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원고] 예레미야가 말하는 우상숭배와 사회정의실천과의 관련
  박경철
  

<script NAME="GENERATOR" CONTENT="HTML DOCUMENT BY HWP WORDIAN"> <script HTTP-EQUIV="Content-Type" CONTENT="text/html; charset=euc-kr">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

?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 ‘금식’, 기장총회회보 2007년, 8월호

?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I): ‘안식일’, 기장총회회보 2007년, 9월호

?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II): ‘선교’, 기장총회회보 2007년 10,11월호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V): ‘우상숭배’

-예레미야가 말하는 우상숭배와 사회정의실천과의 관련-

박경철(한신대 구약학 교수)



1. 들어가면서

기독교 복음의 최우선성으로 내세우는 것 중에 하나가 단연 ‘오직 예수’이다. 절대적 구원종교로서의 유일성을 말해주는 기독교 교리의 근본이 되는 이 믿음과 가르침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가로막는 기본 울타리이다. 그와 동시에 이는 비기독교 측에서 꼬집는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에 대한 최우선적 비판이기도 하다.

‘오직 예수’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절대적 신앙은 구약성서에서 줄곧 언급하고 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율법)과 그 축을 같이한다. 아울러 이때마다 함께 연결되는 것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우상숭배금지’ 조항이다.1) 이는 십계명 제2계명(출 20:4; 신 5:8)뿐 아니라, 오경의 여러 법전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된다(출 20:23; 23:24; 34:17; 레 19:4; 26:1; 신 4:16ff.23,25; 27:15).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상숭배금지조항’은 본래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금지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야훼를 그 어떤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만들 수 없다)는 ‘야훼형상금지’에 있다.2) 이는 어떤 ‘형상’을 지닌 이방신숭배와의 구별을 뜻하는 것임과 동시에, 야훼(신앙)를(을) 그 어떤 ‘형상’(이미지/이데올로기)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3)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우상(형상)금지조항’은 이방신숭배거절과 함께 야훼유일신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며4), 이스라엘 국가멸망의 원인이었음을 지적한다.

이스라엘 국가멸망의 원인은 그들이 주변 강대국보다 국가권력의 힘이 약한데 있었음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한 성서의 보도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인가? 크게보아 두 가지다. 하나는 종교적인 문제요, 또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다. 종교적인 문제로 집약되는 것이 자주 ‘음행’으로 언급되는 우상숭배, 이방신숭배이며, 사회적 문제는 이스라엘의 사회적 불의, 특히 사회 약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지도층들의 불법과 불의한 ‘악행’의 문제이다. 이 둘, 곧 이스라엘의 ‘음행’과 ‘악행’의 모습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임을 예언자들은 저마다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그런데 묻자. 이 두 가지의 문제, 곧 종교적 문제(음행)와 사회적 문제(악행)가 둘로 나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 지에 구약성서에 나타난 종교적 제의 문제와 사회 정의 실천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연재5)하면서 이번에 다룰 주제는 바로 예언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종교제의적 문제인 ‘우상숭배’의 문제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행위로 지목하고 있는 우상숭배 문제와 사회적 불의의 문제가 서로 분리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면상 구약성서의 모든 예언서들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스라엘의 멸망 그 직전에 나타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홀로(!)6) 외쳤던 예언자, 예레미야를 거론하고자 한다. 모두가 ‘아니오’ 라고 할 때, ‘예’라 외쳤던 예언자 예레미야! 모두가 ‘예’ 라고 할 때, ‘아니오’라 외쳤던 그 였다. 모두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면서도 ‘예’와 ‘아니오’가 엇갈린 당시, 누가, 어떻게 ‘참 예언자’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예레미야서이다. 그가 선포한 심판예언이 어떻게 ‘참’인지, 그리고 그가 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지,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음행’(우상숭배)과 ‘악행’(사회적 불의)의 문제7), 곧 “종교제의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가 어떤 것인 지를 아래에서 현 최종형태로서의 예레미야서 성서 본문을 처음부터 하나씩 따라가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전체 52장으로 되어 있는 예레미야서의 전체적인 구성을 잠시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제3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부: 1-25장

1-6장

7-10장

11-13장

14-20장

21-24장

25장

이스라엘과 유다/예루살렘에 대한 초기신탁

여호야김 시대(608-587) 신탁-성전설교

예언자의 운명에 대한 각본

예언자에게 나타난 상징, 고백

시드기야 시대(597-586) 신탁

여호야김 시대(608-587) 신탁

2부 26-45장

26-29장

30-31장

32-33장

34장

35장

36-39장

40-43장

44장

45장

성전설교와 거짓예언자

회복예언(위로의 작은 책)

회복의 상징-(아나돗)밭 구매

시드기야 종말과 종들의 자유/해방 계약 위반

레갑인들의 모범/표본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의 갈등-예레미야 수난사

그달랴 암살과 에집트로의 도주

에집트로 도주한 자들의 우상숭배

바룩에 대한 구원선포

3부: 46-51장

46-51장

열방신탁

52장: 역사부록


제2부의 시작인 26장은 1부 7장의 성전설교를 다시 반복하는 것으로, 전반적으로 1부 예레미야의 선포의 내용들을 2부에서 반복해 나간다. 그리고 제3부는 타예언서들에서와 같이 열방신탁본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본 글은 중복을 피하기 위해 지면상 제1부를 중심으로 우리의 주제를 살펴 나갈 것이다.


2. 예레미야 소명기사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문제를 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간에 전쟁이 났다. 이때 예언자 둘이 나섰다. 한 예언자는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게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니 겁내거나 두려워 말라고 외치는 반면, 다른 예언자는 전쟁에서 패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에 잡혀갈 것이라고 말한다. 두 예언자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러나 전혀 상반된 내용을 선포한다. 문제는 이 중에 누가 ‘참 예언자’인가 하는 것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첫 번째 예언자에게 손을 들어 주었다. 그 다음에 일러주었다. 첫 번째 예언자의 이름은 ‘하나냐’이고, 두 번째 예언자는 ‘예레미야’라고.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참 예언자’인가? 이번엔 모두들 두 번째 예언자에게 손을 들어 주었다. 무엇이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나? 바로 예레미야서 1장, 이른바 예언자 ‘소명기사’ 때문이다. 만약 예레미야서를 한 편의 영화로 본다면, 영화 첫 장면에서 주인공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언자로 보냄을 받는 것을 통해, 모든 관객은 주인공 예레미야가 ‘참 예언자’임을 이미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1장이 그 ‘삶의 자리’(Sitz im Leben)로서가 아니라, 현 ‘책의 자리’(Sitz im Buch)로서 주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다. 구약성서의 본문들을 연대기적으로 각각의 문서층들로 구분하지 않고, 현재의 모습, 그 최종형태의 구성이 주는 의미들을 찾아가는 방법이 최근 구약성서학의 새로운 한 동향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의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 하나씩 예레미야 예언의 의미들을 따라가 보자. 특히 앞서 제기했던 우리들의 문제인, ‘종교적 제의(우상숭배)행위와 사회정의 실천행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말이다.

우선, 1장의 ‘소명기사’안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그러나 매우 중요한 점 하나를 지적해야 할 것 같다. 5절의 ‘열방의 예언자’(나비 라고임)라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선택하는 그 목적이 ‘열방’(고임)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열방’이라면, ‘외국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인데, 예를들어 ‘아프가니스탄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프가니스탄’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열방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이방 나라로 가야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가 가야 할 곳, 그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그 대상은 이방(열방)이 아니라8) ‘이스라엘’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유다의 왕들과 관리들’이며, ‘제사장’과 ‘땅의 백성’(암 하아레츠)들이다(1:18). 예레미야서 안에 이들에 대한 언급은 계속 이어진다(2:8,26; 4:9; 8:1 etc.). 특히 이들에게 가서 전한 예레미야의 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들의 범죄 내용, 곧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의 모습이 어떤 관계인지도 살펴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에게 가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 것을 명한다(1:8; 참고. 1:17; 11:21). 이는 지도층에게 가서 전할 그 내용의 심각성을 암시해 주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열방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가 왜 이스라엘의 지도층에게 가야 하는가?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자의 선포 사명이 ‘열방의 예언자’가 되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4장 1절 이하에 분명하게 제시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다. ‘가증한 것’(쉭꾸쯔)을 제하여 버리고, ‘진실’(에메트)과 ‘공평’(미쉬파트)과 ‘정의’(쩨데카)로 맹세하면, ‘열방’(고임)이 야훼를 자랑하며 그에게 복을 빌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언급한 ‘가증한 것’(쉭꾸쯔)은 그와 유사한 ‘역겨운 것’(토에바)과 함께 예레미야서 안에서 이스라엘의 이방신숭배와 관련되어 곳곳에 언급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것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제’만을 거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4장 1절의 말은 이스라엘의 올바른 종교(제의)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을 통해 ‘열방’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그 순서적 절차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9) 이 때문에, 이미 ‘소명기사’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들 위에’(알-학고임)와 ‘왕국들 위에’(알-함마믈라코트) 세워서, ‘뽑고, 허물고,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다시 세우고 심게’ 한다는 앞으로 일어날 예언 성취의 심판과 구원의 순서를 예시한다(1:10). 이는 이스라엘의 올바른 종교적 제의와 사회정의 실천을 통한 ‘열방’의 구원을 예시하는 곳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곧 4장 2절에서 이상의 일련의 사건들의 성취를 위해 이스라엘(예루살렘)은 “묵은 땅을 갈아 엎고서 씨를 뿌리라”는 것이다(V.3; 참고 호 10:12). 곧 ‘마음의 할례’(올바른 제의)를 받고 ‘악행’(사회적 불의)을 그치라는 것이다(V.4). ‘마음’(레바브/레브)의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외식하는 그들의 (종교적)행위에 대한 비난이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구원은 “마음(레브)에서 악(라아)을 씻는 것”(4:14)이다. 이는 외식하는 ‘종교적 제의 행위’가 ‘사회적 악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10).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마음’의 중요성은 그 유명한 ‘새 계약 사상’인 31장에도 나온다. 곧 이전의 계약은 돌판에 새겼으나, 새 계약은 ‘마음’(레브)에 새긴다는 것이다(31:33).

예레미야를 선택하여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전하게 하는 그 이유로 제시된 것들을 따라가 보자. 제일 먼저 거론된 것이, 이스라엘이 야훼를 떠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손으로 만든 것들을 섬긴 것이라고 나온다(1:16). 야훼를 떠난 것과, 다른 신들을 섬긴 것, 이 두 문제의 관계를 예레미야서는 계속 이어나간다(참고 2:13,18f.). 얼핏보면 그 둘이 하나의 문제, 곧 이스라엘의 종교적 배교행위요 ‘우상숭배’의 문제라 연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절에 그런 행위를 일삼는 자들에게 가서 야훼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말한다(V.17). 이들은 앞서 언급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다(V.18). 예레미야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이 대상들이 나오는 본문들을 따라가 보면, 이들이 과연 무엇을 행했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야훼를 떠난 것과 이방신을 섬긴 것, 그 둘의 관계, 곧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제의 행위와 사회적 불의의 문제가 어떤 관련이 있는 지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3.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죄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심판선언을 전할 대상으로 언급한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죄(악)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예레미야가 말하는 ‘종교적 문제’와 ‘사회적 정의 실천’의 관계를 살펴보자. 1장 예레미야의 소명기사안에는 이들의 죄악의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제일 먼저 가장 가까이 2장에서부터 그 내용이 하나씩 나타난다. 2장 8절에 ‘제사장’은 야훼가 어디에 계신지를 찾지 않으며, 법을 다루는 자는 야훼를 알지 못하고, ‘통치자’(지도자/목자)는 야훼께 맞서고, 예언자들도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무익한 것’(로-요일루)을 쫒아다닌다. 이들이 곧 야훼의 땅을 ‘더럽힌’(따메) 자들이다(V.7). 아직 구체적으로 죄의 내용이 지시되지 않는다. 그런데 13절에 가서, 이들이 두 가지 ‘악’(라아)을 행했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야훼를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곳에 샘을 판 것(V.13)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18절에 나오는 시홀강물을 마시려고 앗시리아로 달려가고, 나일강물을 마시려고 에집트로 달려간 모습을 빗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다음 절(V.19)에서 ‘악’(라아)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위협이 하나님의 심판임11)을 깨닫지 못하고(첫 번째 악), 주변 강대국에 빌붙어 살아보려던(두 번째 악) 이스라엘 지도층의 외교정책에 대한 예언자의 비꼬는 비판이다(참고. 2:36). 그런데 20절 이하는 이들의 행위를 ‘음행’(쪼나/짜나)으로 규정하고 이방신숭배의 모습으로 그린다. 이스라엘 지도층의 외교정책을 발정난 암나귀에 빗대어(V.24) 이방신들을 찾아 다니는 모습으로 연결하고 있다(V.25). 이는 단순히 종교적 행위로서의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와 그 근거를 찾아 회개치 않고, 주변 강대국(이방신들)을 찾아 앗수르와 애굽의 길(데레크)로 ‘찾아드는’ 모습(2:18)이, 곧 이방신들을 ‘찾아다니는’(할라크, V.25)는 이스라엘 고위층의 잘못된 외교정책을 빗대어 비꼬는 말이다. 계속되는 26절 이하의 이스라엘의 지도층(V.26: 왕, 고관, 제사장, 예언자)의 이방신 숭배적인 모습들을 가리켜 곧 야훼를 잊은 것(V.32)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방신 숭배로 표현되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죄악을 34절에는 너의 (행음하는) 옷(치맛)자락에(비케나파이크) 죄없는 가난한 자들의 피가 묻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 국가 지도층들의 국가의 안녕과 번영, 생존을 위한 외교정책에 대한 예언자의 질타가, 종교적 표현으로서의 이방신숭배라 했는데, 바로 그러한 그들의 행위가 사회 약자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연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3장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 지도층의 이상의 외교정책을 빗대어 마치 남편을 떠난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행음’(짜나)한 것으로 빗대어 말한다(V.1, cf. V.19). 그리고 땅이 (이스라엘)의 ‘음행’(쩨누트/짜나)과 ‘악행’(라아)으로 더렵혀 졌다고 말한다(V.2). 야훼는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그에게 '돌아오기'(슈브)를 요구(V.12,14,22; 4:1)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돌아오기’를 거절했다(5:3). 야훼를 거절하고 ‘음행 하는 집’(베이트 쪼나)에 들어가 ‘행음’(짜나)하는 이들(V.8)에 대한 야훼의 심판은 단호하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의해 볼 것이 있다. 5장에서 야훼의 심판의 정당성을 말하면서, 그들의 범죄사실을 거론할 때, 무엇보다도 사회적 불의의 문제를 자세히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불의한 재산을 축적하여 권세를 누리는 부자들, 사회적 약자들(고아, 가난한 자)에게 공정한 판결을 하지 않는 행위이다(V.27f.).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8절 이하의 이스라엘의 이방신숭배적인 배교행위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 28절 이하의 사회약자들에 대한 불의한 행위들에 대한 야훼의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한 언급이 한 글자도 틀림없이 동일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9절: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야훼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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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절: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야훼의 말씀이니라”

 

yvpn ~Qntt al hzK-rva yAgB ~aw hAhy-~an dqpa-aAl hLa-l[h

이 말은 이방신숭배로 표현되는 이스라엘 국가 지도층의 외교정책이 결국 이스라엘 안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는 불의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음행’과 ‘악행’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야훼의 심판은 두 가지 잘못(죄악)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종교적 죄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한 사회 약자들에 대한 불법, 악행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야훼의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인 왕, 지도자,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들이 ‘놀랄 것’(타마)(4:9)은, 바로 위(5:28)에서 언급한 사회 기득권층들이 사회 약자들에게 불의한 악행을 일삼고 있는 이 ‘놀라운 일’(타마)이 일어나고 있음에도(5:30),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V.31).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거짓 예언’은 예레미야서 안에서 핵심적 주제중 하나이다. 그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하다, 안전하다’(샬롬, 샬롬)고 외치는(6:14), 곧 평화를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6:14; 참고, 14:13f.; 28:9). 아울러 불의한 재산을 모으는 예언자와 제사장은 이로인해 (가난한) 백성들이 상처(피해/ 쉐베르)를 입어도 ‘샬롬, 샬롬’을 외치며 ‘역겨운’(토에바)일을 행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의 말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문제를 일컫는 대목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6:13-15=8:10-12). ‘거짓’된 죄악의 모습을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는 9장에서 이들이 거짓된 이유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실상 마음속으로는 서로를 해칠 생각만 품고 있기 때문(9:8[7])이라고 지적한다. 9[8]절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 대한 야훼의 심판이 당연한 귀결임을 앞서 언급했던 5장 9절과 29절의 내용과 한 자 틀림없이 또한 동일하게 언급한다:

9[8]절: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야훼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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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불의한 재산을 모으는 자(17:11)를 앞에서 하나의 죄악으로 지칭했던 ‘생수의 근원인 야훼’를 떠난 것으로 연결짓기도 한다(17:13).

예레미야서 안에서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선포를 통해, 종교적 문제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련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라 불리는 예레미야 7장 이하의 본문이다. 이제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를 통해 이 둘의 관계를 앞서 이야기 했던 것들과 또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 지 알아보자.


4. 예레미야의 성전설교

‘성전’은 분명 종교제의 장소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성전에 가서 전하는 내용을 통해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성전에서의 예레미야의 선포가 단지 종교적 문제만을 말하고 있는 가 하는 점이다.

예레미야는 ‘주의 성전’(야훼의 집/ 베트 아도나이) 문 앞에 서서 모든 유다 백성들에게 주의 말씀을 선포한다(7:2). 곧 야훼께 제의를 행하기 위해 주의 집(성전)으로 오는, 즉 종교적 제의 행위를 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야훼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의 첫 마디는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V.4)는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요구와 명령은, 모든 악한 행실을 고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억압하지 말고, 바로 ‘이 곳’(밤마꼼 핫쩨), 즉 주의 성전에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한다(V.6).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 예언을 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들을 열거한다(V.9). 사회적 문제와 종교적 문제를 함께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이 두 가지로 보고 있는 것인가? 주의해 볼 것이 있다. 여기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악한 행실이 “이 곳”(밤마꼼 핫쩨), 곧 주의 성전에서 이루어 졌겠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성전안에서 행해진 일은 아니다. 이는 성전 밖에서는 사회적 불의와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종교적 행위를 하기 위해 주의 성전에 오는 이들의 이중적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주를 경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오지만, 이들의 사회적 불의한 행실로 인해, 야훼는 그의 이름이 불리는 성전을 옛 적 실로에서 행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을 말한다(V.14, 26:6f. 참고, 수 18:1; 삼상 4장; 시 78:60). 이러한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한 예레미야의 그 어떤 중보의 기도도 허락지 않는다(V.16).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금지하는 내용은 예레미야서 곳곳에 언급되는 데,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범죄와 사회적 불의의 문제가 함께 연관되어 있다.

우선 11장 14절이다. 11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다른 신들을 쫒아 다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댓가로 그 역시 언약에 따라 조상들에게 심판이 임했는데, 이제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들 역시도 야훼가 조상들과 맺은 그 언약을 파기하고 ‘음모’(반역/ 께쉐르)하였다는 것이다(V.9f.). 언약 파기의 내용들은 이방신 숭배의 모습들이다(V.12f.).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내릴 것이고,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악한 행실을 하면서도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기에 이들에게 재앙이 미친것이라 말한다(V.15). 11장만을 보면 이스라엘의 범죄가 종교적 문제만으로 국한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바로 앞 장인 10장은 우상숭배에 대한 비난(V.2-5)과 함께 오직 야훼만이 참된 하나님임을 거론한다(V.6-16). 그리고 백성들은 심판을 통해서야 비로소 야훼가 참 하나님임을 ‘깨닫고 안다’(V.17-25). 그런데 여기 ‘깨닫고 안다’는 말은 야훼가 진정 누구인가를 ‘아는 것’(야다)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그것이 8-9장의 핵심 내용이다. 11장 처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은 애굽에서 나올때 그들로 하여금 지키라고 명한 것(V.4)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된다”(V.4b)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19장의 이른바 ‘시내산 계약’의 요점이며, ‘시내산 단락’이라고 불리는 출 19:1-민 10:10까지의 모든 율법과 규례와 명령은 한마디로 ‘토라’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8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의 모습을 가리켜, ‘야훼의 율법’(토라트 아도나이)을 거짓으로 만든 것으로 말한다(8:8). 비록 ‘율법’(토라)을 갖고 있다 하여도 이를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저들이 ‘야훼의 규례’(미쉬파트 아도나이)를 ‘알지 못한다’(로 야데우)는 것과 동일하다(V.7). 그러한 이들의 행위가 앞서 언급했던 불의한 재산을 모으며 ‘샬롬’을 외치는 자들이다. 그러니 진정 야훼를 ‘안다’(야다)는 것은 곧, 야훼가 ‘땅’에(바아레츠) ‘공평과 정의’(미쉬파트 우쩨다까)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9:24[23]). 야훼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시는 것을 ‘아는 일’이 곧 ‘야훼의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일이다. ‘공평과 정의’를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문제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를 푸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미 4장 2절에서 이스라엘이 ‘가증한 것/역겨운 것’을 제거하고,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는 것을 통해 열방이 야훼를 찬양할 것임을 선명했다면, 22장의 유다 왕실을 향한 예레미야의 선포는 유다의 왕과 고관들이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를 실천할 것을 천명한다. 이는 억압받는 자들을 구해내고,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 것, 그리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사회정의 실천행위를 말한다(V.2-3).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면서 일꾼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유다 왕실과 지도층들에 대한 비난(V.13f.)과, 그들의 부의 축적을 위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는 일이 곧 야훼를 ‘아는 것’(야다)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한다(V.16). 그럼에도 기득권자들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V.17). 특히 주목할 것은 바로 다음 장인 23장에서의 메시야 예언을 보면, 다윗에게서 ‘정의로운’(짜디끄) 가지가 나서, 그가 ‘공평과 정의’(미쉬파트 우쩨다까)를 행사할 것이라고 말한다(V.5). 이상은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자의 중보기도까지 허락지 않는 이스라엘의 중대 범죄란, 곧 이스라엘의 종교적 배교행위가 사회적 불의의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칭한다. 14장 11절에서도 또 다시 예언자의 중보기도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 역시 ‘거짓 예언자’들의 문제와 연결짓는다(V.13-16). ‘거짓 예언자’ 문제는 이미 앞에서 그들의 사회적 불의의 문제들과 연결했었다. 15장 1절에서는 보다 더 강조하여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백성들을 위해 간청한다고 하여도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다고 야훼의 심판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그 이유로 ‘므낫세의 범죄’를 제시한다(V.4). 그것이 무엇인가? 열왕기하 21장은 므낫세의 범죄사실을 열거한다. 열왕기서가 전하는 므낫세의 범죄는 곧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므낫세’를 거론하는 본 뜻은 무엇일까? 그것과 예레미야서에서의 우상숭배와 사회정의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5. 힌놈(의 아들) 골짜기-살육의 골짜기

앞서 언급한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기도조차 금지할 정도로 가장 큰 이스라엘의 범죄는 무엇일까? 자세한 언급없이 15장 4절에서 지목한 ‘므낫세의 범죄’란 예레미야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열왕기하 21장이 전하는 므낫세의 우상숭배의 여러 조항들 중에 예레미야서와 관련이 되는 대목을 찾아야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신명기 신학에 의거해 기록한 이른바 신명기사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역사평가의 기준으로 무엇보다도 북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세운 일(왕상 11:29)을 두고 북이스라엘 역대왕조가 “여로보암의 죄를 벗어나지 않았다”(왕하 3:3; 10:29; 13:2; 14:24; 15:9,18,24,28)는 종교적 평가를 내린다. 남유다 왕국에 대한 그의 평가도 이와 별 다르지 않다. 특히 므낫세와 관련하여, 그의 범죄가 무엇보다도 야훼께 ‘악’(라아)을 행한 자요(왕하 21:2), 구체적 사안은 그의 부왕인 히스기야가 헐어버렸던 이방 산당들을 다시 세우고 온갖 우상숭배를 한 일이었다(V.3-16).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반란으로 살해되고, 그 뒤를 이어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다. 요시야는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에 따라 모든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지우는 개혁을 단행하였다(22:2-23:20). 요시야의 이러한 일련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대한 야훼의 진노가 그치지 않은 이유를 ‘므낫세의 범죄’라고 지목한다(23:26). 이상의 신명기사가의 므낫세에 대한 평가를 예레미야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므낫세의 여러 우상숭배의 범죄사실들 중에, “자식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한 것”(왕하 21:6a)이 있는데, 이는 요시야가 금지시킨 일로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을 더럽게 하여 자녀들을 몰록에게 불로 지나가 바치게 하는 일’이었다(23:10). 바로 이 대목을 예레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인 7장에서 예레미야는 성전에서의 악한 일들을 금하고 사회약자들을 돌볼 것을 명하고, 30절이하에서 유다 백성들의 ‘악’한 행실을 고발하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불태워 죽인’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언급한다. 므낫세가 행한 우상숭배의 모습에서는 ‘불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아바르 ... 바에쉬)(왕하 21:6)이었다면, 예레미야는 이를 ‘불살랐다’(사라프 ... 바에쉬)(렘 7:31b)고 직접적으로 비난한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아예 ‘죽임의 골짜기’(게임 하하레가)(V.32)라 명명한다. 이러한 유다의 죄악은 야훼가 ‘상상도 못 한 일’(V.31)이다. 7장에서는 이 일을 유다의 백성들의 죄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19장에 가서는 분명하게 유다의 왕들을 지목한다. 그들이 자식들을 ‘바알’에게 불살라 바치기 위해 바알의 산당을 세운 것이다. 여기서도 이는 야훼가 ‘상상도 못 한 일’이라고 말하고(참고 32:34f.), 다시 한 번 ‘죽임의 골짜기’라 불리울 것을 말한다(19:3-6). 특이한 점은 이런 우상숭배의 죄악상을 단지 종교적 차원으로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로 인해 “무죄한 사람들의 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V.4)는 데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일은 7장 성전설교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지 말 것을 말하는 가운데 들어 있던 대목이다(V.6). 무죄한 자들의 죽음, 아니 죄 없는 자들을 죽이는 죄악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난은 이미 신명기 사가의 지적에도 들어있던 것이었다(왕하 21:16). 그런데 이 ‘죄 없는 자들을 죽이는 일’이 단지 종교적 행위로 인해 빚어진 것일까? 종교적 제의 행위(우상숭배)를 통한 국가의 부와 번영, 생존을 모색하던 국가권력이 유다의 백성들로 하여금 힌놈의 골짜기로 자신의 자녀들을 데려와 불태워 죽이게 했다면, 이는 단순한 ‘우상숭배’의 문제로, 종교적 배교행위로만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문제이며, 사회정의실천의 문제다. 특별히 무죄한 자들을 죽이는 일들이 단지 자녀들을 죽이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약자들을 죽이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참고, 26:15). 19장에서 이상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말한다(V.10). 이 ‘항아리’ 비유는 13장에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예시한 것인데, 거기서 분명하게 심판의 대상들로 예레미야서 곳곳에서 줄곳 지목하고 있는 국가 지도자들(다윗의 왕위에 낮은 왕들, 제사장들, 예언자들과 이스라엘의 주민들)이다(V.12-14). 국가권력에 대한 예언자의 비난을 직접 들어보자. 23장에가서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궁에 가서 유다의 왕과 관리들에게 성전에서 외쳤던 말을 또 다시 반복한다: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V.3)


국가의 번영과 멸망의 잣대는 이러한 사회정의의 실천여부에 있음을 천명한다(V.4f.)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장인 23장에 가서, 야훼의 ‘양떼’(하나님의 백성들)를 몰아낸 목자들(지도층)을 몰아내고, 친히 야훼께서 당신의 양떼(백성들, 사회 약자들)들을 돌보실 것이니, 이것이 곧 메시야 기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메시야)가 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이다(V.5). 그의 이름은 이 땅의 권력자, 왕인 ‘시드기야’(찌드끼야후)가 아니라, ‘야훼가 우리의 정의(쩨데까)’, 곧 ‘아도나이 찌드끼누'이다(V.6b).


6. 나가면서

예레미야서의 현 최종형태 본문의 구성, 현 ‘책의 자리’(Sitz im Buch)로서의 의미를 따른다면, 이미 책의 앞에서부터 끊임없이 지목됐던 이스라엘의 죄악으로서의 ‘음행’과 ‘악행’의 문제, 국가멸망의 위기 앞에서, 국가권력이 지향하려 했던 강대국에 대한 의존과 그에따른 이방신숭배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불법과 불의한 억압과 착취, 나아가 죽이는 일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예언자의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인, ‘종교적 행위’로서의 ‘우상숭배의 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불법과 불의한 모습이 둘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내에서 ‘우상숭배’의 문제가 단순히 타종교에 대한 절대적 거부로서만 인식되고 있는 이 때에, 예레미야의 선포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지만, 교회가 시장이 된 지 이미 오래라는 기독교내외의 비판을 다시 한 번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 ‘오직 예수’라 믿고 외치며, 타종교에 대한 절대적 거부만이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는 보수신앙을 가르치는 많은 교회들은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를 다시 들어야 한다. 교회안에서는 온갖 물신의 우상을 섬기고, 교회 밖에서는 가진 자들을 위한 국가 정책에 교회가 손을 들어 주고 있다면, 이는 단지 교회의 자본화, 교회의 시장화에 대한 비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교회의 물량주의와 시장주의가 교회 밖의 사회의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죽이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깨달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속에서 국가의 번영을 위한 이 나라, 저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짓밟고 죽이는 일이라면, 예레미야가 외쳤던 것 처럼, FTA는 시홀강을 마시러 앗수르로 달려가고, 나일강을 마시러 애굽으로 달려갔던 이스라엘 국가멸망을 초래했던 유다의 왕들보다, 그리고 므낫세의 정책보다 더 죄악된 ‘우상숭배’라고 오늘 교회는 말해야 하지 않는가! 다시 한 번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보자. 무엇이 잘사는 길인가를,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일이 잘 사는 길이나니,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냐, 야훼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렘 22:13-17)



1) 구약성서의 ‘우상/형상금지 조항’에 대해서는 특히, K.-H. Bernhardt, Gott und Bild, 1956; W. Zimmerli, "Das zweite Gebot", in: TB 19(1969), 234-248; 같은이, "Das Bilderverbot in der Geschichte des alten Israel", in: FS. A. Jepsen, 1971, 86-96; G. von Rad, "Aspekte alttestamentlichen Weltverstandnisses", in: EvTh 24(1964), 57-73; W.H. Schmidt, "Auspragungen des Bilderverbot? Zur Sichtbarkeit und Vorstellbarkeit Gottes im Alten Testament", in: FS. G. Friedrich, 1973, 25-34; Chr. Link, "Das Bilderverbot als Kriterium teologischen Redens von Gott", in: ZThK 74(1977), 58-85; Chr. Dohmen, Das Bilderverbot, 2. Aufl. 1987(BBB 62); R.S. Hendel, "The Social Origins of the Aniconic Tradition in Early Israel", in: CBQ 50(1988), 365-382; F-L. Hossfeld, "Du sollst dir kein Bild machen!", in: TThZ 98(1989), 81-94;  Seidl, Theodor / Garhammer, Erich (Hg.), “Kunstverbot oder Kultverbot? Zum Verstandnis des alttestamentlichen Bilderverbots”. in: Bilder Streit. Theologie auf Augenhohe (2007) 29 - 45; Tilly, Michael, "Antijudische Instrumentalisierungen des biblischen Bilderverbots", in: Andreas Wagner(Hg.), Gott im Wort - Gott im Bild. Bilderlosigkeit als Bedingung des Monotheismus?, 2005, 23-30 등을 참고하라.


2)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십계명의 제1계명이 이미 다른 신들을 언급하고 있기에 이것과 비교하여 제2계명의 ‘우상금지조항’은 다른 신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야훼의 형상금지조항으로 이해한다. F. Crusemann, Die Bewahrung der Freiheit,


3) 이에 대하여 Hossfeld는 야훼신앙의 고정화에 대한 반대라고 본다. F-L. Hossfeld, "Du sollst dir kein Bild machen!", 특히 93 참고.


4) 사 2:8; 10:11; 40:19f.; 41:6f.21-29; 42:17; 43:8-13; 57:13; 렘 10:14; 51:17; 겔 6:4-13; 14:3-7; 20:7f.; 호 3:4; 4:11-19; 8:4-6; 9:10; 10:1-6; 13:1-3,14; 14:2-9; 암 8:14; 미 5:12ff.; 나 1:14; 합 2:18f.; 슥 13:2 etc.


5) 기장회보 2007년 8월호: ‘금식’, 9월호: ‘안식일’, 10,11월호: ‘선교’


6) 이스라엘 포로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친 예언자들은 많지만, 여기 ‘홀로’의 의미는 예레미야서 안에서의 의미를 뜻한다.


7) 3:2b: “... 너는 이렇게 네 음행(비쩨누타이크)과 악행(우베라아테크)으로 이 땅을 더럽혀 놓았다.”


8) 비록 ‘열방신탁선언’이 타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 안(46-51장)에 나온다 할 지라도, 타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예언자가 그곳에 가는 게 아니다.


9) 이스라엘의 사회정의 실천과 열방의 구원에 관련하여 다른 예언서인 이사야서와 요나서의 입장에 관해서는, 본지 지난호(10,11월호), 필자의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II), 선교 =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참고하라.


10) 이런 지적은 이사야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특히, 사 1:13-17).


11) 이는 이미 예레미야서 가장 처음, 곧 ‘소명기사’안에서 상징으로 나타난 ‘북쪽으로부터의 끓는 솥’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1:13ff.).


2007-11-19 12:4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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