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원고]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V): ‘교회’
  박경철
  

1.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 ‘금식’, 기장총회회보 2007년, 8월호

2.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I): ‘안식일’, 기장총회회보 2007년, 9월호

3.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II): ‘선교’, 기장총회회보 2007년 10,11월호

4.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V): ‘우상숭배’, 기장총회회보 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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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V): ‘교회’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

박경철(한신대 구약학 교수)


1. 신약성서와 교회

1.1.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은, “교회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교회의 본질’을 말하고자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총체적 ‘교회의 위기의식’에 대한 이른바 ‘교회개혁’의 목소리에 편승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교회의 위기’로부터 탈출하여 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인가? 이때마다 들리는 말이 곧 ‘초대교회로의 복귀’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대한 분명한 모습을 재구성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 초대교회’의 재건을 꿈꾸며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불분명한 ‘초대교회’로의 복귀와 회복의 구호들은 실제 이미 그 구체적 실효성을 잃어버렸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문제에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개혁’을 외치며 ‘초대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이들이 작금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진정 포기(!)하고 성서가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회귀할 수 있는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고”(행 2:42),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절)


여기까지는 강조할지 모르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44-45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4:32)


오늘날 교회가 이상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과연 재현 할 수 있을까? 아니 진정 그러고 싶을까? 이상과 같은 ‘초대교회’의 모습은 분명 현대적 교회를 이루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다시 묻자. “교회란 무엇인가?” 성서의 시대를 현 교회의 시대에 맞추어 새로이(탈) 해석해야 하는가? 성서해석학의 여러 논의들을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의 교회를 존속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성서 본문은 피하고, ‘지금’의 교회를 더 견고한 자본의 성(城)을 쌓도록 하는 성서본문들을 찾아내고자 한다면, 성서가 교회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종교개혁이전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교회의 부패에 대한 종교개혁자의 목소리가 “오직 성서!”였음을 안다면, 다시 한 번 성서가 말하는 교회가 무엇이었는 지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아야 한다. 교회를 위한 성서가 아니라, 그 역순이다!


1.2. 신앙고백 공동체로서(만)의 교회?

‘교회’는 어떻게 생겼을까? 누가 만들었을까? ‘교회’ 설립의 근거로 가장 잘 인용되는 본문이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그리스도 신앙고백 이후에 하신 예수의 말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Petros)라 내가 이 반석(Petra) 위에 내 교회를(에클레시안)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흔히 이 본문을 갖고 ‘교회’ 존재의 정의를,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공동체의 모임’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는 현 성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의 본 의도를 벗어난 사고이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교회 건립에 대한 발언이 있은 후, 바로 “이(그)때부터(아포 토테)” 예수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21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가 그렇게 할 것을 만류한다(22절).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사탄’으로 정죄 받는다(23절). 그런 다음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가르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4-25절)


현 성서의 최종형태 본문은 매우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두 모습을 ‘교회’와 관련하여 대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을 향(위)해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사탄’이다. 예수의 말이다. 동시에 세상의 구원을 외치는 오늘날의 ‘교회’가 자신들의 목숨을 스스로 잃지 않고서는 결코 ‘세상’의 구원이란 없다.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만을 걸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을 위한)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3.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의 본질’로 자주 대표되는 ‘초대교회로의 회복’에 대한 표상 중 다른 하나는, 곧 바울의 ‘몸으로서의 교회론’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표현(엡 1:23; 골 1:24)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의 장소가 곧 ‘교회’라는 것이며, 이는 바울의 선교사역의 중심이었던 ‘십자가와 부활’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뜻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의 고난의 몸을 통해 교회가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 말하고(골 1:20), ‘부활’의 예수의 몸을 통해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만물의 으뜸이 된 그리스도는 곧 몸으로서의 교회에서 으뜸이 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증언한다(골 1:18). 곧 ‘교회’란 ‘십자가’와 ‘부활’, 곧 생명의 평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으며 죽임의 권세를 물리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가 될 때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8)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개혁의 목적과 방향은 이상의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 일치하는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의 외침은 교회 스스로 이 세상에서 죽임의 권세를 물리치는 고난을 통해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로 나아가고자 하려는 것인가? 오늘 ‘교회의 위기’가 교회가 세상에서 고난을 회피하고 평화를 일구는 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자기반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십자가’는 고난이며 죽음이다. 오늘날 교회가 고난을 자처하고 죽기로 작정하는가? 더 살려고 하고, 보다 더 잘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성서가 말한는 ‘교회개혁’의 중심은 다름 아니다. ‘교회’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어떻게? “교회가 죽어야 세상이 산다!”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은 외형적 건물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이들의 모임인 공동체적 성격이었다. 바울은 ‘교회’,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을 자주 동의어로 사용한다(참고: 롬 12:4-5; 고전 6:15; 10:16-17; 엡 1:22-23; 4:15-16; 골 1:18; 2:18-19). 이는 사울의 회심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고(행 8:1),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2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9:1), “그 도를 좇는 사람”(2절)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은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5절)라고 말한다. ‘교회’, ‘주의 제자들=도를 좇는 자들’, 그리고 ‘예수’가 동의어로 쓰인다. 이는 특히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비유함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들을 ‘몸의 각 지체’로 설명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고전 12:12-31, 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교회공동체 각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26절)


‘교회’의 본질적 모습은 고통을 받는 지체를 위해 고통을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한 몸을 이루고 사는 것이다. 고난의 그리스도를 한 몸으로 받아들인 교회는 고난 받는 지체들을 한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곧, ‘몸으로서의 교회’가 고난 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바울이 외형적 ‘교회’를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지 않은 것은, 당시 유대 공동체에서 종교적 상징인 외형적 ‘성전’에 대한 다른 개념으로서 성도들 자신을 향해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은 ‘교회’를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대립된 새로운 틀의 또다른 어떤 외형적 ‘교회’를 세우려 한 것이 아니다. 즉 ‘성전’에 반대해서 ‘교회’를 세웠다는 말이 아니다. 오순절성령사건이후 시작된 ‘초대교회’는 이른바 새로운 그 어떤 외형적 ‘개척교회’가 아니다. 성령 받은 후 사람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행 2:46)을 썼으며, 사도들은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쳤다(행 3:1이하; 5:21,25,42). 예수 당시 외형적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는 자주(‘날마다’ 눅 19:47; 22:53)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의 성전척결사건도 성전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의 본래적 기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성전’을 헐어버리겠다는 예수의 발언 역시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동일한 증언을 전한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21)


이제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원형으로서 ‘성전’의 개념에 대해서 성서의 증언을 따라가 보아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성령사건이후 새로운 개념으로서 ‘교회’가 등장했다면, ‘성전’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이고, 그것이 신약에서 어떻게 ‘교회’로 전이된 것인가를 알아보자.


2. 구약성서와 성전

2.1. ‘성전’의 용도

‘성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헤칼]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구약성서에서 반드시 ‘성전’을 의미하는 것만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 밖의 궁전들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왕상 21:1; 왕하 20:18; 사 39:7; 느 2:7; 암 8:3). [헤칼]이 ‘성전(소)’의 의미로 처음 쓰인 곳은 ‘실로’였으며(삼상 1:9; 3:3), 포로기 이후(제2성전)까지 이 단어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왕하 18:26; 23:4; 24:13; 렘 7:4; 24:1; 50:28; 51:11; 겔 8:16). 포로기 이전에 [헤칼]은 때론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할 때, 성전의 안뜰을 의미하기도 했다(왕상 6:5,17; 7:50).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히 ‘집’(바이트), ‘야훼의 집’(벳 아도나이) 또는 ‘하나님의 집’(벳 엘로힘)으로도 자주 쓰였다(왕상 7:12,40,45,51...). 하지만 반드시 이 개념이 예루살렘 성전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삿 18:31; 삼상 1:7;5:2). 포로기 이후에 와서는 특히 ‘거룩한’(聖)을 뜻하는 [까도쉬]의 뜻이 담긴 ‘聖殿’(벳 함미까다쉬)이라고 쓰이고도 했다.

신약성서에서 언급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경우는, 야훼 제의의 장소로 ‘오직 한 곳’을 선택하겠다는 신명기에 따라(12:5,11,21; 14:23,24; 16:2,6,11) 중앙제의화를 이룬 요시아 종교개혁(왕하 22-23장)의 산물이었다. 이스라엘 왕조국가 시대 이전부터 이미 예루살렘이 아닌 지방 곳곳에 많은 제의의 장소들로 ‘성전/소’들이 있었으나 왕조시대 ‘성전/소’들은 혼합종교제의의 장소이며, 예언자들의 거센 종교적이며 사회불의적 비난의 장소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모스와 예레미야이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예루살렘 성전과 달리 구약성서에 혼용되어 사용된 ‘성전/소’들은 그 규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중요한 곳들은 ‘실로’(삼상 1:9; 3:3; 시 78:60), ‘단’(삿 18:28-31; 왕상 12:29), ‘베델’(왕상 12:29; 암 4:4; 5:5; 7:13), ‘길갈’(암 4:4; 5:5; 호 4:15; 9:15; 12:12). 이 외에도 이름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놉’(삼상 21:2; 22:11)과 ‘브엘세바’(삼상 8:2; 5:5)와 ‘미스바’와 ‘헤브론’ 또는 ‘기브아’에도 있었을 것이다.


2.2. ‘야훼의 이름’을 위한 ‘생명살림’으로서의 ‘성전신학’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랜된 법전으로 알려진 ‘계약법전’(출 20:22-23:33)의 서두 ‘제단법’(22-26절)에는 “나(야훼)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내(야훼)가 정한 곳”을 언급하면서 그 장소는 어느 곳이든 ‘야훼의 이름’을 기억하는 장소이다(24절). 그러나 신명기에 오면, ‘야훼의 이름’을 두기 위해 선택한 ‘한 곳’을 언급하면서(11절)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단정한다(13절). 계약법전과 신명기의 특정장소에 대한 차이는 있지만 그 둘의 공통점은 제사를 드리는 곳, 야훼를 경배하는 곳으로서의 ‘성전’의 본래적 기능을 ‘야훼의 이름’과 연결시킨다.

훗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이유를 제시하는 대목에서도 ‘야훼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삼하 7:13; 왕상 3:2; 5:3; 8:17-20,29,43; 대하 6:6-9). 특히 야훼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특정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게 된 가장 중요한 근거는 앞서 언급한 신명기의 야훼 중앙제의화에 따른 것으로,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두기 위한 한 곳을 정해 줄 것임을 시사하는 본문들이다(신 12:5,11,21; 14:23,24; 16:2,6,11). 신명기의 지시에 따라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중요사업으로 지방성소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중앙제의화가 일어난 것이다(왕하 22-23장).

야훼의 이름을 두기 위한 장소로써의 성전의 의미란, 곧 야훼의 이름이 성전에 있다는 것으로 이는 성전이 곧 야훼 임재의 장소를 알리는 야훼 임재신학과 연결된다. “야훼가 어디에 계시는 가?”의 야훼임재신학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야훼의 모든 구원사건을 통해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것이며, 이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라는 구약성서 전반, 특히 출애굽 사건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야훼의 구원사의 중요 요소이며 그 출발점이기도 하다. 시내산 가시떨기나무(스네) 한 가운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여는 그 첫 장면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을 해방할 자,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곧 “그의 이름이 무엇인가(마 쉐모)?”와 연결된다(출 3:14). 특히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나타난 “엘 샷다이”로서가 아니라 모세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야훼 이름 계시(6:3)를 통해, 야훼 이름이 갖는 야훼 구원사의 가장 중요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는 불가운데서도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 그 가운데 계시는 야훼, 태양신(레)의 아들인 바로의 압정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받는 히브리 민중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들으시며, 이제 그들을 해방(구원)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속성을 그의 이름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곧 ‘야훼의 이름’이 계시되는 바로 그 곳에 야훼 임재신학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야훼 이름의 임재신학’은 고통 받는 히브리 민중들에 대한 구원사의 핵심이며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 ‘야훼의 이름’을 두기(기억되기) 위한 ‘성전’과 연결된 야훼 이름의 임재신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성전’이 예루살렘 특정장소와 연결된 근본 동인은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과 관련된다. 하나님이 제시한 장소, ‘모리아산’에서의 아들 희생의 번제 지시는(창 22:2), 훗날 솔로몬이 ‘모리아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 것(대하 3:1)의 연결이다. 구약성서 전체에서 ‘모리아’ 지명이 언급된 곳은 오직 이 두 곳밖에 없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이야기와 ‘성전’, 그리고 야훼 이름의 임재신학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창세기 22장은 흔히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본문은 창 22장에서 하나님의 ‘신명(神名)’을 매우 의도적으로 대립하여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희생제사를 지시하는 신의 이름은 ‘엘로힘’으로 등장하고, 이삭의 희생(죽임)을 막아서는 이로 등장하는 이가 곧 ‘야훼’이다. ‘야훼’라는 신명의 등장은 어린이 희생제사를 막으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근동에 널리 퍼져있던 어린이 희생제사(왕하 23:10)에 대한 야훼 신앙의 절대 반대를 말해주는 것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그 전 므낫세의 자녀희생제의, 곧 몰렉에게 불살라 바치는 죄악(21:6)을 신명기 사가는 이스라엘 멸망의 중요 요인으로 언급한다(23:26). 그리고 이런 죄악으로 인해 ‘야훼의 이름’을 두기로 했던 ‘성전’조차도 멸망을 받을 것임을 말한다(27절).

몰렉에게 불살라 바치는 어린이 희생제의가 국가권력(므낫세왕)에 의한 국가제의 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종교제의가 단순한 이교도적 풍습으로서의 우상숭배가 아니라, 사회적 불의의 문제와 직결되었다는 것을 예레미야는 전한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인 7장에서 예레미야는 성전에서의 악한 일들을 금하고 사회약자들을 돌볼 것을 명하고, 30절이하에서 유다 백성들의 ‘악’한 행실을 고발하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불태워 죽인’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언급한다. 므낫세가 행한 우상숭배의 모습에서는 ‘불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아바르 ... 바에쉬)(왕하 21:6)이었다면, 예레미야는 이를 ‘불살랐다’(사라프 ... 바에쉬)(렘 7:31b)고 직접적으로 비난한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아예 ‘죽임의 골짜기’(게임 하하레가)(V.32)라 명명한다. 이러한 유다의 죄악은 야훼가 ‘상상도 못 한 일’(V.31)이다. 7장에서는 이 일을 유다의 백성들의 죄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19장에 가서는 분명하게 유다의 왕들을 지목한다. 그들이 자식들을 ‘바알’에게 불살라 바치기 위해 바알의 산당을 세운 것이다. 여기서도 이는 야훼가 ‘상상도 못 한 일’이라고 말하고(참고 32:34f.), 다시 한 번 ‘죽임의 골짜기’라 불리울 것을 말한다(19:3-6). 특이한 점은 이런 우상숭배의 죄악상을 단지 종교적 차원으로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로 인해 “무죄한 사람들의 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V.4)는 데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일은 7장 성전설교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지 말 것을 말하는 가운데 들어 있던 대목이다(V.6). 무죄한 자들의 죽음, 아니 죄 없는 자들을 죽이는 죄악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난은 이미 신명기 사가의 지적에도 들어있던 것이었다(왕하 21:16). 그런데 이 ‘죄 없는 자들을 죽이는 일’이 단지 종교적 행위로 인해 빚어진 것일까? 종교적 제의 행위(우상숭배)를 통한 국가의 부와 번영, 생존을 모색하던 국가권력이 유다의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자신의 자녀들을 데려와 불태워 죽이게 했다면, 이는 단순한 ‘우상숭배’의 문제로, 종교적 배교행위로만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문제이며, 사회정의실천의 문제다. 특별히 무죄한 자들을 죽이는 일들이 단지 자녀들을 죽이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약자들을 죽이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임이 아닌 생명 살림에 나타난 야훼 이름 계시의 장소(모리아)가 야훼의 이름을 두시기 위한 성전 건축의 장소(예루살렘), 야훼 임재의 신학으로 연결되었다. 바로 이 점에 오늘날 교회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는 것이다. 곧 ‘교회’의 존재여부는 생명 살림의 실천 장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그 역으로, 죽임을 물리치고 생명 살림의 장소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곧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설 위치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영적인 의미로서만 영혼의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영생의 교리만을 전하는 것으로 ‘교회’의 본질을 말 할 수 있는가?


2.3. ‘성전’=하나님의 임재/현존의 신학

‘성전’의 모형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의 ‘회막/성막’이다(출 25-30; 35-39장). 제사문헌이 전하는 ‘성전’의 모형으로서의 ‘성막(미쉬칸)/회막’(오헬 모에드)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성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집’이다. 곧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하나님이 어디계시는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답으로서 하나님의 현현의 장소가 곧 ‘성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현현장소로서의 성전신학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현 최종형태 오경이 전해주는 그 구성에 있어서, ‘성막/회막’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성막/회막’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법궤’를 안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훗날 이동식 ‘성막’이 고정식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어지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다윗이 법궤를 자신의 왕궁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들여온 것이었다(삼하 6장). 법궤와 성전의 관련성은 하나님이 법궤에 임재하시고, 법궤를 들여놓은 ‘집’에 하나님이 거주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신학이다. 법궤가 만들어지게 된 동기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의 말씀, 곧 돌판을 넣어 두기 위함이었다(왕상 8:9; 대하 5:10). 하나님 임재의 장소는 곧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위에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를 지킬 때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상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교회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 안에 계시는 지를 무엇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까?

제사문헌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해 나간다. 하나님의 존재의 유무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 기적의 구원사건을 통해서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홍해(갈대바다, 얌숩)에서의 구원사건이다. 야훼는 기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런데 이런 야훼의 나타남을 ‘야훼의 영광’(케보드 아도나이)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줄곧 말한다(출 14:4,17,18; 15:6,11). ‘야훼의 영광’이 있는 곳이 곧 야훼가 계신 곳인데, 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곧 ‘구름’이다(출 16:10; 19:9; 24:16; 34:5; 40:34-38). 이스라엘의 광야여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둔 ‘법궤’를 앞세워 진행했다면, 그 ‘법궤’는 오직 ‘구름따라’ 진행 한 것이었다(40:35이하). 하나님이 그의 집 ‘성막’안으로 들어오시게 된 직접적인 묘사가 바로 출애굽기 마지막인 40장34절 이하이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회막이 봉헌된 이후, ‘구름’이 ‘회막’을 덮음으로 ‘야훼의 영광’이 바로 그 안에 가득차게 되었다. 이로써 야훼가 성막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책인 레위기의 시작은 “야훼가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셨다”(레 1:1)고 말함으로써 야훼가 어디에 계시는 지, ‘야훼 임재 장소의 신학’을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막’은 ‘만남의 장막’이며, 야훼를 만나는 장소다. 그렇다면 이제 야훼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를 다루는 것이 곧 레위기의 내용이다. 제물을 갖고 야훼를 만나러 나가는 것이며, 여러 제의를 통해 그를 만난다. 그러기 위해서 정결한 제물을 가져가야 할 것과, 야훼를 만나러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결한 삶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 곧 레위기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야훼가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법궤가 안치된 ‘성막/회막’,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구름’으로 나타낸 그 첫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 오경의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것은, 야훼의 임재, 그의 영광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을 ‘구름’으로 연결짓고 있는 사건이 곧 ‘만나 이야기’이다(출 16:7이하):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7절)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10절)


2.4. 하나님이 계시는 곳=더불어 사는 공동체

‘만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으로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만나’는 ‘하늘의 양식’이요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총’으로만 알기 쉽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성서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만나’ 이야기의 본래 핵심이 빠진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이제 만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현 정경의 모습이 보여주는 광야 유랑기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이(많은 혼혈족[에레브]들도 함께! 출 12:38) 에집트에서 탈출한 지 두 달하고 보름이 지난 때였다(16:1). 그들이 얼마만큼의 양식을 갖고 에집트를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이 데리고 나온 집짐승들을 잡아먹었는지, 아니면 누룩을 넣지 않은 빵 반죽만으로 끼니를 대신했는지(12:38-39)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에집트를 급하게 빠져 나오느라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12:39). 또 가나안 땅까지 무려 40년이나 걸릴 것이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현 성서의 정경의 형태로 보면, 13장에 가서야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가는 길을 돌려(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홍해(갈대바다-얌숩)로 가게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13:17-18).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바다’에서의 구원의 기적 사건을 경험 한 후(14장), 구원의 기쁨도 잠시 물 없는 사흘 길의 광야를 지나 ‘마라’에 이르러 쓴 물 맛으로 인해 ‘불평’하고, 단 물이 되는 기적을 경험한다(15:22-26). 그 뒤에 신 광야에 도착해 굶주림으로 인해 또 다시 ‘불평’하는 내용이 ‘만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16장의 시작이다. 여하튼 두 달 반이 지나자 이스라엘 백성에겐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을 지경까지 갔고, 이스라엘 온 회중(콜-에다트 브네-이스라엘)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룬)한다(16:2).

이스라엘 광야 유랑기의 핵심 주제를 흔히 ‘불평주제’(murmuring motif)라고 부른다. 광야 생활 중 곤경에 처할 때마다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서 그렇다. ‘갈대바다’ 앞에서 뒤를 쫒는 바로의 군대로 인해 두려워 할 때 그랬고(14:11-12), 마실 물이 너무 써서(마라) 그랬고(15:22-26), 물이 없을 때는 ‘불평’을 넘어 대들기(리브>므리바)도 하고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했다(17:1-7).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민 13장)에,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불평’(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국 하나님은 저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까지 말한다(민 14:26-35). 그런데 이상의 ‘불평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시험’(pi. 낫사)이라는 것이다. 갈대바다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룬)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시험’(낫사) 했다는 말도 없다. 그런데 ‘마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도’(호크)와 ‘율례’(미쉬파트)를 정하시고 “거기서 그들을 시험하셨다”(붸샴 닛샤우)고 밝히고 있다(출 15:25). 그러나 그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되었던 ‘므리바’에서의 기적 사건에서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야훼를 ‘시험’한 것으로 나온다(17:2b,“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 마 테낫순 에트-아도나이). 그들의 ‘시험’ 내용은 “야훼가 우리 중에 계시는 지 그렇지 않은 지”(하에쉬 아도나이 베키르베누 임-아인)였다. 야훼를 ‘시험’(낫사)했다고 하여 이 장소의 이름은 ‘맛사’라고 불리게 된다(17:7). 가나안 땅 정탐 후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결국 ‘불평’과 ‘시험’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 취소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민 14:22-23). 모압 평지에 이르러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 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라”고 권고한다(신 6:16-17).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 준 교훈이 바로 이스라엘 광야 유랑기에 나타난 ‘불평’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라는 셈이다. 이것이 광야 유랑기에 얽힌 현 오경의 구성이다. 그런데 ‘불평’과 ‘시험’의 이야기인 ‘마라’ 이야기(15장), ‘만나’ 이야기(16장) 그리고 ‘맛사’ 이야기(17장)를 연속적으로 배열하고 있는 현 정경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도 시내산 도착(출 19장) 이전에 말이다. 현 오경의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법률과 율례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으로 나온다(출 19장-민 10:10).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한 것이 출애굽기 19장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 이미 광야에서 ‘법도’와 ‘율례’를 주었다고 보도하는(출 15장-‘마라’ 이야기) 현 정경의 순서는 무슨 뜻일까? 또한 출애굽기 16장 ‘만나’ 이야기는 아직 ‘증거판’이 마련되기 전 임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그 증거판’(하에두트) 앞에 두라고 말하고 있다(16:33-34). 이런 본문들 때문에, 학계에서는 현 본문들은 별도의 이야기 단편들이었던 것이 후대에 편집되어 현 자리에 끼어 맞추어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왜 이 자리일까?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법률’과 ‘율례’를 주었고, 이미 ‘증거판’이 마련되어 있는 ‘마라’와 ‘만나’의 이야기를 출애굽기 19장 이전으로 옮겨 놓은 그 의도는 무엇일까? 지금 최종형태 성서본문이 보여주는 그 구성의 의미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라’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법률’과 ‘율례’를 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시험의 내용도 준수해야 할 법 조항들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 성서의 모습 그대로를 읽는 독자가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을 때,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만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 속에 조금 전 읽었던 ‘마라’에서의 상황과 동일한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스라엘이 ‘불평’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시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만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만나’는 배고파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을 거저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아니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 하는 지 안 하는 지가 바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만나’의 규칙,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 ‘시험’의 내용은 ‘각자 먹을 만큼씩 거두라’는 것이다(16:4,16,21,22).

당시의 상황을 한 번 그려보자. 광야에 내몰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앞으로 얼마나 더 굶게 될 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이 비처럼 내린다는 것이다. 누구나 광야로 나가면 지천에 깔린 양식을 보게 될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주워 오기만 되는 상황이었다. 언제 또 양식이 떨어져 광야에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가능한 많이 주워오려는 게 모두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남 보다 더 빨리 광야에 나가려 했을 테이고, 남 보다 더 많이 가져다 자신들의 장막 안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려 했음에 틀림없다. ‘선착순’의 논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 지 아닌 지 ‘시험’의 장이 열렸다.

‘시험’ 문제는 이렇다: 1)하루치의 양식만을 가져올 것, 2)누구나 똑같이 각자 먹을 만큼만(한 오멜=약 2리터 정도) 취할 것, 3)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 것 등이다.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이보다 더 힘든 ‘시험’이 있을까?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은 이들이 생겨났고,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자들이 생겨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더 많이 가져와 다음 날까지 남겨 놓은 양식은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아무도 먹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16:20). 하나님의 명령은 또한 ‘장막에 있는 사람 수 만큼을 취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16:16). 광야로 나간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먹을 만큼인 한 오멜만을 취한 게 아니라, 광야로 나올 수 없었던 이들의 몫까지도 챙겨 와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과 함께 주신 ‘법’과 ‘율례’의 근본은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남보다 더 힘이 있는 자에게, 광야에 먼저 나간 자에게 더 많은 양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힘이 없는 자, 몸이 불편하여 광야에 남보다 더 일찍 못 나가는 자, 선착순에서 늦는 자들, 아니 아예 그 자리에 참여 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서의 주된 관심은 선착순의 논리와 구조에서 뒤쳐진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다는 데 있다. 구약성서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회의 약자들이었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 대한 하나님은 관심은 곧 율법으로 정해졌다. 신명기 24장에 보면 혹 누군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나 포도원에서 수확 할 때에 몇을 빼먹고 수확하지 않고 돌아왔거든 그것을 다시 가지러 나가지 말라고 나온다. 이는 가지지 못한 자들, 사회 기득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 사회의 선착순에서 뒤쳐진 자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상이 ‘만나’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만나’ 이야기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것 둘이 더 있다. 그것은 ‘만나’ 이야기를 끝맺으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하나는 각 사람이 취하는 하루치 양식의 한 오멜의 ‘만나’를 ‘야훼 앞’(리프네 아도나이)에, ‘증거판’ 앞에 놓아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대대로 간직하고 기억하게 했다는 내용이다(16:33-34).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는 맺음말이다(16:35).

첫 번째 ‘증거판’과 관련해서 고려해야할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이 있다. 하나는 ‘만나’가 주는 교훈이 너무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만나’를 대충 어느 정도 가져다 간직한 게 아니다. 한 오멜의 ‘만나’다! 누구나 똑 같이 나누어 먹어야 했던 바로 그 ‘한 오멜’이다. 더불어 살기의 영원한 교훈을 하나님 앞에 두고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법궤 안에 모시는 ‘증거판’ 앞에 ‘만나’를 둔 다는 의미는, 모든 율법의 기본 정신이 곧 ‘만나’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의 근본은 곧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앞에서 잠시 문제제기를 했지만, ‘증거판’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기록한 판이었고, 이는 법궤 안에 모셔두게 된 것이다(출 25장). 그런데 이 ‘증거판’이 아직 만들어 지기 전, 시내산 도착 이전인 광야에서 이미 ‘만나’ 이야기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 정경의 순서가 보여주는 것이다. 곧 모든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지기 전, 먼저 ‘만나’의 사건을 미리 언급함으로써 ‘만나’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 규칙, 그 ‘시험’의 내용이 곧 모든 율법 보다 선행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은 ‘만나’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광야생활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는 맺음말(출 16:35; 참고, 수 5:10f)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광야 생활에서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살게 됐다는 얘기만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남을 생각하지 않을 상황, 오직 자신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시험’을 늘 마주대하며 살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만나’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만 후’의 아람어이다. 그 뜻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전 처음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한 말이고(16:15), 거기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가리켜 ‘만’(무엇?)이라고 불렀다(16:31). ‘만나’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착순’의 지배 논리가 팽배한 경재사회에서는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먼저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이들에게 “각자 먹을 만큼만!”, 뒤쳐진 사람들을 위하여 취하고 함께 더불어 나누고 살라는 ‘만나’가 주는 성서의 말씀을 오늘 무한 경쟁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이것이 무엇인가?”고 의아해 할 지도 모른다.

‘만나’가 주는 교훈은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 것인지’의 시험 앞에 매일 결단케 하려는 것이다. ‘만나’는 먹는 양식 이 전에, 어떻게 취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시험이다. 그리고 ‘만나’와 함께 걸어간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은,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의 약속의 나라에 이르기 까지 “한 사람이 열 걸음 먼저 가기 보다는 열 사람이 함께 한 걸음을 걷도록” 이끄시는 여정이다.

‘만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이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의 사건이다. 한 오멜의 양식, 모두 각자 하루치의 양식만을 가져와야만 했으며, 광야에 나가지 못하는 병든자와 노약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요, 시험이었다. 그리고 이 한 오멜의 만나는 항아리에 담겨 증거궤 앞에 놓아두게 하였다. 광야에서의 만나의 사건을 통해 야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하나님 임재신학의 시작은, 더불어 사는 나눔의 공동체의 실현에 있다.


성전(교회)의 존재의 유무는 하나님의 임재의 유무와 관련 있고, 이는 오늘 교회가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살아가느냐의 실천 유무에 있는 것이다.



2007-12-14 09: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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