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대학교 기독교학부, 성서해석학
(Biblical Criticism and Hermeneutic)-2002년 2학기

[참고] 구약성서 주석방법론(영문): 본문비평,   문서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참고] 박동현 교수님(장신대) 자료:구약 주석방법론

  박경철 [ E-mail ]
  [자료] 탈정경적 성서 읽기의 모색-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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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다시 읽기

탈정경적 성서 읽기의 모색



김진호-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민중신학




1. 머리말

인류가 낳은 책 가운데서 최고의 스테디셀러 가운데 하나로 단연 성서가 꼽힌다. 성서의 시장성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한국 개신교회의 경우, 공인성서 주지하듯이 한국 개신교는 하나의 종파가 아니다. 그리고 각 교파들간에 의사소통도 그리 원활하지 않은 편이다. 더욱이 개신교회는 교파의 공식 입장이 개별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므로 ‘공인’이라는 것을 공인된 기관의 인증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개신교 교회들은 절대다수가 거의 획일적으로 하나의 성서 판본만을 선호한다. 최근 대한성서공회가 공들여 만든 ‘한글표준판 새번역 성서’가 다른 한글성서 판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중단되고, 유통되던 책들이 모두 수거되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공인성서의 출판 시장은 확고부동하다.
를 독점 출판하는 ‘대한성서공회’는 단지 공인성서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이윤을 올리고 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불교보다 교세가 큰 종교가 결코 아님에도 출판 규모에선, 불교 경전은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교에 있어 정경Canon의 지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성서 교재 혹은 안내서의 시장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류의 책은 기독교 출판물 가운데 가장 안전한 기획상품에 속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서 독해에 그만큼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는 그 양적인 수용만큼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유의미한 책인가? 놀랍게도 성서에 대한 교회의 인식 수준은 그렇게 높은 편이 못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훨씬 더 하다. 이러한 현상은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직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신학교에서 배운 성서에 관한 비평학적 지식들이 사목 활동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은 이젠 신학생들 사이에서조차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편이다. 성서 본문을 하나 이상, 심지어 세 개씩 택하여 읽고,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펴는 설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수많은 설교자들은 성서에 관한 비평학적 연구서들을 독해할 능력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것은 이론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교회의 위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론의 위기’론은 크게 두 입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론이 교회라는 현장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나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이 교회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선교의 위기와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으며, 후자는 현대의 문화로부터 게토화된 그리스도교의 자페성을 문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제기는 이론의 위기와 교회의 위기를 동일한 차원에서 질문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 있으며, 따라서 이론의 위기를 ‘탈’신학/교회화 프로그램을 통해서 넘어서고자 한다. 이것은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유의미한 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 글의 문제의식에 대한 나의 논의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 성서를 통한 삶의 성찰이란 거의 공염불에 가깝다.
도대체 이러한 불균형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서는 다른 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것의 의의를 폄하하는 일체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조금의 관용도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성서관이라면, 그러한 광적인 관심이 왜 성서 해석/이해의 지성사적 혹은 반지성사적 전통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동기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이 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정경화’Canonization라는 제도 형성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추상적이고 집합적 행위자의 신앙 구조로서의) 그리스도교’와 ‘(개별적인 신앙 행위자로서의) 그리스도인’간의 특수한 관계맺음의 양식에 관한 물음을 정경의 형성에 관한 논의와 연계시켜 살펴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기서 ‘제도’를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맺음의 실물적 또는 담론적 장치로서 이해한다. 즉 구조는 제도를 통해서 행위자를 제약하고, 행위자는 제도의 형성을 통해서 구조의 변형을 가져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화란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맺음의 역동적 과정을 다룬다.
우선 정경화 과정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형성과 어떻게 연관되어 왔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정경성Canonicity이 신앙적 성찰에 부정적으로 개입하게 된 과정을 탐문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 이해에서 정경성 문제가 비본질적인 것임을 밝힘으로써, 다른 방식의 성서 읽기의 가능성을 예기豫期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제3장에서는 탈정경적인 성서 읽기의 가능성에 대해 논함으로써, 삶의 성찰의 유의미한 개입으로서의 신앙 형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정경화 과정과 신앙의 형성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정경화 과정은 긴 역사적 논쟁의 산물이다. 나는 이것을 크게 두 단계로 범주화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정경화 제1기는 ‘정경의 범위 획정’ 단계인데, 그것은 대체로 다음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①텍스트의 생산 및 유통⇒②텍스트들의 집성⇒③ 텍스트들의 분류(권위에 따른 위계화)⇒④정경 범위의 획정. 이러한 정경화 과정은 다음 두 가지 사실과 연계되어 있다. 신앙 담론의 주체로부터 ‘대중이 탈각’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신앙 담론 형성이 ‘교회에 의해 독점’되어 가고 있다는 점 유다교의 급진적 갱신운동의 하나였던 예수운동이 전통으로부터 단절하고 하나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운동으로 전화하게 된 것은, 예수 사후에 전개된 일련의 후속 예수운동들의 전개에서 비롯된다. 이때 지역에 정착한 공동체운동으로서의 교회라는 모델은 점차 유일한 예수운동의 승계방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정경화 현상과 긴밀히 연루되어 있다.
이 다른 하나다. 요컨대 예수운동의 다양한 승계 양식 가운데 교회만이 살아남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회의 위계적 직제화가 진척되면서 대중은 단지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반대로 예수운동의 다양한 양식―교회만이 승계의 양식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이 존재하던 시기에는 대중이 보다 적극적 주체로서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가령, 북아프라카 지역에서 초기의 대중종교의 전개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가 고대로마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하게 되면서 이단분파화되었다가(4~5세기) 기어이 이슬람 신앙으로 전교轉敎하게 되는 과정(7~10세기)을 거쳤다고 한다. W.H.C. Frend, ?종교와 사회변화?, 지동식 엮음, ?로마제국과 기독교? (한국신학연구소, 1983) 참조.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이행이 정경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단계는 두루마리 형태에서 코덱스Codex 형태로 문서 텍스트의 생산 및 보존 방식이 전환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하나의 두루마리에는 하나 혹은 몇 개 텍스트만이 수록될 수 있었지만, 두루마리의 길이는 대략 12미터 정도였다. 이것은 텍스트 편집의 크기에 영향을 미쳤는데, 가령, 예언서 두루마리들은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그리고 열두 예언자 두루마리 등이 있다. 이것은 각 텍스트의 크기는 두루마리 하나에 다 수록되야 한다는 조건에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책과 같이 면을 첩첩으로 쌓는 코덱스 방식은 구약성서나 신약성서 전체를 한 권으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정경화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데, 왜냐하면 권위 있는 텍스트로 분류된 것들과 덜 권위 있는 것들을 가르는 명확한 전승 형식의 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장정裝幀 방식의 발전으로 인해서―개별 두루마리들의 형태로서가 아니라―정경이라는 ‘묶음집’을 생산?보존하는 작업이 종교엘리트의 주요 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필사자’(서기관)라는 전문적 성직자의 위상이 크게 부상하게 된 것은 이런 맥락과 연관성이 있다. 여기서 필사자들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필사에 관한 전문적 지식인이었으므로, 이들에 의해 ‘필사학’이 발전하게 된다. 엄격하게 적용된 필사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한 복사본을 생산한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난외주가 포함되었고, 때로는 본문에 변형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이 어느 정도 이본異本을 비평적으로 종합한 흔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문맥 또는 문법에 맞지 않는 것, 필사 당대의 언어 관습에 의해 의미가 와전될 우려가 있는 어투 혹은 불경스러운 어투 등을 고려한 가감첨삭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텍스트 생산 방식 아래선 본문 ‘표현 양식’의 완전한 고정화가 수행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비문자 대중은 텍스트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던 반면, 교회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텍스트의 이해를 둘러싼 치열한 학파적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한편 교회의 지식층은 무지한 대중을 자신들의 신앙적 담론 속으로 포섭하기 위해 계몽적인 그림 텍스트를 생산하였다. 문자가 그림으로 번역되는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의미의 여백이 조성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단계에서 대중은 이해의 소극적 주체일 뿐이었다. 이와 같이 정경화 제1단계는 정경의 획정을 통한 ‘표현 양식’의 고정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것은 표현 양식의 고정화가 의미의 고정화를 가능하게 하리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제로는 표현 양식의 고정화를 둘러싼 필사학 전문가들의 공론장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공론장을 무대로 하여 성서가 신앙적 성찰의 텍스트로 이해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찰의 주체는 전문적 지식인층이었다. 한편 대중은 그림 텍스트 등을 통해 소극적으로만 의미 형성에 관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정경화의 제2단계는 정경 ‘표현 양식의 실질적인 고정화’가 수행된 시기로, 활판 인쇄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도래했다. 인쇄 출판 양식은, 자구뿐 아니라 글자 형태에서조차 완전히 같은 대량 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더욱이 인쇄된 작은 글자체 덕분에 책의 부피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으며, 제작 단가도 더 낮아졌다. 한편 종교개혁과 더불어 성서의 자국어 번역 현상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정경화 운동이 벌어지던 초기에는 성서적 텍스트들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 활발했었다. 이미 주전 3세기경 에집트에서 번역된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 성서(LXX)는 신약성서 텍스트를 포함한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들이 참조하거나 인용한 주요 텍스트였다. 또한 주후 3세기 중반 오리게네스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헥사폴라Hexapola는,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6개국어 대조성서로서 정경적 텍스트들의 번역활동 및 문헌비평적 연구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시사한다. 그밖에 아람어, 시리아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로 정경적 텍스트들이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정경화가 진행되고, 정경 텍스트 이해의 주체가 지식층에 한정되면 될수록 번역은 억제되는 추세를 띠게 되었다.
또한 교회학교 운동Sunday School Movement을 포함한 공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 이후 평등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것과 궤를 갖이 하여 공교육 사상과 그 제도화가 유렵과 신대륙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꽁도르세Marquis de Condorcet가 입법국회에 제안한 ‘공교육의 일반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1793)은 그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그 이후, 특히 19세기에 이르면 공교육은 일반화된 교육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며, 그것의 제도화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문자 대중의 비약적 확대를 가져왔고, 이제 지식대중의 출현은 부르주아 계층의 현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인쇄된 문서 텍스트의 이해 주체로서의 대중이 탄생하게 된다. 이제 다시 대중은 텍스트 읽기의 하나의 주체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설교자/강론자 유형의 선동적 성직자의 위상이 격상된 것은 이런 현상과 연관성이 있다. 이들의 의미생산 방식의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곧 텍스트와 대중간의 중계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들에 의해서 대중이 다시 성서 해석의 중요 요소로 복원되었다는 점이다. 설교자들의 텍스트 이해는 대중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이해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적 지식이든 근대적 지식이든, 지성사적 사고를 진척시킬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대나 중세의 지식인들인 필사자들이나,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지식인들만큼의 해석의 깊이를 구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지성사적 자산을 축적할 의지도 없었다. 왜냐하면 활판 인쇄술의 발전으로 필사문화 자체가 소멸되거나 무의미한 영역으로 밀려났고, 근대적 지식은 반신성주의와 반교회주의에 기반하여 발전했던 탓이다. 그리하여 설교자들에 의해 발전한 교회의 신학은 훨씬 가벼워졌고 대중화되었다. 가령, 신앙적 명제들에 종교적 인과성을 부여하여 나열하는 단순 선형적인 교리가 발전하였다. 과거 필사자들은 정경의 해석을 위해 비정경적 텍스트들을 다각도로 참조하기도 했고, 동시대의 지성사적 혹은 반지성사적 성과물들과 대화하기도 했다면, 설교자라는 해석의 새로운 주역들은 정경 범위 내부의 텍스트에만 집착하게 되었고, 근대적 지식과는 별개의 신성화된 담론 영역을 구축하는 데만 몰두하였다. 성서 텍스트 내부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따라서 그것으로 족하다는 이해가 형성된다. 여기서 우리가 혼돈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그들은 텍스트 내부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믿었지만, 실상 그들의 이해 과정에는 대중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텍스트의 자구 하나 하나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는 온갖 담론적 혹은 실물적인 제도적 장벽을 구축해 놓는다. 그것이 바로 ‘축자영감설’의 종교정치학적이고 제도사적인 배경인 것이다.
이때 축자영감설이란 정경의 환원 불가능한 절대진리성 주장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과 순간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라는 두 공간 사이의 상호 불가침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두 왕국론’Zwei-Reiche-Lehre이 전제되어 있다. 정교분리 그리스도교 담론에서 문명 비판성은 핵심적 전통에 속한다. 이것은 강력한 사회적 개입의 에토스를 낳는다. 하지만 정교분리란 신앙 담론에서 이러한 요소를 소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명에 대한 비판적 특성은 반개입주의/탈속주의적 윤리와 결합되었고, 반면 테크놀리지의 문제는 기능적 차원으로만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교회는 근대적 지식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근대적 기술을 활용하는 데에서는 거의 무비판적이며 기능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의 원리는 논리적으로, 교회와 국가라는 제도적 실재가 각각 이 두 공간과 대응한다는 관점에서 도출되는, 일종의 ‘의미의 분업체계’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앙은 세상과 분리된 종교적 상징 행위를 통한 삶의 성찰 방식을 가리키게 되며, 따라서 세상을 향한 개입의 필연성은 부차적인 것 혹은 신앙 외재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어떤 외적인/맥락적인 것에 의해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 진리주장으로서의 성서의 말씀은 신앙 형성의 절대적 준거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탈이데올로기적인 신학적/신앙적 주장은 동시에 현존하는 국가나 체제의 정당성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요컨대 근대사회에서 반근대적 가치로 구성된 담론공동체로서 교회는 존립하고 있지만, 또한 역사적으로 교회는 거의 언제나 보수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선택해 왔던 것이다. 나아가 교회는 때로 훨씬 급진적인 역사적 개입을 실행해 왔는데, 가령, 근본주의적 신앙에 따라 교회는 경계의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장소로서, 급진적인 보수주의를 전투적으로 대변하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축자영감설과 같은 조야한 성서해석학은 새로운 성서 해석 주체인 설교자와 대중간의 상호관계의 ‘부정적’ 측면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적 문명의 질주 속에서 존재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 대중은 절대적 가치의 잠재적 소비자가 되었고, 교회는 진공 포장된 절대성이라는 페스트푸드적인 종교 상품들을 개발함으로써 대중을 그리스도교의 영향권 속으로 포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의 축자영감적 해석학은 교회 엘리트와 대중을 연결하는 공유된 가치로서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의 정경화는 범위에서 뿐 아니라 표현 양식에 있어서도 완성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정경화라는 제도 형성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리스도교(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맺음의 특수한 양상을 추론해보려 하였다. 그것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 단계가 대중적 사회종교운동에서 비롯된 예수운동이 대중을 ‘탈주체화’시키는 종교로 전화되는 과정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대중을 ‘재주체화’하는 과정이다. 이때 대중은 근대적인 존재 상실의 위기감을, 한편으로는 역사에서 이탈함으로써 극복하는 전략을 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대상에 대한 ‘분노’와 ‘비관용’을 행위화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넘어선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행위 전략의 바탕에는 절대화된 이항 대립적 인식론이 있다.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경험의 다양한 차이들이 무시되고, 획일화되고 균질화된 보편성이 주장되며, 정경은 그러한 보편적 진리성을 보증하는 종교적 의미 형성의 장치라는 점에서, 일종의 성서를 읽는 해석학적 준거 역할을 한다. 텍스트 읽기의 방법으로 최근 ‘정경비평방법’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을 펴는 논자들조차 성서 내의 핵심적 사상을 중심으로 전체 성서가 구성되었다는 이른바 ‘성서 속의 성서’론을 옹호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한때 학계에서도 맹렬하게 불어닥친 이른바 ‘구원사학파’처럼, 성서 전체를 수렴하게 하는 중심적 관점의 존재에 대한 확신은 교회의 ‘성서 읽기’관을 관통하고 있다. 요컨대 교회에서 정경에 대한 확신과 중심 사상에 대한 확신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서를 정경적 텍스트로 읽는다는 것은 대립항의 저편, 즉 ‘타자’에 대한 배타주의를 신념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앙적 신념은 타자를 향한 구원 담론으로 이어진다. 선교라는 개념은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신앙적 실천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미개 문명의 개화라는 기치를 내걸은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와 구조적 등가물을 이룬다. 요컨대 (집합적 주체로서의) 그리스도교건 (개별적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이건 그 정복주의적 담론은 끊임없이 식민화할 영토를 존재의 안팎을 오가며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신앙에서 식민주의를 해체하고자 한다면, 성서의 탈정경적 읽기가 요청된다.


3 탈정경적 성서 읽기의 모색
― 삶의 성찰의 유의미한 개입으로서의 성서 이해를 위하여

성서 읽기에서 정경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정경의 범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정경 범위가 확정된 이래 이것은 대체로 정통 그리스도 교회로부터 이단시된 신비주의적 소종파 집단들에게서 흔히 나타났던 현상으로, 가령, 말일성도교회가 ‘몰몬경’을 정경적 텍스트로 채택한 것이 그 한 실례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기 종파만의 계시의 책을 첨가한 것은 변형된 형태의 정경주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들을 정경주의의 극복 모색의 흔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주류 그리스도교에서는 아직까지 정경의 범위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바꿀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범위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것은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는 연구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작업이다. 대중매체의 대대적인 관심 아래 진행된 이 과제집단의 첫 번째 기획출간물인 ?다섯 권의 복음서들? 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New York: Macmillian Publishing Company, 1993).
은 정경에 포함된 네 권의 복음서 외에, 최근 예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토마복음서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세미나를 사실상 이끌고 있는 로버트 펑크Robert Funk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여 신약성서를 다시 만들 것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Robert W. Funk, ?예수에게 솔직히.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한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여기서 그는 주로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들 가운데서 학문적으로 유의미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들을 다수 포함한 새로운 정경을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가 교회 중심주의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종교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학계와 (교회를 매개하지 않는) 대중사회에서 예수 세미나와 펑크의 위치를 감안할 때, 이러한 시도는 문제제기로서 적지 않은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일찍이 성서를 ‘고전’의 하나로 읽음으로써, 훨씬 급진적으로 정경의 범위 논의에 개입한 바 있다. 안병무, ?역사와 해석?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제1장 참조.
이것은 정경의 범위를 확장하는 완곡한 문제제기를 훨씬 뛰어넘는 가히 도발적인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정경의 범위를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월장하여 문화 전반의 영역으로까지 무한히 확장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더 나아가 안병무를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이 공히 전태일 담론을 신앙적 준거 텍스트로 삼음으로써, 정경 논의의 진일보를 이룩하였다. 박성준,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 1970년대를 중심으로? (일본 립교 대학의 1996년 박사학위 논문; 다산글방, 근간) 참조.
한국의 돌진적 근대화rush-to modernization의 파행성으로 인한 대중의 고통과 해방의 염원이 담긴 텍스트로서 전태일의 담론적 효과는 분명 정경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서남동은 김지하의 ?장일담?과 성서를 상호텍스트적으로 읽음으로써, 그의 성서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두 이야기의 합류’론이 나오고, ‘민담의 신학’, 나아가 ‘탈신학’론이 도출된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참조. 또한 안병무도 ‘민중의 눈으로’라는 성서 읽기의 준거를 제시함으로써, 정경성 해체 논의에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이 ‘오늘 여기’의 역사성 문제를 ‘컨텍스트’로 취급하여 정경성 문제를 우회한 데 반해, 민중신학은 이러한 물음을 텍스트-컨텍스트 논의로 접근하기보다는 또 하나의 준거적 텍스트로 수용함으로써, 정경성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민중신학의 접근은 탈신학/신앙화 프로그램의 두드러진 일면을 보여준다.
정경주의에 도전하는 두 번째 방식은, 성서 표현 양식을 고정화함으로써 의미의 고정화가 이룩된다고 믿는 정경주의적 망상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 고정화는 실상 정경적 텍스트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그 ‘하나의 본질’은 정경주의의 해석학적 준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성서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전제는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임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정경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보편적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기반해서 주장되었던 일체의 식민주의적 폭력성은 신앙적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요컨대 정경주의를 공공연히 문제제기하지는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최근 일각에서는 (특히 구약성서 연구의 경우) ‘정경적 비평학’canonical criticism이 폭넓은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권위authenticity 문제에 대한 논쟁의 주된 기조는 하나의 중심적 진리가 사라진 토대 위에서 성서의 권위를 재구축할 대안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즉 이들 논자들은 의미의 탈구축 자체를 권위를 훼손하는 요소로만 가정하고 있다. 정경적 비평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텍스트 비평에 전면화한 해석 방식이다. 이에 대한 고전적 텍스트인 B.S. Childs, Biblical Theology in Crisis (Philadelphia, 1970) 참조.
근대 성서학은 이미 경전주의의 해체라는 무덤돌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는 셈이다.
나는 여기서 정경주의의 해체를 본격화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방법론은 성서 비평학에서 이항 대립하는 두 차원으로 분리되어 다루어져 왔던 것을 서로 연계된 상호의존의 과정으로 재설정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두 차원이란 ‘역사비평학적 연구’와 ‘신학적 해석’을 가리킨다. 여기서 전자는 독서자라는 ‘가치중립적 존재’가 텍스트를 역사적이고 비평적으로 다룬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고, 후자는 독서자와 세계 그리고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문제시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은 의미 형성의 순차적 과정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므로 후자의 관계는 ‘텍스트⇒독서자⇒세계’라는 의미 확산의 경로를 이야기하는 셈이 된다. 요컨대 후자의 표현에 담긴 ‘해석’이라는 말은 대화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이고 계서적이다. 반면 나는 이 두 차원을 성서 텍스트의 ‘표현 양식에 주목하는 것’과 텍스트에 대한 ‘독서 양식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재설정함으로써 양자는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특히 그 관계를 쌍방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통한 의미 형성이 ‘대화적 구조’를 갖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할 것은 성서의 표현 양식 속에는 다양한 사회문화적인 차이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는 역사적 층위가 상이한 원텍스트들의 퇴적층을 담고 있다. 상이한 시기는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맥락을 전제한다. 또한 성서에 포함된 여러 텍스트들은 장르상으로나 저술가적 관점으로나 천양의 차이를 갖고 있다. 가령 시적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역사서술적 텍스트가 있고, 또 예언적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지혜적 텍스트가 있다. 은유가 표현 방식의 중심을 이루는 것과 설득적 설명이 주를 이루는 것, 그리고 공적이고 역사철학적 기술과 사적이고 도덕철학적 기술 사이에는 상이한 의미화 전략이 들어 있다. 또 예언자와 사제 그리고 정치가의 언술들이나, 지배당파와 도전당파의 수사는 표현 양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밖에도 등장인물의 성별도 표현 양식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또 그 텍스트들의 공간적 배경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텍스트에 감추어진 사회문화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것을 요청한다. 가령 사무엘기 텍스트에서 사울과 다윗에 관한 표현에서, 다윗은 약탈자로서 활동하기도 하고 야훼 제의를 임의대로 주관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그의 지도력에 문제로서 비판되지 않았다. 반면 사울은 바로 그것이 그의 실패의 결정적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기술에서 해석의 어떤 중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우리는 텍스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동시대 인물인 두 사람간의 사회문화적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군주제적 기조의 지파동맹 사회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파(베냐민 지파)의 일원인 사울과 소외된 변방 지파(유다 지파) 출신 다윗 사이의 차이가 그 한 이유일 수 있다. 또 그 사회를 대표할만한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지파동맹의 지도자로 추대된 인물 사울과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으로 무뢰배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주먹파 보수’ 다윗이라는 사회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이런 공시적 차이만이 아니라, 통시적 관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두 인물의 활동 시기가 지파동맹 해체기였다면, 이 텍스트의 초기 형태가 문서화된 시기는 군주국 초기였다. 그런데 이 나라는 다윗 가문에 의해 통치되던 나라다. 그러니 역사적 정보를 해석할 때 두 인물에게 이중잣대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상의 사회문화적 차이는 두 인물에 대한 텍스트의 표현 방식의 차이를 노정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 이것은 기어츠C. Geertz나 단턴R. Darnton 류의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 방법에 의거한 역사적 분석에 속한다. C.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ts (New York: Basic Books, 1987); R. Darton, 조한욱 옮김, ?고양이 대학살. 프라으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문학과 지성사, 1996).
이러한 방법은 끊임없이 텍스트에 함축된 상이한 사회문화적 차이들을 찾아냄으로써 텍스트의 의미구조를 읽어내는 데 유용하다. 여기서 역사가로서의 텍스트 해석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의 관점을 찾아냄으로써 언제나 창조적으로 텍스트 읽기에 개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의미화는 결코 종결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계속된 텍스트에 대한 차이의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들에 대한 문제의식은 독서 양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독서가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과 접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상이한 문제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와, 사라의 몸종이자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에 관한 창세기(16,1~16; 21,9~21)의 텍스트를 보자. 이 이야기에는 사라와 하갈의 운명이 새옹지마塞翁之馬식으로 역전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운명의 계기는 남자(아브라함)가 어느 편을 들어주느냐와 남자아이를 누가 낳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즉 텍스트 속에는 배제주의적 성의 문제가 일관된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남자인 아브라함의 모습은 중립적인데 반해, 두 여자는 투기하는 부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 또한 성적 편견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함축한다. 또한 여기에는 주인인 사라와 종인 하갈, 이스라엘 여자 사라와 에집트 여자 하갈, 이스라엘의 조상(大母)이 된 사라와 광야의 야만적인 부랑자 족속의 조상 하갈이 대립되고 있다.
만약 독서자가 성별의 문제에 초점을 두면서 세계와의 접속을 모색하고 있다면, 이 텍스트를 그는 성적 배제주의의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다. 또 그가 지방색에 주목한다면, 하갈과 사라의 텍스트 이면에 깔린 종족간 갈등을 유념하면서 이 텍스트에서 의미를 구성하려 할 것이다. 반면, 그가 계급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다면, 주인과 종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더 천착하면서 텍스트를 읽으려 했을 수 있다.
이러한 읽기의 가능성은 독서 양식이 텍스트의 표현 양식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해석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는 정경주의를 해체하고, 단 하나의 보편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계와 연계된 자신의 신앙적 성찰을 위한 성서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한다. 이 경우 우리가 성서의 권위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면, 그 권위의 근거는 이러한 삶의 성찰에 개입하고 있는 성서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다성多聲적 텍스트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성적 세계인 우리의 생활 공간과 연계된 의미를 성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성서는 삶의 성찰을 위해 신앙적 이해의 가능성으로 우리와 마주할 수 있다. 그런데 정경으로서의 성서는 그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정경으로서의 성서는 교회 중심주의와 결탁되어 있다. 여기에 교회로 실존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게 되며, 탈정경적 성서 읽기는 ‘교회를 넘어 예수에게로!’라는 구호를 내지르고 있다. ?
2002-11-21 10: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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