 차관에 의한 종속적 공업화 우선정책으로 도시부문간의 불균등 발전이 심화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대량의 이농인구가 발생하였고, 도시로 유입된 대규모 실업자군과 도시빈민층을 형성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취약성에 의해 대거 배출된 빈곤층 여성들이 매춘여성으로 유입되어 이들은 청량리 588, 역주변, 기지촌 등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포주와의 관계에 매어 매춘행위를 하였다. 전통적 매춘에 속하는 이들은 흔히 '창녀'로 불리는데 거의가 하층계급에 속하며 적대적 빈곤으로 인해 매춘여성이 된 경우이다.
해방 후 한국 매춘의 사회·경제사에서 이 같은 분석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시각 가운데 하나이다. 아니 여기에서 더 이상의 분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각 개개인의 수준에서 왜 매춘행위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에 관한 미시적 경험 조사연구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 한국 매춘문화의 지속은 결국 급속한 도시화와 그와 비례하여 농촌의 해체, 농민의 분해가 가속화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설명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도시화 추세가 서구 일반의 그것과 어떤 차이를 갖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 별도의 논의주제이며 매춘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국의 도시화 과정에 내제되어 있던 급속한 인구유입 문제와 도시화 이전의 '문화해체'문제가 서로 맞물릴 수밖 없었고, 결과적으로 과잉집중된 도시인구의 '여성잉여' 자원들이 급속한 서구화 추세에 발맞추어 이미 유입·확산되어 있던 매춘문화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그 '이면사'가 문제될 따름이다.
피폐해진 농촌사회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진 여성들이 '무작정 상경'하여 역전에서부터 매춘조직의 사슬에 묶여 전통적인 인신 매매조직의 하수에 포섭·유린되어 가는 모습은 1960년대의 이 땅 매춘사의 한 단면을 장삭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해체된 농촌'과 '분해된 농민'사회의 박탈사치를 보상받는 과정에서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역경을 딛고 성공한 다수 인간들의 경험으로 상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이미지는 창녀로 전략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여인'들의―고향 행―'화대 송금'(花代 送金)으로 더욱 감상적인 차원에서 심화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 이미지의 확산도 근대화 후기에 이르게 되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되어 간다. 즉 한국 자본주의 후기단계에 이르러 매춘현상은 초기 때와는 전혀 다른 '구조적 분화'와 ' 기능적 전문화'의 패턴을 밟게 된다. 즉 성의 판매형태 자체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적대적 빈곤 때문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일들이나, 미군 기지촌 혹은 특정지역에서 집단을 이루면 포주 등 중간조직과 연결되어 성을 팔았던 이른바 '전통형 매춘'으로 창녀의 사회적 존재양식은 크게 퇴조한 반면, 상대적 빈곤 때문에 또는 보다 쉽게 돈을 벌거나 쾌락을 얻기 위해 고학력자나 10대·20대층이 향락업소를 매개로 하여 호스티스·콜 걸·오정기생·면도사·안마사·남창 등으로 변신, 을 파는 소위 '산업형 매춘'이나 '겸업매춘'현상이 1970년대 후반부터 크게 늘어난 것이다.
한국경제의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적 고용정책으로 여성노동력이 파출부, 행상, 하청 등의 비공식적 노동부문등에 제한되어 있는 구조가 개선되지 않은 채, 70년대에 들어 접객서비스업 부문의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새롭게 창출되었다. 경제구조의 불균등 발전과 상관없이 접객서비스업의 비대화되면서 새로운 직종인 호스티스, 맛사지걸, 안마사, 면도사 등에 여성이 대거 고용되면서 간접적 매춘행위를 하게 된다. 이처럼 외관상으로는 공식적으로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사업장내의 노동자이지만 실상은 매춘여성과 다름없는 신종직업을 '산업형 매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산업형 매춘이 확대되는 것은 독점재벌에 대한 정부의 특혜지원으로 중소기업이 이들 독점재벌과의 경쟁에서 도태하 되자, 중소기업가들은 기업운영에서 눈을 돌려 안전투자로 기업보다 훨씬 손쉽고,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향락 접객서비스업종에 모여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향락산업은 날로 번창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매춘여성의 수요를 창출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과 관련하여 김엘림은 매매음 행위가 이 땅에서 심각하게 만연된 원인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성을 파는 여성 개인의 도덕적 일탈상황만을 문제시하는 등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실효성 없는 현행법의 내재적인 문제점을 들 수 있으며 둘째, 일제시대 이래로 외국군이 계속 주둔하는 특수한 상황과 가부장제 사회와 자본주의의 파행성이 빚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구조적 모순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경유착 등으로 인한 접대문화의 형성, 경제성장의 불균형과 열악한 근로조건 등으로 인해 존립기반을 잃은 중소자본과 제조업부문 근로여성의 3차산업으로의 유입, 서비스산업의 이상 비대화, 매스컴 등을 통한 서구 퇴폐향락 문화의 확산, 돈이면 무엇든지 사고 팔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성을 사는 남자의 행위에 대해 관용적인 사회의식, 국민의 가치관 혼돈 등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셋째, 법적 근거가 없거나 법과는 상치되게 추진되어 매매음 문화를 사실상 조장·묵인하여 온 정부의 윤락관련 정채과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매매음국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한 파행적 관광정책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엘림의 이 같은 원인분석과 앞서 인용해 본 몇가지 기존연구들의 시각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특히 한국 매춘의 사회사에서 외국군대의 지속적 주둔과 해방 후 현대사의 정치경제적 파행이란 변수들 이외에도, 권력과 자본의 유착이 매춘을 양산·조장할 수 있었던 직·간접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공감하는 데 적지않은 의미를 갖는다.
권력과 자본이 매춘을 알선·조장하고 더 나아가 그 '악의 연결고'를 강화시키는데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의 잔재로 뿌리깊은 영향력을 지속, 1980·90년대에까지 이어지는 고질적 병폐로 작용한다. 정치권력이 매춘을 비호하고 더 나아가 경찰력을 위시한 공적 정치폭력 장치까지 매춘현상을 묵인·방치하게 된 현실은 대기업의 권력유착 결과, 갈곳 잃은 중소기업의 주력업종의 향락산업으로 대체되는 현상과 어우러지면서 사회적 모순을 더욱 중폭시켜 나간다. 권력도, 자본도 성을 미끼로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한껏 향유했고, 더 이상 확실한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젖줄을 잡고 있는 자에게 '접대의 명목'으로 매춘이란 수단을 애용하려 했던 대기업들의 기업운영 방식은 아직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배제할 수 없는 직효수법 가운데 하나이다.
권력과 자본은 서로간의 이해를 교환·증폭시키기 위해 매춘 채널을 은밀하게 활용했고, 또 그러한 관행을 사회적으로 지속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의 수많은 사회집단들과 그 구성원들 역시 성을 수단으로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메시지를 착실하게 학습해 나갔다. 외세의 논리가 매춘 확산에 기여했던 이 땅의 해방 후 풍속은 이제 60년대에 들어와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그 남은 여백을 파고들면서부터 기기묘묘하게 대체·전이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매춘과 권력, 대자본과 중소자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긴밀히 원하게 되었고 공생·공존의 먹이사슬을 형성, 거대한 그물망을 짜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땅 위 어느 곳에 있는 고기이든지 건져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50년대 이후 60년대까지 한국 매춘의 대명사격이었던 '창녀'라는 그 서럽던 이름도 이젠 거의 명맥만이 유지될 뿐, 더욱 화려하고 다양한 얼굴의 신종 매춘업 종사자들이 이 땅 구석구석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영업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성을 사고 파는 일이 가능해진 한국사회에서 이제 이러한 일들은 조금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오늘의 매춘문제에 관해서는 뒤에 자세히 논의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매춘행위를 강제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장치로 남아 있는 '윤락행위등방지법'의 현실적 허구성과 그 모순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법이 현실에 맞게 고쳐지지 않은 채, 아직도 시행중에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현실은 변해도 법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오히려 법이 '변해버린 현실'을 비웃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를 강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이 법률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거나, 혹은 일사불란학 무자비하게 이 법의 강제규정을 적용하려 들지 않았다. 단 한번도 이와 같은 작업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은 채, 간헐적인 행정지도나 관례적인 계몽사업을 통해 시민들의 자각을 유도하거나 자율적인 계도가 병행되기만을 바랐다. 정부당국은 이 유명무실한 허구적 법률장치를 그대로 존치시켜 나가면서 대신 기형적인 관광 정책과 신종 산업형 매춘을 용인·합법화함으로써 매춘문제 처리에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매춘 현실 속에 깃들여 있는 근본 모순은 매춘현장 속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비인간적·반사회적 행태와 비극적 현상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극도로 유리된 채 조문화되어 있는 법적 강제장치의 허구성과, 이를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국가·사회·시민 모두의 무관심과 무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우선 국가나 정부는 왜 이 법률의 허구성과 모순을 알면서도 고치려 들지 않았는가? 이에 관해서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잇는 기관은 역시 보건사회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이러한 물음에, 아니 그 누구의 지적에 대해서도 보사부 당국자가 적실성 있게 답변했다고 기억하지 못한다. 매춘문제에 관한 한, 보사행정 당국자도 법 집행실무자도 '입은 있으되 말은 못 하는' 현실은 결국 자본과 권력의 공생·공존과 그 관계의 은밀한 유지욕구로밖엔 변명될 수 없었다. 즉 권력이나 자본 모두는 매춘현상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앗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이같이 기묘한 논리 속에서 매춘인구는 자신들의 이기적 쾌락을 증폭시켜 나갈 수 있었고 또 시장공간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아무도 말리려 들지 않고 철저한 쾌락추구의 원칙만을 고수하려 했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이 법률은 매춘 억제를 유도할 만한 최소한의 강제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단지 초라하게 그 선언적 의미만을 반영해 주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60년대 이후 한국의 매춘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지난 30년 이상 변함없이 존치되고 있는 이 법률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하는 문제부터 먼저 천착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법은 과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 법률조항들은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 없이 매춘행위를 '강제규제'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조문들을 예의주시해 보면 상당부분 비논리적인 함정들과 현실에서 벗어난 규정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법은 매춘의 주체와 단죄 대상이 성적으로 '여성'일 뿐이란 사실을 논리적으로 은폐하고 있다. 즉 여자들에게만 불리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불공평한 입법조치였다는 모순을 안고있다. 이와 아울러 이 법 매춘이란 개념보다는 '윤락(淪落)이란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여인들이 타락하여 몸을 버리거나 성을 사고 파는 행위에 현혹될 경우를 염두에 두어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 사후에도 여성들을 선도·구제하려는 취지를 배경에 깐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법률은 여성들의 성적 타락을 사전에 방지하고, 타락했다 하더라도 사후에 이를 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상당한 인도주의적 입법취지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어디까지나 여성들이 육체적으로 타락하여 몸을 버리게 될 상황과, 이러한 상황을 조건지우는 일체의 광범위한 인적·경제적 변수들만을 의식하여 그 조건들만을 제거하고 이를 '징치'(懲治)할 경우 문제가 해결될 수 잇는 것으로 오인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문제는 윤락행위의 '방지'를 권고하고 이를 응징하려는 초보적 '결의'만으로 임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사회모순으로 정착된 매춘현상과 그 주변의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게 된 사회현실에 있었다.
이 땅의 매춘현상을 단지 '윤락'이란 개념적 잣대로 재어 이를 방지하는 법률조항 몇 개 정도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가능했던 시기가 바로 1960년대였다. 정치적 혼락과 경제적 빈곤현상이 서로 결합하여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이제 서서히 그 구체적인 얼굴을 드러내던 시기에 매춘이란 문제는 이렇게 순진한 차원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다. 유난히 강하고 순결한 정조관과 극심 청교도적 윤리관을 강요당해 온 한국의 여인들에게 '윤락'이란 어휘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개념이었고, 또 '육체적 타락'이란 상황은 곧 죽음 그 자체와 직결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문젯거리였다. 따라서 입법 초기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만큼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과는 다른 풍속기준을 반영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 법률은 인습적인 '남존여비'사상과, 60년대까지 지속되고 있던 '남성우월주의' 혹은 '가부장적 권위주의' 가치관을 또 다른 토대 밑에 감추어 놓고 잇었다. 즉 매춘여성들을 '윤락녀'라느느 제한된 시각에서 바라보되, 그 행위의 방지를 법적으로 권고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선도·보호조치하겠다는 발상의 배경에는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하여 김엘림은 현행법 체계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판한다.
문제의 소재는 성을 사고 파는 행위와 이러한 행위를 조장·착취하는 행위 그리고 성을 파는 행위를 시킬 목적으로 인신매매하는 행위(이하 '賣買淫行爲等')에 두어야 하고 이러한 '매매음행위 등'은 財貨의 생산 뿐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과 인간생활의 모든 부분에 걸쳐 상품화를 확대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산업구조에 의해 심화되고, 여성의 性의 상품화를 합리화하고 조장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성적 억압의 한 형태로 보며, 우리 사회에서 특히 성행하게 된 근본원인을 사회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현행법은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거나 은폐·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입법태도는 남성의 외도나 무절제한 성욕의 분출에 대해는 본능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대한 반면 여성에 대해서는 순결을 강요하고 이를 잃은 경우에는 이유나 상황여하를 막론하고 문제시하며 선도나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성윤리의식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근본적으로 현행법이 윤락행위의 주체와 문제의 대상을 '성을 파는 여자'로만 한정하고 있다는 불공평함,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비인간적 문제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는 불만에서부터 출발한다. 여자들에게만 불리하게 적용되고 있는 현행 윤락행위등방지법의 모순은 분명 쌍벌죄의 규정을 두고 있지만, 실제법 집행과정에서 이 규정 역시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미 이러한 사실은 상식화된 지 오래다. 법 집행과정에서마저 여자들만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현실화되어 있는 한국의 매춘문화는 법의 존재 그 자체를 본능의 이름으로 파기시키게까지 발전할 것이다.
이들 문제점 이외에도 현행법의 구조적 모순은 상당부분 누적되어 있다. 특히 처벌형량이나 범죄의 예방효과 혹은 범죄유형 역시 비현실적이며, 과태료나 벌금규정도 극히 미온적인 수준에서 존속되고 있다. 그리고 윤락방지 업무를 수행해야 할 행정당국(보사·교통·내무·법무·각 시도 부녀, 청소년과 등)의 횡적 협조체계가 거의 수립되어 있지 않고, 선도보호조치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규정이 애매하여 단지 직업교육 차원에서 윤락녀들의 사회복귀를 권장하는 실정에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는 윤락녀들을 위한 '요보호여성'용 보호지도소는 단 한 군데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이 개념은 단지 법 조문상의 기구일 뿐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또한 이 땅의 '윤락녀'를 전통직종인 '창녀'의 존재양식에만 국한시킬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겸업 매춘 주체들을 과연 누가 나서서 어떻게 지도·선도·구제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방법과 구체적인 절차는 매우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현행법의 시행령은 주로 '이·미용업'종에로의 직업전환을 주요 목표로 설정, 이를 교육·권장하고 있으나 과연 이땅의 매춘인구 모두를 면도사나 미용사로 바꿀 것인가 하는 의문 역시 당연히 제기된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근본 모순과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는 현행법은 '사문화'되어 그 실효를 거두기 어렵게 된 지 이미 오래다. 내용 자체의 시문화 추세와는 별도로 문제가 되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이미 어쩔 수 없이 기정사실화된 한국의 매춘시장을 암암리에 합법화시켜 주었던 30여 년 전의 '의도된 예고' 조치였다고나 할까? 현행법 부칙 제2조의 규정에는 '과도정부법률 제 7호 공창제도폐지령은 이를 폐지한다'고 밝혀놓았다. 즉 미 군정 치하에서 공창의 재이유가 사라진 마당에 새로이 규정되었던 공창제도폐지령은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제정·공포되자 그 역시 존재할 이유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공창제도폐지령의 폐지'는 다분히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말인즉, 이 땅에 공창을 없애고 만일 매춘행위를 자행한다면 그 주체나 대상 모두를 실정법에 따라 의법조치한다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 1961년 현행법 발포 당시의 정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윤락행위를 방지한다는 법적 명분 아래 과거 공창의 입법근거를 말소시키면서 대신 그 위에 '사창'을 공식적으로 합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 말해서 공창의 법적 정당성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체하여 새로운 법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과거의 공창 기능이 사회에서 존속될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필요성을 완곡하게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사회통념상 용인된 사창, 락행위란 개념 안에 이미 포장되어 있던 매춘행위의 현식적 허용,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들을 묵인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법률조항을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공권력의 지나간 관행…. 이러한 와중에서그 법 규범의 당위와 현실 사이의 틈바구니를 방황하며 과거 이 땅의 공창문화는 오늘날의 사창문화로 대체 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따로 분명히 있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이 기묘한 '이중논리'는 매춘문화의 기형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것이 과거 공창에서 파생된 문화이든 아니면 '사창화된 공창'의 왜곡된 문화논리이든 간에, 이 땅에 엄면히 존재하고 있는 현상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시키고자 하는 공권력의 모순 또한 여기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매춘시장의 인적 자원들과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현실계도에 턱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행정당국 , 그리고 매춘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입법화되어 있는 현행법 체계의 모순. 이 세 가지 변수들이 따로따로 변명의 논리를 준비하는 동안 이땅의 매춘 현실은 급기야 구재불능의 상황을 맛이해 가고 었다.
현행법 시행 이후 이제것 따스한 마음으로 가슴을 열어 언제고 한번이라도 한국정부가 매춘자원들을 이해하려 들거나 진정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솔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단지 묵인과 방치의 관행만이 지속될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관심속에서도 소극적으로나마 과거 정부들이 관심을 가졌던 흔적은 무었이었을까?
1961년 11월 9일, 현행 '방지법'을 제정한 쿠데타 주체는 1962년 4월, '인신매매금지 및 타인의 매춘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유엔협약'에 서명한다. 그러나 동년6월, 쿠데타 주체는 보사·법무·내무 3부합동으로 국내 총 104개소의 특정 윤락지녁늘 설치한다. 이러한 조치가 바로 공장페지 후 사창의 합법화 조치는 법적 근거도 없이 혁명정부 당국의 직원으로 취해진 것이었다. 당시의 설치명분으로서는 윤락지역을 일반인 거주지역으로부터 격리시킬 경우, 시민들의 풍속과 교육에 미치는 악영양을 희석시키고, 윤락녀들의 집단화를 유도함으로써 이들 스스로가 포주로부터의 착취를 자발적으로 방어하며, 성병 관리 역 효율적일 수 있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그 후, 1972년에 이르러 내무부는 지역사회 정화차원에서 이 특정 윤략지역을 일방적으로 폐지시킨다. 하지만 전국 104개소의 특수지역 가운데 약 70% 정도는 아직도 엄존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 내무부의 폐지조치가 극희 일방적인 것이었고, 주무부서인 보사부가 '윤락여성 집중선도지역'이란 병칭 아래 이 지역들을 존치시키면서 계속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 부처간의 이견과 행정적 불일치 현상은 그지역 자체를 예기치 않게 '문제 있는 공간'으로 사시화하도록 유도했고'공공권력이 성의 상품화 풍조를 조장·방조한다는 비난을 받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1969년에 이르러 현행법 제정 8년 만에 대통령령으로서 동법 시행령과 '윤락행위등방지법에 의한 직업보도시설의 시설기준령' 및 '윤락여성선도위원회규정'이 제정되었고' 다시 7년 뒤인 1976년에 보사부 예규(例規)로 '부녀상담원의 임용 및 배치규칙'이 제정된다. 이들 시행령이나 제반 규정들은 대부분 기왕에 제정·공포된 '방지법'의 범주 안네서 이 법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데 필요한 제반조치들을 명문화한 것들이었고, 특히 선도와 보호, 더 나아가 사회복귀를 향한 대강의 대비책까지를 염두에 둔 것들이었다.
결국 1960년대는 한국 매춘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로 기록된다. 해방과 분단, 건국과 전쟁 등 나라의 사활이 걸린 거창한 문제들에 밀려 매춘문제 그 자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될수 업었던 1950년대 말까지 국가나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속수무책 이었다. 4·19나 5·19의 정치적 충격 역시 매춘문제를 사회 전면에 부각시킬 수 있는 직접적 계기가 되진 못했다. 그러나 쿠데타 주체는 이른바 '구악'(舊惡)을 일소한다는 명분 아래 이 문제를 새삼스럽게 거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947년 군정치하 이래 손보지 못했던 관련법규를 정비한다. 당시 제정된 법이 왜 30년이 지나도록 개정되지 않고 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1·2공화국 당시 손쓰지 못했던 문제를 뒤늦게나마 다루고자 력했다는 사실과, 가급적 문제의 해결방향을 구제와 선도라는 인도주의적 측면에 맞추려 했던 흔적이 있음은 그 당시까지의 비극적 상황을 달래고 위로하는 데 다소나마 힘이 되었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체된 관심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수단까지 보장해 주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1970년대에 들어오게 되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부나 공공권력이 매춘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도리어 자극하고 권장하는 관망세력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 이유야 다 번듯한 논리들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결국 내막은 왜곡된 외하수입 극대화 전략의 일환이었을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도 매춘 주체인 수많은 여인들의 수중으로 돌아가는 돈은 거의 뜯기고 거덜난 뒤 초라한 액수였을 뿐, 착취의 대가는 눈물과 한으로 얼룩진 빈 가슴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혹은 면이나 읍보다는 도청소재지가 있는 도시가 당시 꽃다운 나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외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의 폐허위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은 반가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농업 이외에 별다른 생계가 보장되지 않았던, 그러나 농업도 제대로 유지할 기본적 조건조차 다시 마련될 수 없었던 50년대 중반의 한국농촌은 문자 그대로 해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시대상황은 농촌처녀들로 하여금 도시를 환상의 '수입원'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자본금 없이도 돈벌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자신의 육체를 도구로 할 때 가능할 뿐이란 사실도 득하게 해주었다.
해체되어 가는 농촌, 좌절하며 분해되어 가는 농민들 틈바구니에서 더이상 기약 없는 생활을 정리한 이 땅의 숱한 처녀들은 그래서 서울로, 도시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무작정 길 떠난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악의 손'들 뿐이었다. 이들의 손을 피했거나 아니면 안전한 통로로 빠져나온 여인들은 이미 시작된 공업화 추세에 편승하여 수많은 공장으로 흩어져 일을 했고,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던 자신의 월급을 고향에 송금하며 보람을 느꼈다. 1960년대 사회의 한구석을 지탱하게 해주었던 이러한 이미지는 바로 한국 매춘사의 본격적인 서막이 오르기 전, 순진무구했던 시절의 한 낭만적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나 정부는 돈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증산하고 수출하면서 또 건설까지 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나가면서 내핍과 절약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건설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사역거리가 아니었고, 대자본과 축적된 기술이 결합될 경우에나 기대해 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외채를 들여와 가망 있는 기업을 키우고, 이들을 앞세워 공장을 짓고 실업자들을 대거 고용하여 사회적 동원을 추진하면서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기업은 거대화되어 나갔고 '종합무역상사'라는 '국가의 자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노동하고 돈을 벌던 여인들은 어느덧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그만 못한 중소기업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업체가 도산하고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한 그녀들이 갈 곳은 적어도 떠나 온 고향, 그곳은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충만한 의지를 재삼 확인하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몸 하나로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들은 쉽게 돈벌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방법엔 한도 끝도 없는 고통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된다.
'예상가능한 수입'과 '의도된 타락'의 공생관계, 그리고 그 암울한 '의식의 계약' 속에서 숱한 여인들은 황폐한 시간들이 가해 오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며 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돈이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가 긴요한 비용으로 지불될 때, 그것은 비로서 '갸륵한 자본'의 가치를한껏 발휘할 수 있었다.
농민분해와 도시화, 그리고 산업화가 유인해 들어갔던 매춘문화 형성 사회적 준
거들은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논리적으로 제시될 수 있 것이다. 하지만 그 대표적인 경로는 바로 이제까지 더듬어 본 한 모델 속의 이야기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도 도시로 가면, 그리고 나도 서울에 올라가 공장에서 일만 하면 언니처럼 될서 수 있다는 기대심리는 점차 환상적으로 포장되어 나갔고, 이 같은 허상들이 집단화 될 때, 결국 매춘자원의 지속적 동원과 그 사회적 순환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2-05-16 01: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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