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구약성서연구 새소식 및 공지사항 게시판

제목
  [신간소개] 김은규, 하느님 새로보기-종교간 대화를 위한 구약성서 다시읽기
이름
   박경철
홈페이지
  
첨부화일


차례

신간 도서 소개



책 소개


구약학자가 구약학을 비판하고 기독교를 자성하는 차원에서 쓴 신앙고백서


기독교신학에서 가장 보수적이라 할 성서신학, 그중에서도 구약신학을 전공한 학자가 이제까지의 일방적인 한국 개신교의 하느님을 새로 보자고 한다. 보수적인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구약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인지에 대해 구약신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문제를 제기한다.

기독교는 초기 시대에 박해 받은 일 빼고는 4세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래 현재까지 세속권력과 교리로 튼튼한 방어벽을 치고 권력의 편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는 악영향도 많이 끼쳤다. 이교도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 재산 몰수, 강제 추방, 화형, 마녀사냥, 종교재판, 식민지 영토 확장, 대학살, 전쟁 등으로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기독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행하게도 언제나 그 전면에 하느님과 예수를 가해자로 내세웠다. 곧 인간의 끝없는 권력과 탐욕의 성취를 신을 앞세워 자행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이교도들에게 십자가는 약탈과 폭력과 전쟁이라는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과 예수도 인간의 권력에 선의의 피해자다.

사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그렇게 절대권력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지리적 위치가 강대국가들에 둘러싸여 휘둘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느님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약한 분이었다. 예수도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인간들에게 매 맞고, 채찍 맞고, 창에 찔려 돌아가신 분이었다. 그래서 성서 안에 비추어진 이들의 모습과 성서 밖에서 세속권력, 교회권력 그리고 교리로 새로 무장한 하느님과 예수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느님 새로 보기 : 종교 간 대화를 위한 구약성서 다시 읽기’는 하느님을 보다 넓은 시야로, 교리에 갇히지 않은 시야로 보자는 것이며, ‘구약은 곧 배타적’이라는 등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하느님과 다른 종교들의 관계는 창과 방패의 관계이며, 물과 기름의 관계이다.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관계로, 지난 2천 년 넘게 그렇게 상극(相剋)으로 물고 물리는, 때로 죽이고 죽는 관계였다. 이 책은 세계사 속에서 성서의 어떤 요인들이 그 같은 잘못된 일들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단 두 명제가 종교들이 서로 섞이거나 대등하게 바라보며 만날 수 없게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십계명의 제1계명인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과 “우상숭배 금지 내지는 철폐”. 이 두 말에다가 “예수 구원”을 교묘히 이용했고, 성서를 ‘일점일획도 바꾸지 못한다’고 선언한 ‘정경’의 권위로 지배권력의 위치에서 배타적인 태도로 지난 2천 년 동안을 군림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부정적 역사의 흐름과 성서를 이용해 온 교회권력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성서학 연구가 성서 안에만 머무른다면, 계속해서 지배 이념을 양산하는 데 일조할 것이기에, 가장 보수적이라는 구약학을 하는 학자가 자기성찰적 비판으로 그 대안을 제시한다.

21세기 대화문명의 시대에 종교 간 대화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었는데, 구약성서는 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이 되고 있다. 저자는 지난 수년 동안 이와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과 논리를 만들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은 한 구약학자가 이 시대 새로운 한국 기독교를 위해 던지는 뼈아픈 자기반성적 고언이자 신앙고백이다.



지은이 소개


이 책의 지은이 김은규 신부(성공회)는 연세대학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구약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머리말에서도 밝히듯이, 필자가 구약을 전공하게 된 것은 부친인 김찬국 교수(전 연세대 구약학 교수, 전 상지대 총장)의 영향이 컸다. 지금 부친은 연로하고 안타깝게도 수년째 치매로 고생하고 계신다. 다행히 김 교수의 어머니께서 뜨거운 애정으로 돌봐 주시고 모든 형제가 손수 집에서 봉양하여 불편함 없이 지내신다. 이제 연로하신 아버님께 늦기 전에 그 간의 구약신학자로서 생각을 정리하여 저서를 헌정하는 것이 아버지의 길을 따른 아들의 도리라는 마음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책을 내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고, 용기도 필요했다고 한다. 근본주의에 가까운 한국 기독교의 풍토에서 ‘종교 간 대화’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교리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단적 행위로 취급받기 때문에 반발과 역풍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나도 (변선환 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나 여타 많은 진보적인 신학자처럼) 강단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랄까, 쫓겨나면 택시운전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예까지 오게 되었다”고 심경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새롭게 성숙하고 발전하려면, 종교 간 대화는 절대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본서를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한국구약학회와 종교학회, 문화신학회, 기독교교육학회 회원이며,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구약 오경 이야기』(토마스 W. 만, 맑은울림, 2004),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 (스티븐 헤이네스, 기독교서회, 1997),  『구약입문』 (안토니 R. 세레스코, 바오로딸, 2008) 등이 있다.



책 구성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앞부분 ‘책을 내며’, ‘글을 시작하며’와 뒷부분 ‘글을 맺으며’는 출간의 의미와 조금은 전문적이고, 학술적 논문으로 된 1~3부의 내용에 대한 해제이자 전체 글의 자리매김에 해당된다. 종교 간 대화의 당위성과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편향성이나 몰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한국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포용적인 자세와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제안이 들어 있다.

1부는 종교 간 대화의 걸림돌로서 작용해 온 구약성서의 해석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배타적인 구약성서의 근본적인 토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구약성서의 본문(text)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단어나 구절, 문단, 이야기들에도 그 배경들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성서를 문자적으로 보게 되어, 절대화시키기 쉽다. 그래서 필자는 구약해석에 대한 준거틀이랄까, 나름대로 그 구체적인 해석 방법론 몇 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전통적인 성서 해석 방법론을 약술하고 이에 대해 새로운 영성적 해석 방법론을 제안한다. 역사 비평 방법이 주로 “통시적”(diachronic)인 기술로 역사적인 순서에 따르면서 해석하는 방법이라면, 신문학 비평은 역사의 순서보다는 횡적인 이야기의 내용들을 분석하는 “공시적”(synchronic)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학 비평은 역사 비평의 한계점으로 지적되는 본문의 저자, 의도, 편집에서 탈피한다. 그래서 영성 해석 방법론으로 이 두 가지를 종합하여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으로 성서에 접근했다. 그리고 ‘영성’의 범주가 한 개인의 실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 문화, 예술, 사회정의, 생태, 환경, 복지, 종교 간 대화, 인권, 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킬 수 있으며, 종교들 간에 사회적 연대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2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두 신관(세계관)을 소개한다. 즉 엘로힘 신과 야웨 신이다. 야웨 신은 인간에게 명령하고,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의 의도를 전하고, 인간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징벌을 내릴 때 등장한다. 이에 반해 엘로힘은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신으로서 “신들 중의 신”, “인간들 중의 신”인 엘(El)답게 최고로서 당당한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엘로힘은 우주와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는 근원적인 분(창세기 1장), 노아 홍수 이후에 새 창조를 이루는 분(창세기 9장),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생명의 근본적인 것을 이루게 하는 분의 역할을 주로 한다.

야웨가 인간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사회와 역사 곳곳에 파고 들어오는 분이지만, 동시에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다른 종교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엘로힘은 우주적이고 생명의 근원자답게 모든 인간과 종교들에 대해서 보다 포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다. 야웨는 이스라엘 왕조가 진행되면서 이스라엘 내부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 기여를 하지만, 이미 극단적인 배타적 태도로 말미암아 이웃 국가와 종교들로부터 역으로 배척되는 현상을 보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후대 성서 사가에게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포로기 상황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큰 틀을 제시하는 엘로힘의 모습을 야웨와 구별시켜 부각시킴으로써 주변 국가들의 종교를 뛰어넘는 포용성을 가지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해 구약의 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신도 시대적 요청에 따라 변모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근원인 구약성서에서 보면,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배타성은 시대적 산물이다. 다만 후대에 와서 그 신을 내세워 세계정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데 불과하다는 것이 구약성서를 통해 실증적으로 제시하는 성서적 진실이다.

3부는 성서의 정경 문제를 다룬다. 정경이란 본문이 전승되어 갈 때, 어느 시점에서 종결(closure)을 선언하고, 더 이상 본문에 가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다른 본문들이 들어올 수 없게 차단한다. 이런 정경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성서에 전혀 오류가 없다는 성서무오설을 신봉하게 되고, 교회권력과 함께 상대 종교인들에게 공격적이 되고 파괴력까지도 보일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에도 불행히도 성경이 정경으로 선포된 순간 일체의 사상과 철학, 문화, 역사의 수용이 거절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그 생동감과 유연함을 상실하고 오직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라는 지배적 위치에서 해석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성서의 정경이 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약의 역할보다는 독으로서 세계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성직 계급은 참다운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찾기보다는, 폐쇄적인 교리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힘으로 백성들을 박해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정경화’는 본문들이 계속해서 전승되어 가면서, 거듭하여 재작업되고, 재해석되고, 삭제되거나, 새로운 본문들이 추가되는 연속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이 정경화 과정을 통해 기독교의 정체성이나 배타성의 문제를 비추어 보면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지향점이 생겨난다. 앞으로 한국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정경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정경으로 묵어놓은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의 족쇄는 이제 벗겨야 한다. 성서는 새롭게 각색되고 쓰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보편타당한 그리고 사회적, 공동체적 신뢰감이 있는 집단들이 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 그 작업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단순히 교단과 교리의 권력에 갇혀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재구성하는 것은 또 다른 지배와 통제를 만드는 것이며 사회적, 종교적 죄라고 본다. 지난 1700여 년간 보여준 그리스도교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경화 작업으로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구적 제국, 생태환경의 위기, 국가 간 경제적 격차 심화, 여성 차별, 종교 갈등, 한반도 분단과 통일 등의 지구촌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유연성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교 내부에 고질적으로 묶여 있는 과제들을 풀어갈 역동성과 활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차례


책을 내며

글을 시작하며


1부 구약성서와 종교 간 해석 방법론


1. 그리스도교 역사의 인식과 관점

2. 현대 세계의 상황 인식

3. 종교간 대화의 걸림돌 : ‘우상숭배 금지’의 극복

4. 역사비평 방법을 넘어

5. 종교들 안에서 종교의 해석

6. 성서 비평방법과 ‘영성적’ 해석

7. 지구적 제국의 상황에서 성서해석


2부 구약성서의 하느님 새로 보기

1. 우상숭배 금지의 족쇄 풀기

2. ‘야웨’와 ‘엘로힘’의 종교 간 대화 - 구약의 오경과 예언서를 중심으로

3. 야훼의 배우자이자 민중종교로서 ‘아세라’(Asherah) 여신(女神)


3부 구약성서와 종교 간 대화


1. 그리스도교의 정경(正經) 선언은 약이었는가, 독이었는가?

   - 지배적 그리스도교와 민중 유대교의 비교

2. 창세기 1장의 생명과 생태사상 : 노장사상과 불교적 이해

3. 구약의 ‘고통’에 대한 불교적 해석


글을 맺으며

참고문헌

책 속으로


우리는 인류문명사에서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21세기, 새천년이 시작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 현재에도 고대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종교와 사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21세기 문명을 흔히 해체주의, 포스트모던 시대, 탈권위 시대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근대문명이 보여주었던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그리고 봉건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문명의 전환점에 서있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를 누리고 있으며, 사상적 제약과 교리적 굴레에 갖혀 나오지 않고 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기득권을 누릴 때,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오히려 교리에 훼손을 받을까 폐쇄적인 자세를 더욱 두텁게 하는 경향이다.

처음에 종교들은 자연과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문제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화되고, 고정되고, 교리화되고, 절대화되면서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역기능을 보였다. 그래서 제 종교들은 자기 틀 속에 갇히게 되었고,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속성과 갈등을 보이면서 자기 확대를 이루어왔다. 물론 각 종교의 경전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용서와 관용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자기 종교의 범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를 넘어서기란 사실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각 종교의 학문 영역에서도 같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근, 현대사를 보면 유럽 국가들이 그리스도교를 앞세워 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백성의 정신과 문화를 빼앗는데 앞장서 왔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성경과 제국주의’를 앞세워 지난 1천오백 여년 넘도록 토착문화와 토착종교를 무시하고 말살하면서 ‘선교’를 했다. 그래서 서양의 제국주의를 확대시키고 서양 문화의 우월성을 심는데, 그리스도교를 앞세웠다.

1960년대 이후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반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리스도교는 서양문화와 과학의 우월성을 무기로 불교와 토착문화와 종교, 사상 등에 대해서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는 서양의 보수적인 선교사와 그 영향을 받은 교회가 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종교 간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갈등이 잠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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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정복과 박해를 받던 국가이고, 구약의 신도 이런 박해받는 민족의 고통을 싸매주고 결속하게 하는 ‘방패의 종교’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처음에 박해를 받으며 숨어 지내던 방어적인 처지에서, 합법화 이후 공격적인 종교로 변모한 이래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항상 세계사의 정치, 군사 권력의 중심에 있어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학 역시 창의 논리로 나갔을 수도 그리고 나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원래의 본문이 방어적 상황이었을 때 쓰여졌는데, 공격적 혹은 지배적 상황으로 바뀌었을 때, 그 본문의 쓰임새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신神 개념도 주변 강대국가들의 많은 신들 속에서 약소국가의 신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신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강대국가의 신이 되었을 때의 논리로 적용시키면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약소국가였을 때 신의 역할과 속성은 잊혀지고, 강대국가의 세계지배 논리로 일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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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쉼 없이 달려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제의 강점기, 한국전쟁, 4.19 혁명, 유신시대, 광주민주화운동,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의 숱한 민족적 고난과 아픔을 겪으며 이겨내 왔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지만, 거꾸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교회가 사회와 등 돌려 외면하고 자기 확장에만 치우쳤기 때문이다. 진보신학자들과 일부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를 대변하고 사회정의를 외친 것 외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회에 대하여 귀와 입을 다문 채 듣지도 않았고,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령 충만’,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병고치고, 구원받고, 천당 가고, …’하는 개인의 이기심에 편승한 신앙에 충실(?)했다고 본다. 한국종교사에서 불교도, 유교도 모두 과거에 호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흘러가고 있는데도, 한국의 신학은 교회 성장을 위해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기차를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기독교학회와 각 분야의 학회들조차도 애써 외면하거나 호교론적인 주제들로 채우고 있다. 한국의 신학과 신학대학은 한국 교회들이 궤도를 이탈해가도록 장단을 맞추거나, 아니면 교단의 권력과 돈에 무기력하게 눌려 무관심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와 교단의 권력은 이미 중세시대를 방불케 하고, 자기반성은 고작 수십 년간 ‘회개’라는 입 서비스로만 하는데 익숙해져서 신뢰감을 상실한지 오래다. 한 교단 안에도 수 십 개의 파들이 서로가 남남으로 나누어져있고,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다. 많은 신학대학원들이 경영 유지를 넘어서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목회후보자 학생 수를 늘리는데 급급하고, 대형 강의실에서 대량생산으로 찍어내는 붕어빵식 교육을 하는 현실이다. 이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성교육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교회 수는 제한되어 있는데, 목회자가 과잉 배출되다보니, 적자생존의 치열하고도 비굴한 경쟁이 된 지 오래이다. 한국의 신학교육도, 교회현장도 보수화되면서 점차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교리적으로만 보니까, 역사 속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이 사회의 눈총으로 주춤하는 사이에, 이런 일들이 중, 소 교회에서는 흔한 사례가 되어 가고 있다. 교회를 개인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목회자)는 평신도들에게 다양한 사상과 비판적 사고를 차단한 채 교회에 우둔하게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내몰고 있다. 일부 교단은 권력 자리를 놓고 치열한 비방과 금품이 살포되고 비상식적인 선거들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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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성서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성서해석의 목적은 본문의 본래 의미를 찾고자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역사적 상황들과 본문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구약의 역사, 정치, 종교, 사상, 법, 의식, 신화, 이야기, 지혜와 시 등에 대한 상황과 본문의 의미를 밝혀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성서를 ‘정경’(canon)이라는 권위 속에 가두고 절대화시켜서 성서의 내용들을 과거로만 제한시켰기에, 그 이후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절대성만을 주장하다 보니까,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관의 변화들에 계속해서 맞지 않아 왔다고 본다. 마치 현대인이 고대 유럽의 게르만의 옷을 입고 다니거나, 중세시대의 철갑옷을 입거나, 근세 시대의 옷들을 입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오늘 고조선 시대의 옷과 머리 모양을 하고 그 시대의 가치로 살아간다면, 모두가 갸우뚱하지 않을까? 그 시대 종교의 사고와 가치관을 절대화시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끼워 맞추어야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들이 있으며, 인간 본성 역시 고대 시대나 현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맞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기에 맞는 이념과 가치관, 문화적, 종교적 수준들은 시대 시대마다 요구되는데, 절대로 고칠 수 없다는 정경 선언으로 성서와 교회의 권위를 세워왔던 것이다. 성서는 문자로만 제한받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성서가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이 함께 작용했을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인으로 몰아 옭아매고, 위협과 강요와 폭력과 교수형과 전쟁으로까지 확대하는 모습들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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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학자가 로마제국~중세시대~근세~현대에 이르는 세계사의 흐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면,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문자와 언어와 사상과 신앙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성서를 가두어 놓는 것이 유리했던 교회권력과 교리체계는 세속권력의 힘에 협력하면서 끊임없이 지배 논리로 펼쳐갈 것이며, 성서학자가 여기에 일조하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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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무엇인가?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성서는 제국들의 군사적, 정치적, 종교적 공격에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방패의 시대에 만들어진, 힘없는 이스라엘 민족, 민중들에게 신앙적 구심점을 주는 역할을 하였으나, 창의 시대로 바뀐 이후부터는 토착종교, 유대교를 비롯한 이슬람 종교를 공격하고 탄압하는 종교가 되었고, 주변 국가들뿐만 아니라 지구 남쪽 세 대륙들을 정복하고 약탈하면서 그들의 전통 토착 문화를 경멸하고 없애는 상징이 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한 구원자이지만, 이슬람과 유대교 그 외 토착종교들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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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아시아 기독교인으로서 갖는 정체성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으로부터 새롭게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시아인이 수 천 년 동안 가져온 다양한 역사, 전통, 종교, 문화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스스로 가질 때, 새로운 대안적 기독교의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기독교는 지배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아시아의 상황을 이해하고 아시아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지 않으면, 유럽교회와 신학이 과거에 경험했던 전철을 똑같이 되풀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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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학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신명기적 사고(유일신 신관, 우상숭배 금지, 권선징악)에 갇힌 낡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동양사상, 동양의 종교들과 마음껏 교류하고 사상적인 공감대를 이루면서 상생의 태도를 갖고 21세기 새천년에 부응하는 새로운 책임과 도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문명사의 전환점에 있는 시기에, 특별히 종교 간 갈등과 충돌이 심해가는 시기에,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어떤 위상과 방향을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인가에 더더욱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서 시대의 과거지사를 이 잡듯이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본문이 현재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며, 그 족쇄를 풀어줄 새로운 해석과 방법론과 지혜가 더욱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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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제국들 사이에서 생존해야하는 조그만 약소국가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탓에 곤경과 고난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 본문도 당시의 주변 제국은 물론, 중세사, 현대사라는 넓은(macro) 시각을 가지면서 보아야 하고, 성서 안의 매우 작은 단어 하나, 한 구절 한 구절 속에서 제국이라는 상황 속에 함축된 약소민족의 고난의 여정들을 헤아려 나가야 할 것이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처음에 박해를 받으며 숨어 지내던 방어적인 처지에서, 합법화 이후 공격적인 종교로 변모한 이래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항상 세계사의 정치, 군사 권력의 중심에 있어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학 역시 창의 논리로 나갔을 수도 그리고 나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원래의 본문이 방어적 상황이었을 때 쓰여졌는데, 공격적 혹은 지배적 상황으로 바뀌었을 때, 그 본문의 쓰임새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신神 개념도 주변 강대국가들의 많은 신들 속에서 약소국가의 신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신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강대국가의 신이 되었을 때의 논리로 적용시키면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약소국가였을 때 신의 역할과 속성은 잊혀지고, 강대국가의 세계지배 논리로 일관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 성서학은 역사의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대 이스라엘이 제국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의 지배를 반대하는 예언자들의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권력과 손을 잡은 이후의 유럽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럽 신학자들의 신학은 이를 염두에 두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구원을 명분으로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지배이념 논리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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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는 유일신, 우상숭배 금지라는 두 개의 축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야웨 종교가 성장하기까지 이미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의 종교들을 수용하는 과정이 있었으며, 이 두 개의 기조는 신명기 문서가 발견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맞물려 있으며, 바빌론 제국으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제국의 상황에서 약소국가가 취할 수 있는 일은, 군사력 강화도 중요하지만, 정신력 곧 종교적 구심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구약의 율법, 이야기, 역사, 예언의 내용을 신명기적 관심으로 집중시켜 방패의 구심력을 만들어 제국들의 간섭과 위협을 방어했다고 본다.

신명기적 사고의 뿌리를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승인을 받은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지역 종교가 아니라, 제국을 옹호하는 창의 종교로 역전한다. 로마제국의 확장과 근세 유럽의 식민지 확장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역시 이 확장사업에 적극 개입하여 약 천 오백여 년 동안 위세를 떨치는 종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이웃 종교들에 대해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된 주요인이 바로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의 종교관에 있다. 그리스도교가 십자군 전쟁과 유럽 제국주의 팽창을 어떻게, 얼마나 정당화시켰고 기여했는지가 역사학, 교회사에서 밝혀지고 있다. 신명기적 사고가 본래는 이스라엘 자체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했지만, 그리스도교가 국가권력과 함께 확장된 이후 타민족, 타종교를 억압하는 지배이념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평화를 해치는 창의 종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읽는다고 모든 인생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과 신념은 착각이며, 단순하고 경직된 신명기적 사고와 가치관을 오늘에도 비판 없이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대폭 축소시키고, 다양한 종교들과 사상들과 만날 수 있도록 개방성을 갖는 새로운 해석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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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정경 선언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넓혀주었는가? 반대로 제한했는가?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는 초기 시대에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다가, 4세기에 국가종교로 합법화된 후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서양 제국들의 편에서 그리스도교 역사를 걸어왔다. 서유럽의 신학이 적극적으로든 혹은 잠재적으로든 그리스도교 제국들을 위한 논리를 정당화시키고, 종교권력을 강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대급부로 정경은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교가 지배 이념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주도권을 갖은 이상,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우상숭배 철폐’와 같은 내용은 로마제국의 확장과 유럽 식민지 확장 이념과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성서는 다른 신념이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서는 안되었고, 그러할 필요성도 갖지 않았다. 이때 정경이 성서를 보호하는 훌륭한 방패막이를 하고,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유럽 내의 유대교, 이슬람 등 다른 종교, 토착 문화들을 무너뜨리고 없애는 첨병의 이념적 역할을 한 것은 이미 밝혀진 내용이다. 유대교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기, 기원전 2세기 때 마카비 혁명, 기원후 1, 2세기에 연이은 유대전쟁과 바르 코흐바 전쟁을 통해 로마제국에 저항을 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유대인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통제를 받았고, 4세기 그리스도교가 승리한 이후에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차별과 소외를 받았고, 그후 이슬람으로부터, 십자군 전쟁, 15세기 스페인에서 추방과 학살, 18세기 동유럽에서 학살,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스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을 경험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히브리 시대부터 중세, 근세, 2차 대전까지 인종적, 종교적, 사회적 약자로서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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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교의 특징을 이루는 중심에 ‘정경’을 이루는 경전들이 있음을 본다. 정경의 역할이 두 종교를 어떻게 버티게 하였는가? 정경이 지배적 위치에 있을 때 어떤 모습을 띠었으며, 정경이 피지배적 위치에 있을 때 어떤 모습으로 갔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동안 정경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호의적으로 혹은 호교론적으로 많이 다루어져왔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유대교적 시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이러한 질문과 의문점들을 던지면서, ‘성경’와 ‘정경’은 그리스도교와 그 권위의 요체라고 보고, 이 주제를 그리스도교보다는 유대교 입장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내 종교만 아는 사람은 내 종교를 모른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본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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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리스도교가 정경이라는 차단막에 의존하도 안일하게(?)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을 향유하여왔기에, 고대의 사고틀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 본문은 변화하는 상황들 속에서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고 달라지는 새로운 해석들이 나올 때, 새로운 공동체에게 적합할 것이고, 그 전승이 유지될 수 있는 저력이 생긴다고 본다.

정경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성서무오설을 강조하게 되고, 교회권력과 함께 상대 종교인들에게 공격적이고 파괴력까지도 보일 수 있다. 곧 성서 중심주의가 아니라. 성서 권위의 해체를 통한 유연함과 개방적인 정신으로 새롭게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정경으로 선포된 순간, 일체의 사상과 철학, 문화, 역사의 수용이 거절되었으며, 그 생동감과 유연함은 끝났고, 오직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라는 지배적 위치에서 해석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도 이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고찰해야 할 것이다).

정경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로마제국의 세속권력과 결합한 이후에 교회권력이 지배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강한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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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나라 없이 흩어져 사는) 유대 민중들이 히브리 성서시대부터 중세 십자군 시대를 거치고, 근세, 현대까지 차별과 박해, 추방과 학살의 고통들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경전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지정학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각 시대에 맞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경전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민중 유대교의 내면적인 잠재력과 저력으로 고통의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곧 지성의 전통(intellectual tradition)을 열어두어 한편으로는 토라의 영성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사상을 열어두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경은 그리스도교식의 폐쇄된 문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개방된 지적 전통의 유산을 이어받아 현재의 삶을 이겨내도록 하는 계속해서 진화하는 경전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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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원자이지만, 십자군 시대에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학살과 전쟁의 상징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슬람의 지하드 역시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대 이스라엘이 과거 자기들의 억압받은 민중의 위치에서 이제는 억압자의 위치가 되어 팔레스틴의 아랍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세 종교가 없어지면, 지구상에 평화가 올까? 결국 ‘한분 하느님’이라는 공통분모로 올라가며, 이것은 하느님이 책임 질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위대한 창조를 보여주셨지만, 이 천 여년 동안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아들로 인해, 자신의 예언자로 인해 서로 싸움을 일으키게 한 하느님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을 자기편에 세워서 타민족, 타종교를 억압한 인간의 이기심이 더 근본이다.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정경으로 못 박은 경전들을 한 꺼풀씩 베껴냄으로써 절대적 권위를 한 단계씩 내려놓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사실은 종교권력, 세속권력이 경전들, 정경들을 포장하고, 자기들의 무한한 이기심을 채워온 것이 아닌가?

정경이 아무리 순수하고 진리로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회와 역사 속에서 실천해 내지 못하고, 거꾸로 진리의 이름으로 박해하고 억압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경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정경을 지키고 경전들을 읽고 보존하는 것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사후 세계를 보장하는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 세계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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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구화의 신자유주의 상황, 지구적 제국(the global empire), 생태-환경적 위기, 지구촌 남쪽의 경제적 곤란과 빈곤, 여성문제, 종교 간 갈등,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오늘의 상황에서, 정경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때로는 부분적으로, 때로는 크게 개작(revision)과 해석적 과정을 시도해 나가는 정경화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본문들간에 “상호-본문성”(intertextuality), “경전들 간에 상호성”(inter-scriptures)이라는 대화와 상호침투(intra-faith)의 밀도 있는 관계를 갖으며, 정경화 과정을 만들어 나갈 때, 정경 역시 퇴색되지 않고, 역동성과 활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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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은 종결짓는 것이다. 그 종결은 현재와 미래를 가로막는 차단벽이 되면서 배타성을 띠게 된다. 중국의 유교가 공자 이후 정경이 된 이후, 지배종교로 내려왔고, 조선시대 육백 년 동안 성리학 역시 정경에 갇혀 지배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강요하는 역할을 해왔던 동, 서양의 역사적 경험들을 볼 때, 이렇게 정경 자체에 종교권력이 덧씌워지고, 세속권력과 연동작용을 하게 되면, 정경은 강한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박해와 학살과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초강력 힘을 갖게 되는 것을 보았다. 물론 모든 갈등과 분쟁의 근원을 정경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그러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으며, 종교적인 언어와 내용이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누구를 대변해왔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예언자들의 사회정의 의식, 민중과 함께한 예수의 모습이 정경 안에 담겨있음에도,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성스런 노예가 되어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다른 사상들의 유입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정화하는 기능을 상실하였고, ‘예수’ 이미지는 로마제국 시대, 십자군 전쟁과 유럽의 식민지 정복 그리고 미국의 세계지배에서 정복과 약탈과 죽임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반면 민중 유대교는 사상과 문화의 유입을 경전에 수용하면서, 그들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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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의 결론을 쓰는 시점에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건만, 교회권력은 신과 신의 아들 이름을 빌려서 얼마나 장난질하고, 명예를 더럽히고, 폭력과 전쟁을 저질러 왔는가? 일차적인 책임이 바로 교회권력에 있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쯤, 하느님과 예수님은 책임이 전혀 없으실까 생각하게 된다. 과거 로마제국 시대나,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미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던 시기에 수많은 희생자들을 냈던 것을 보면서, 여전히 예수님은 ‘내가 진리요!’ ‘나로만 구원’을 주장하실 건가?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선포하셨지만, 다른 진리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박해한다면, 그 진리는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느님과 예수님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파국의 역사들을 보면서도 방관자로 계셨던 것에 대한 책임은 과연 하나도 없으실까? 단순히 지상에서 예수 자신만 알았으면 구원시켜주는 역할로 끝나는 것일까? 예수님을 잘 아는 자가 폭력과 전쟁을 일삼아도 구원의 대상일까? 역사 속에서 수많은 가해자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확신 때문에 마음 놓고 폭력과 전쟁을 더 저지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자신의 뿌리에서 나왔고, 각각은 하느님 자신을 숭배하면서도, 서로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고 죽이는 모습들에 전혀 책임은 없으실까? 물론 하느님과 예수님은 기나긴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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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정경(필자는 정경을 어원적으로 해석하는 ‘기준,’ ‘막대’라고 획일적으로 정의내리는 것에 못마땅하다. 정경 선언은 솔직하게 말하면, ‘종결’내지는 ‘차단’인 것이다)이라는 교회권위에 의존하여 모든 외부와 단절하였고,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에 의존하거나 누리면서 초기부터 버티어 왔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정경을 선포한 때부터 사상적으로 성장이 멈추었기에 척박한 토양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새로운 사상들이 흘러들어올 여지를 차단하였기에 사막화가 처음부터 일어났다고 본다. 그래서 믿을 것은 권력과 교리였다고 본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큰 재앙들을 가져왔는가? 이런 점에서 필자는 계속되는 정경화를 이루지 못하고, 정경으로 차단시킨 것은 독(毒)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기독교가 성서를 정경으로 선포한 이후에 결과적으로 종교 간 갈등, 폭력, 종교재판, 전쟁의 신앙적 이념 제공 등의 부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인류사에 많은 흠집과 상처를 내었다. 곧 창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과 교회들에서 부정적인 현상들이 표출되고 있다. 여기서 독을 빼고, 해독(解毒)하는 길은 이웃종교들, 전통 사상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이성을 존중하여 인문학, 과학 등과 활발한 교류를 만들어 내는 길이다. 또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민중 선교를 통해 사회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본다. 사막화를 극복하는 것은 나무를 심는 일이며, 물과 양분을 제공받는 길이다. 물론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다. 기독교의 성서는 정경으로서 과거의 종결이 아닌, 오늘 현실에서 정경화(canonization) 과정으로 새롭게 재구성(reconstruction)해야 할 것이다. 곧 유대교 경전들의 형성과 해석의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가령 신학교육 현장이나 교회현장에서 신앙 훈련의 일환으로 성서를 그대로 옮겨 베끼는 방식이 아니라, 성서도 각색해보고, 오늘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들은 각색도, 첨가도, 삭제도 해보고, 교리에 비추어도 맞지 않는 의견과 해석들이 나온다고 해도 존중해 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신앙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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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당시 사회의 화석처럼 굳어진 폐습들과 구약 본문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실 종교권력들과 세속권력을 비판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곧 예수의 삶이 구약시대의 옛 문헌을 ‘종결’로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경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의 신학과 교회는 신명기적 사고의 배타성과 정경이 선언한 종결(closure)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털고, 개방(openness)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토양으로 바꾸어 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신학과 교회는 몸집이 세계를 향할 만큼 커졌으나, 여전히 구태의연한 경직되고 속 좁은 사상과 신앙에 안주하고 있다. 다양하고, 개방적인 논의를 펼치면서, 넓은 차원에서 신학과 교회의 새로운 틀과 정체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1세기와 2천년을 여는 때에 철학적, 종교적, 사상적, 영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근본적인 새 틀 짜기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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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매우 급격히 성장하면서 교회권력 역시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속빈 강정이랄까? 신자들을 들뜨게 해서 박수치고 코미디 쇼 보듯이 신앙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내면의 훈련과 이 사회와 역사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통찰과 참여가 결여되어 있다. 예수만 믿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든지 다 해결이 될 것인 양 착한 신자들을 착각하게 하고 어지럽게 만들고 집단 최면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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