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논문]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박경철
  

박경철,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선교신학 17집, 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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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1)


박경철(한신대학교 신학과 조교수)


I. 들어가면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중 하나는 기독교 ‘복음전파’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전하려는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며, 그 방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따른 다양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그 둘의 문제를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이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2)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이에 대한 세계교회와 그동안의 여러 신학적 논의들3)을 재 소개하거나 그에 대한 새로운 성서신학적 논의들을 제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선교’라는 개념 안에 들어있는 기독교국(민족/문화)과 비기독교국(민족/문화)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문제와 논의를 위한 성서적 근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구약성서의 이사야서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서신학의 최근 새로운 해석학적 방법(최종형태 구성비평)에 따라 이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고자 한다.4)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신학’이 담아야 할 내용과 방법론상의 다양한 문제들과 논의들이 ‘선교신학’의 분야에서 활발히 다루어 질 수 있기를 바란다.


II. 선교의 대상-이스라엘


‘선교’가 목적하는 내용과 방법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거론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 때, ‘선교’의 대상은 우선 비기독교국(민족/문화)이라고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선교’의 내용이 담는 거대담론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담당해야 할 그 주체, 곧 ‘선교지’로 떠나는 이들이 우선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선교’가 말하는 그 내용과 방법에 이르기까지 보다 새로운 논의들이 이루어 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 하나를 거론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위 이사야서 본문은 기독교인들의 귀에 익숙한 성서구절이다. 특히 신학생으로, 목회자로, 선교사로, 아니 선교적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어느 누구에게도 열려 있는 너무도 익숙한 결단의 고백문이다. 하나님(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골 골짝 빈들에라도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귓가에 들리는 성경구절이며, 입가에 맴도는 요절이다. 그런데 성서가 과연 그런가? 바로 그 다음절만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성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파송하는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완 정반대다! 회개는 고사하고 아예 그 가능성(보고, 듣고 깨닫는)까지 일절 차단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러 교회 밖을 나서라는 게 아니라,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없애라는 것이다. 혹이라도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접하지나 않을까, 아예 성경을 불태워 없애고, 부흥집회와 불신자 초청집회등의 모든 복음전파의 기회를 일절 그만두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선교적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이들의 소명의 결단을 위한 성서구절이며 요절이 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성서를 골라 읽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은혜로운 요절일지라도 성서본문이 그 전체 맥락에서 본래 의도하려는 것과 달리, 한 부분만 따로 떼어내어 인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성서읽기와 주석 및 해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금기시 되어야 한다. 독자가 어느 책을 읽고 그 책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대전제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독자가 책의 이곳, 저곳을 임의로 선택해서 읽어가는 것이 아니라, 책의 지금의 형태 그대로, 그 순서대로 읽어가는 것을 말한다.5) 어떤 성서 본문일지라도 그것을 독립적이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 본문을 그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게 될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어느 한 단락의 문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각 책, 그 전체를 의미하며, 이는 성서 각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의 순서대로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현재의 성서(최종형태) 각 책은 분명한 의도로 잘 짜여진 구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최근 성서학의 한 동향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구성비평 작업이다.6)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은 비록 성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 수집, 편집등 여러 단계들을 걸쳤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렇다고 현 성서의 본문을 그러한 역사적 제단계들로 구분하고 추려 내거나 갈라내지 않는다. 지금의 모습, 그 최종형태를 읽어 내려가는 방법이다. 이 때, 최종형태의 구성에 대한 관심은 바로 본문의 현 위치, 그 자리매김을 전체의 구도 안에서 조명한다는 말이다. 본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의 현 ‘책의 자리’(Sitz im Buch)의 의미를 규명하는 일이다.

다시 돌아가 묻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상과 같은 이른바 “완고한 신탁”(Verstockungsauftrag)7)을 내리신 것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하여 한 두절만 골라 읽어서는 안 된다면, 이사야서 어디까지 더 읽어야 하는가? B. Duhm8) 이래로 이른바 제1(Proto-), 제2(Deutro-), 제3이사야(Tritojesaja)로 나누어 연구되어온 이사야서에 대한 지난날의 역사비평연구의 결과를 통해서는 위의 질문은 풀리지 않는다.9) 즉, 사 6장을 ‘제1이사야’(Protojesaja)인 사 1-39장안에서는 해결되지 못한다는 점이다.10) 무엇보다도 제1이사야 안에는 이에 대한 해명 및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귀가 멀어 듣지 못하는’ 그 대상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 제2이사야 안에 자주 등장한다는 점(42:18ff; 43:8; 48:8 etc.)이다. 이는 사 6장을 최소한 제2이사야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11)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사 6장의 ‘완고한 신탁’ 본문만을 떼어내 이사야 전체와의 관련성을 묻기 전에, ‘완고한 신탁’ 본문이 들어 있는 사 6장을 독립된 한 장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른바 이사야 ‘비망록’(Denkschrift)이라 불리는 사 6:1-8:18 안에서 함께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완고한 신탁’ 본문이 사 6장 안에서 또 어떤 주제들과 함께 연관 되어 있는 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예언자 이사야의 ‘성전소명기사’12)이기도 한 사 6장에 나타난 성전에 대한 이미지(신학)가 이사야서 전체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지를 묻는 것이다. 또한 사 6장의 마지막(V.13)에 나타난 ‘그루터기’(맛체바), ‘거룩한 씨’(쩨라 코데쉬)가 갖고 있는 이사야의 ‘남은자 사상’13)이라는 주제 또한 이사야서 전체 신학과도 함께 관련지어야 한다.


1.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사 6장의 ‘책의 자리’(Sitz im Buch)


사 6장만을 읽는 독자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고 물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읽어오는 독자라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결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완고한 신탁문’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불가성이란 ‘듣지 못함’과 ‘보지 못함’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V.9.10) 쓰인 ‘듣다/보다’(샤마아/라아), ‘깨닫다/알다’(빈/야다)라는 개념은 사 6장에 와서야 비로소 언급된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이 핵심 개념들은 이사야서 가장 처음에 범죄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은 ‘듣고’(샤마아, imp), 소도 주인을 ‘안다’(야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의 주인인 야훼를 ‘알지 못하고’(로 야다), ‘깨닫지 못한다’(로 히트보난)(1:2-3).14) 특히 위에서 보았던 사 5장의 ‘화로다’(호이)로 시작되는 심판의 단락 이끔말인 ‘호이’가 이미 이사야서 처음부터 범죄한 이스라엘을 지목하며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슬프다(호이)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1:4a)


아울러 야훼의 심판의 날(“그 날에”, 바욤 하후)은 사 6장 이전에 이미 줄 곳 언급되고 있다(2:11,17,20; 3:7,18; 4:1; 5:30). 야훼는 이미 자기(야훼)를 버린(아쯔부, 1:4)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야곱의 집)을 ‘버리/떠나셨다’(나따쉬타, pf.)고도 말한다(2:6a). 그러나 야훼의 심판은 끝이 아니다. 사 6장 끝에서(V.13b) ‘거룩한 씨’(쩨라 코데쉬)를 ‘남는다’는 말과 같이 심판을 면한 구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 또한 사 6장 이전에 이미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읽는 독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 1:9을 통해, 이 책이 야훼의 심판 이후에, 심판을 면한 ‘남겨진’(야타르, hi.) 이들을 통해 쓰여졌고 읽혀지도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5) ‘남겨진’ 이들이 구원의 날(‘그 날에’, 바욤 하후)에 ‘거룩하다’(까도쉬)고 일컬어 질 것도 이미 사 6장 이전에 언급된 것이다(4:3). ‘완고한 신탁’을 받기 전, 예언자 자신의 ‘악’(아온)과 ‘죄’(핫따트)가 씻김을 받는 정화의 주제(6:5-7) 역시, 사 6장 이전에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회복의 예언 안에서 그들의 ‘죄’(핫따, 1:4,18,28; 3:9)와 ‘악’(아온, 1:4; 5:18)이 씻기우는 것과 관련된다(1:18,25; 4:4).

이상과 같이, 현 이사야서 최종형태의 모습은, 사 6:9-10의 ‘완고한 신탁’이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런 야훼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이미 범죄한(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은 정해진 것이며, 심판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이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야훼의 신탁에 대해 예언자가 반문하지 않고, 심판의 기한에 대해 묻는 “야훼여 어느때까지 이니이까?”(V.11a)라는 물음과 야훼의 답변(V.11b-12)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야훼의 답변, 곧 심판이 끝나는 때에 대한 그의 답변을 통해 보면, 사 6장이 이사야서 전체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사 6장은 이른바 이사야 ‘비망록’(Denkshcrift)16)이라 불리는 사 6:1-8:18(9:6)의 첫 장이다. ‘비망록’은 현 이사야서 최종형태의 구성상, 그 앞에 ‘포도원의 노래’(Weinberglied)라 불리는 사 5장(5:1-7)과, 뒤에는 메시야에 대한 희망과 구원에 대한 표상을 지니고 있는 사 9-10장으로 아래와 같은 ‘교차대구’(chiasmus)로 둘러 쌓여 있다. 그 구조적 모습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 5장의 ‘포도원의 노래’ 안에 있는 6개(5:8,11,18,20,21,22)의 ‘화로다’(호이) 단어가 10:1에 다시 나와서 사 5-10장의 앞, 뒤를 둘러싸고, 그 안에 야훼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인, (야훼가 자기의) ‘손을 펼치심’(야도 네투야, 5:25-29; 9:7-20)이, 그리고 그 사이에 심판의 결과로써의 모습인 ‘흑암’(호쉐크/하쉐카, 5:30; 8:22) 주제가 나오고, 중앙에 ‘비망록’ 본문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를 표로 나타내 보이면 다음과 같다17):


A ‘화로다’(5:8-24)

  B ‘손을 펼치심’(5:25-29)

    C ‘흑암’/‘어둠’(5:30)

      D ‘비망록’(6:1-8:18)

    C' '‘흑암’/‘어둠’(8:22)

  B' ‘손을 펼치심’(9:7-20)

A' ‘화로다’(10:1-4)


위와 같은 구성에서 보면, 사 6장 안에 들어 있는 ‘완고한 신탁’의 내용은 이미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선교의 주체인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이유와 목적


앞서 업급했듯이 이사야서 그 처음은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과 심판으로 시작한다(사 1:2이하). 문제는 이스라엘의 범죄의 내용과 그에 따른 심판의 내용은 무엇이며, 아울러 심판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자의 비난의 어조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종교(제의)적 행위들을 금하라는 명령에서 강하게 나타난다(1:11-14). 모든 제물을 받치는 행위(V.11)와 함께 종교적 모든 집회까지도 금한다(V.13f.). 과연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제의자체를 금하는 것인가? 사 1:13에는 ‘초하루’와 ‘안식일’ 집회를 금하라고 말하지만, 이사야서 가장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모든 생명체’(콜-바사르)가 매 ‘초하루’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것임을 말한다(66:23). 이는 이사야서 전체는 이스라엘의 제의 그 자체를 비난하고 그 무용성을 말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자의 제의 비난의 중심은 기도하는 자의 손에 ‘피’가 묻어 있다(1:15)는 지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곧 제의자(이스라엘)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이스라엘의 제의적 행위가 사회적 정의와 윤리적 실천행위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18)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사회적 악행을 금지하는 일이 곧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변호하고 변론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여기는 무엇보다도 법적인 문제가 들어있다. 사회 지도층계급의 불의와 악행은 이들이 뇌물을 좋아하고 보수를 계산하며 사회 약자들의 법적 하소연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지적한다(V.23).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고 하고,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은 자들을 향해 야훼의 심판이 선언된다(5:23). 사회약자들을 위한 일반의 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법적소송절차에서의 불법과 불의를 지적하고 있는 장면은 이사야서내에 계속 반복된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10:1-2)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59:3-4)


이사야 59장에 나오는 ‘너희 손’, ‘너의 손가락’, ‘너의 입술’은 재판정에서의 거짓증언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심판자로 오시는 야훼의 모습을 예언자는 야훼가 공의로운 재판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시는 이로 그린다(3:13f.) 야훼의 판결의 내용은 사회지도층들이 불법과 불의로 가나한 자들의 것을 착취한 것을 지적한다(V.14f.; 5:8).

이스라엘의 사회적 불의의 문제에 대한 예언자의 비난과 그에 대한 심판은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기우는 것이다. 주홍빛 같은 죄를 흰 양털 같이 깨끗하게 하실 것(1:18)이다. 죄의 모습이 사회적 불의였다면, 죄의 정화는 곧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1:27). 정의를 세우는 일이 곧 심판의 이유이며, 나아가 구원의 회복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의 회복과 구원의 목적이 열방들의 순례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표상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이다. 아래에서는 이 관계에 대하여, 곧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를 이사야서 어떻게 그리고 있는 지를 살폅보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의 내용과 그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사야서를 통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성서적 가르침이 될 것이다.


III.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


1. ‘열방의 빛’으로서의 이스라엘


‘선교’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국가/민족)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이방(열방)에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선 그의 백성(종)을 선택하고 부르신다는 사상은 이사야서 전체에 매우 중요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종의 노래’(Gottesknechtslieder)19)라 불리는 이사야서 본문들과 ‘열방 선교’를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신는 이사야서의 본문들을 통해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이사야서 42장과 49장의 ‘종의 노래’에는 하나님이 그의 종을 선택한 중요 이유와 목적을 ‘백성의 계약’(베리트 암)으로 ‘열방(민족)의 빛’(오르 고임)이 되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V.7). ‘종의 노래’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사에 나타난 논의의 중심은 항상 이것이 제2이사야(사 40-55장)와 어떤 관련을 맺는가 하는 것이었다.20)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야훼가 누구를 불렀으며, 부름을 받은 자가 누구에게 가서 자신의 소명을 행사할지, 그리고 그가 받은 소명이란 무엇인지21)의 문제는 여전히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열방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그의 종을 부르시는 ‘종의 노래’ 안에 있는 야훼의 종이 ‘백성의(을 위한) 계약’(42:6; 49:8b)으로, 그리고 ‘열방들의 빛’(42:6; 49:6b)22)이 된다는 언급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사 42장과 49장은 이상의 평행구 뿐 아니라, 야훼의 종이 해방자로서의 소명을 부여받는 것으로도 평행을 이루고 있다(42:7; 49:9, cf. 61:1f.).23)

야훼의 종은 누구인가? 그는 누구를 위해 ‘백성의 계약’으로 ‘열방들의 빛’으로 부름을 받았는가? 여기 ‘백성’은 이스라엘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온 인류를 의미하는가?24) 이상의 근본적인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종의 노래에 대한 연구사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사 40-55장안에 쓰인 ‘종’(에베드)은 자주 이스라엘로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종’은 결코 이스라엘과 떼어내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25) 실제, 사 49:5.6a에서 ‘종’은 이스라엘을 위해 소명을 받으면서도, 3절에서 종은 이스라엘이라고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6) 문제는 사 42:5-9이 그 앞에 있는 1-4절과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인지 논쟁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27) 즉, 6절의 익명의 부름을 받은 자가 1절의 종과 동일인인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정경으로서 현 본문이 보여주는 최종형태의 면에서 1절 이하의 야훼의 종과 6절의 익명의 부름 받은 자를 서로 달리 볼 이유가 없다.28) 왜냐하면 현 본문의 최종형태가 보여주는 것에서, ‘열방(민족)들’(고임)에게 ‘공의’(미쉬파트)를 베풀기 위해(V.1.3.4) 선택받은 종(V.1)과 ‘열방들의 빛’으로서 정의(쩨데카) 가운데 야훼가 부른 이(‘너’ 2m.sg. V.6)는 서로 다르지 않다. 또한 야훼의 보호하심을 의미하는 것(V.6)으로 쓰인 1절의 야훼의 종을 ‘붙들다’(타마크)와, 6절의 부르심을 받은 이를 ‘붙잡다’(하자크)라는 표현은 이 둘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야훼의 종을 ‘백성의 계약’과 ‘열방의 빛’으로 표현하고 있는 42:6f.와 49:3-9은 이 둘의 긴밀한 관련을 보여준다. 결국 42:6f.의 야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익명의 이는 앞 1절에 언급된 야훼의 종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부여받은 종의 사명을 통해 볼 때, 이는 종이 한 개인(individuell)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집단(kollektiv)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겨진다.29) 결국 이사야서 전체 맥락으로 보면 부르심을 받은 이는 야훼의 종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기도 하다(42:18-25, 특히 V.19-20, cf. 6:10; 35:5f.; 48:8).30)

이제 ‘백성’(암)과 ‘계약’(베리트)개념 사이의 관련문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구약성서에서 ‘베리트’란 개념31)은 항상 이스라엘에게만 관련되는 것임을 받아들인다면32), 여기서의 ‘백성’(암)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와의 관련성 여부는 ‘백성의 계약’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야훼의 종이 ‘열방들의 빛’이라는 언급이다. 그렇다면 야훼의 종인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계약’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크뤼제만(F.Crusemann)은 “이스라엘중 하나가 종이 되는 것 자체가 바로 이 백성을 위해 베리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그 종안에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하나님의 계약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화육)(verkorpert)”33)이라고 본다. 야훼의 종은 바로 이 베리트를 “인격화(personifiziert)”34)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자신 안에 계약이 구체화 되어 나타났다는 이러한 사상은 이사야서의 베리트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은 ‘백성의 계약’(42:6; 49:8b)과 ‘열방들의 빛’(42:6; 49:6)이 서로 쌍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계약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열방들의 빛’이 되는 것은 어떤 신학적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계약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체화되어 나타남으로써 이제 이스라엘은 열방들의 구원, 나아가 열방들의 시온순례를 위해 빛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열방들의 구원을 위해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임과 동시에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제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행해야 할 의무(Selbstverpflichtung)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루어 보자.

우선 42:7과 49:9에서 빛은 흑암 가운데 처한 자들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길 안내자’(Wegfuhrer)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 흑암에 처한 자들은 이스라엘인가 아니면 열방들인가? ‘이끌어내다’라는 용어 때문에 본문에서 포로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다는 출애굽 모티브35)를 생각할 수도 있다(cf. 42:22; 43:14).36) 그러나 사 49:6은 분명하게 야훼의 종의 사명이 단지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열방들 나아가 온 인류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cf. 암 9:7). 이런 표상은 사 11장에서도 나타난다. 16절 출애굽 모티브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의 표상은 10절 열방들을 위한 구원선포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cf. 사 19:23-25). 사 42:9에서는 이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한다(cf. 사 46:10; 43:19).37) 흑암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모티브는 야훼의 종이 이제 야훼의 구원의 행위를 중개하고 나아가 이를 위임하는 것임을 의미한다.38) 야훼의 구원사역은 이제 그의 계약의 구체화 된 모습(Verkorperung)으로 드러난다. 계약의 구체화된 모습으로서의 야훼의 종, 나아가 이스라엘은 결국 열방들의 구원을 위한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빛을 통해 열방들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들게 되는 것은, 곧 열방들을 위한 이스라엘의 빛이 온 세계의 구원(49:6b), 나아가 열방들의 시온 순례(60:1ff.)를 위한 하나의 신호(Signal)이며 표시(Zeichen)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열방들의 순례의 표상은 온 인류의 종말론적 구원의 이상이기도 하다(cf. 이는 이사야서 전체 마지막 결구이기도 하다 66:23). 이는 온 인류가 오직 야훼만을 섬기게 되는 모습이다.(cf. 43:8-13; 45:22-24).39)

열방들 나아가 온 인류와의 관련은 사 42장 야훼의 종의 사명에 이미 들어있다. 야훼의 종은 온 땅에 공의(42:1.3.4)와, 토라(V.4) 그리고 정의(V.6)와 야훼의 영광(V.8.12)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온 땅의 구원에 대한 야훼의 관심은 야훼가 온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V.5).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V.10-12; cf. 43:20f.). 온 세계를 향한 구원의 이 표상은 창 9장 노아계약에서 보았던 온 창조세계 보존에 대한 야훼의 관심과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온 세계의 구원(49:6)과 열방들의 순례(49:22)에 대한 야훼의 관심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오직 야훼신앙(Alleinverehrung)으로 나타난다(cf. 43:6f.; V.8-13; 45:20-24 등등). 온 인류의 구원에 대한 야훼의 관심은 하나님이 온 세계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결국 야훼의 종(이스라엘)은 이러한 세계 구원의 목적을 위해 야훼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계약의 구체적 모습으로 나타난 야훼의 종은 곧 열방들의 구원을 위한 목적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야훼의 종)은 열방들의 구원을 위한 중개자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야훼의 계약이 야훼의 종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남을 통해 이스라엘이 열방들을 위한 구원의 빛이 되었다는 것이 열방들이 이 계약의 범주 안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열방들의 구원은 열방들에게 계약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계약이 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말도 아니다.40) 다른 한편, 계약의 구체화로 드러난 이스라엘은 이제 열방들의 구원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가 된 것이다. 야훼의 종의 노래에 대한 숱한 연구들이 있어 왔음에도 열방들의 구원을 위해 ‘우선’ 이스라엘이 빛이 되어야 한다는 이 전제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되지 못했다는 것은 의외다.

사실 이사야서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선포와 함께 ‘빛’ 모티브는 자주 등장한다.41)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을 위한 ‘빛’ 모티브는 이사야서 전체 구성에 매우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회복으로써의 빛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들의 구원에까지 미친다. 열방들의 구원을 위해 우선 이스라엘 스스로가 빛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 51:4f.는 야훼의 정의가 열방들을 위한 빛이 된다고 한다. 이사야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야훼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곳은 시온, 예루살렘이다(cf. 1:27). 사 58장에서는 빛 모티브와 함께(V.8.10) 구원의 조건으로써 이스라엘의 정의와 윤리의 문제가 거론되고, 그 뒤 59장에서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정의, 빛 그리고 구원의 주제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60:1f.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의 빛42)이 열방들의 구원과 순례(특히 V.3)를 위한 전제가 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열방들의 시온순례를 위한 이스라엘의 이 빛은 곧 시온에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야훼가 예루살렘(이스라엘)에 감독자로 평화를 그리고 지배자로 정의를 세우기 때문이다.(V.17b). 그렇기 때문에 야훼는 스스로 예루살렘(이스라엘)을 위해 영원한 빛이 되신다(V.19bf.). 사 62:1f.는 더 분명하게 시온에 정의가 실현된 다음에 비로소 열방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cf. 시 98:2). 정의, 야훼의 종 그리고 이스라엘의 관련은 사 54:17b에도 그려지고 있다43).

V.17a는 사 2:4; 11:9a에서 보는 것처럼, 무기를 든 적대자가 없는 (시온/예루사렘 안에)44) 평화의 상(象)을 보여준다. V.17b는 이 (시온에서의) 평화의 이상(Friedensvision)이 곧 ‘야훼의 종들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 19:25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 받은 다른 열방들45)과 구별해서 ‘야훼의 유산’(cf. 47:6; 63:17)으로 나온다. 54:17에 따르면 시온/예루살렘에서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야훼의 종(이스라엘)의 정의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사실 V.13f.에서 평화와 정의의 관련이 이미 언급된 것이다. 이 이스라엘의 정의는 야훼가 준 것이다. 이사야서 전체 맥락에서 야훼가 준 이스라엘의 정의가 세계평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온다.

열방들의 구원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는 야훼의 종의 모습은 네 번째 ‘야훼의 종의 노래’(52:13-53:12)에 나오는 고통 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비록 이 노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고난당하는 종이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인지의 문제가 근본적인 논쟁의 대상46)이 되고 있긴 하지만, 본문 메시지의 중요 핵심은 야훼의 종의 고난의 목적은 곧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4번째 ‘종의 노래’의 통일성의 문제에 대한 숱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야훼의 종을 통해 구원이 온다는 점은 종의 노래의 첫 부분47)과 언어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열방들과의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도 서로 잘 연결되어있다. 네 번째 종의 노래 그 첫 부분(52:14f.-53:1f.)은 언어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야훼의 종은 분명하게 열방들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52:15). 사 53:11은 야훼의 의로운 종이 ‘많은 사람’(cf. 52:15a: ‘많은 열방들’)을 ‘정의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 42장과 49장의 야훼의 종이 위임받은 그의 사명과 일치하는 것이다. 52:13에서 미래에 야훼의 종이 높임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은 사 2:2f.에 열방들이 시온으로 몰려드는 종말론적 표상 가운데 하나로 구원의 신호로 언급된 모든 언덕들 보다 높임을 받게 되는 시온에 대한 구원의 표상과 상응하는 것이다. ‘높임을 받는다’, 또는 ‘높아진다’라는 표현은 열방들의 구원의 표시가 되는 ‘깃발’ 역시 이사야서에서 열방들의 시온순례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표시이기도 하다(5:26; 11:10.12; 18:3; 49:22; 62:10).

야훼의 종의 고난을 통해 열방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심판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열방들 나아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40:5; 41:20; 45:14f.; 49:26; 52:10; 59:19; 61:a; 62:2.11f.; 66:18f.). 그로인해 열방들과 온 피조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42:10f.; 43:20; 49:13; 54:5b; 55:5b; 66:23). 그 결과로 이스라엘의 속량주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야훼는 온 땅의 하나님으로 불려진다(54:6b). 결국 하나님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곧 이사야서 전체에서 열방들과도 역시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야훼의 종)이 열방들의 구원을 위해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훼의 종(이스라엘)이 ‘백성의 계약’으로, ‘열방의 빛’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이사야서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열방들의 구원을 위해 먼저 정의와 평화가 열방들이 몰려올 시온(예루살렘/이스라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정의 실천이 곧 열방구원의 중개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전체 이사야서의 서론격인 사 1-2장의 구성은 시온/예루살렘의 죄악이 씻겨지고 다시 정의와 공의로 회복(1:26f.)이 된 다음에, 비로소 열방들이 시온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순서를 보여주고 있다(2:2f.). 이 순서를 이사야서 전체 현 최종형태의 구성이 보여주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현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의 구성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이사야서 전체 현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공시적 연구가 최근 이사야서 연구 경향이기도 하다. 열방들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정의 실천이라는 구도가 곧 이사야서 전체 구성의 신학적 의도이다. 이 구도가 ‘백성의 계약’으로 ‘열방들의 빛’으로 부름 받은 야훼의 종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결론인 셈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동안 야훼의 종에 대한 숱한 논의들이 현 최종형태로서의 이사야서 전체 구성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약점과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연구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서 전체에서 ‘하늘과 땅’48)을 야훼와 관련시키고 있는 본문들이 전하는 것은 야훼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이다(37:16; 42:5; 44:24: 45:8.12.18; 51:13.16). 창조주 야훼는 ‘하늘과 땅’에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44:23; 45:8; 48:13; 49:13), ‘하늘과 땅’은 이스라엘의 죄를 입증하는 증언자로 등장하기도 한다(1:2f.). 야훼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 언급되기도 한다(63:15.19b). ‘하늘과 땅’ 두 단어가 쌍을 이루어 전체 이사야서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타난다는 점은(사 1:2; 66:1) 이사야서 전체 구성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사 1장과 66장은 각각 처음에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그 마지막도 동일한 단어와 주제를 갖고 있다: 사 1장에서 시온의 회복 이후, 야훼의 ‘적대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데, 이것이 66장 마지막에 동일하게 나타난다(1:28; 66:24). 그런데 ‘하늘과 땅’이 야훼와 관련되어 새로운 신학적 주제를 보여주는 곳은 이사야서 결론부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이미지로서의 ‘하늘과 땅’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지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 65:17a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루살렘’(V.18f.)과 야훼의 구원을 기뻐하는(참고, 사 62:5; 습 3:17) ‘그 백성’(참고, 사 61:7.10; 습 3:14)이다. 65:17과 18절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49)

이상의 종말론적 표상은 먼 미래의 상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한 현재에 관한 것이다50). 그러나 야훼의 새 창조의 내용이 단순히 도성 예루살렘을 허물고 다시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의 새 창조의 대상이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의 표상은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65:17-19; 66:10-14.20f.). 18절에서는 단어 ‘새로운’이 예루살렘에는 쓰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새 창조는 ‘기쁨’이라는 단어와 연관된다(V.18b). 이 ‘기쁨’은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그 다음 장인 66장에까지 이어진다(66:10f.). 이는 제3이사야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야훼의 종들’51)과 잘못된 제의를 행하는 자들과의 대조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는 65장과 66장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진다. 이와 같이 야훼의 새 창조가 인간과 관련된다는 65장의 모습은 66장에서 더욱 도드라져서 나타나는데, 야훼의 현존은 어떤 특정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cf. 57:15) 그리고 누구를 위해(cf. 61:1) 함께 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52).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야훼의 새 창조와 사람들과의 관련은 어떤 이유에서이며, 사람들과 관련된 야훼의 새 창조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는 곧 인간 사회에 대한 야훼의 새 창조에 나타난 종말론적 표상의 그 사회적 관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이다. 비록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말하지만 뒤따르는 본문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하늘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질 않는다. 단지 땅에 대한 보도뿐이다. 즉 새 하늘 창조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제 새롭게 달라질 땅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 65:21과 22절은 야훼의 새 창조의 사회적 배경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V.21: “집을 지은 자들이 (거기로)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원을 지은 자들이 (그들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V.22: “집을 짓지 아니한 자들은 남이 (지은 집에) 들어가 살지 못하며, 심지 않은 자들이, 남이 (심은 것을) 먹지 못하리라.”


65:22a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에는 착취가 없는 세상임을 그려준다. 이러한 새로운 그림은 동시에 당시의 사회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사회 하층민들의 땀이 착취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은 당시 사회 상류층의 착취계급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사 3:14f.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 3:14f.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53)을 착취하고 빼앗은 것으로 자신들의 집을 채우는 사회 지도자들이 야훼의 심판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참고, 사 5:8). 사 3:14f.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 상류층들에 대한 심판선언이라면, 65:21f.는 앞으로는 가난한 자들이 더 이상 착취 받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이들을 위한 구원선포인 것이다. 비록 65:21f.에서 ‘가나한 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포도원을 짓는 자들’이 사회 상류층을 가리킬 수 없음은 확실하다. 사 62:8f.에서도 예루살렘의 구원의 표상은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이 없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들의 것을 빼앗겼던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것을 성전 뜰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전이 곧 해방의 장소요, 더 이상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곳임을 말해준다. 이는 곧 구원의 때는 ‘정의’가 실현되는 때임을 가리킨다(사 62:1b).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시는 야훼는 ‘공의’를 사랑하고, ‘불의한’ ‘착취/빼앗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61:8). 사 10:1f.은 사회 하층민들에 대한 상류층의 이러한 불의의 행위를 잘 보여준다. 사회 지도층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의 모습을 가리켜 ‘정의’(쩨데카)를 원했지만, ‘울부짖음’(쩨아카)만 있다고 사 5:7은 고발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쩨아카’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65:19)54). 그렇기 때문에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은 가진 자들이 자행하던 사회 불의에 대한 심판의 선언임과 동시에 억압받던 당시 사회 민중들에 대해선 구원의 선포가 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모습은 65장 마지막 절(25)에서 그 절정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사 65:25은 사 11:6-9의 수용이라고 여겨져 왔다55). 사 11:6-8과 65:25에서 나타난 동물들의 평화로운 세계는 강자(이리, 표범, 사자, 곰)와 약자(어린 양, 아기 염소, 송아지, 소, 젖먹이 아이, 젖 뗀 아이)가 함께 사는 모습이다. 그러나 평화의 세계란 약자와 강자가 단지 함께 사는 세상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는 약자가 더 이상 강자의 먹이(희생양)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 전제이다. 이는 약자가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평화는 강자의 폭력이 그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상의 이사야서 두 본문이 보여주는 종말론적 표상은 당시에 불의한 강자들의 폭력이 있었음을 가리켜준다. 특히 본문에서 강자들(이리와 사자)이 약자들(어린 양과 소)을 그들의 먹이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먹이인 풀(식물)을 먹는 다는 강자들의 먹이의 변화를 언급한다. 이는 약자들이 강자들과 함께 사는 평화란 강자들의 약자에 대한 폭력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즉, 이 평화의 세계상에 대한 비유는 인간 사회에서의 강자들의 불의한 폭력과 이 폭력으로부터 약자들의 해방을 빗대고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사 11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세계상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면서 동물들의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 11장의 종말론적 메시아사상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과 ‘땅의 곤궁에 처한 자들’을 향하고 있다. 4절은 당시 이러한 사회 약자들을 억압하는 불의한 사회 상류층을 고발한다. 정의 실천의 요구는 무엇보다도 사회 약자들인 가난한 자들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사회 약자들을 위해 정의를 실천할 때에야 올 수 있다(V.5f.)56). 사 32장 역시 평화의 세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실천을 말한다. 평화와 정의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요,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화와 안전”(V.17)이기 때문이다.

사 11장이 보여주는 구성은 이렇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정의 실천의 요구(V.3-4)와 함께 이루어지는 평화의 세계(V.6-9)가 전제된다면, 이제 그곳으로 온 열방들이 몰려올 것(V.10f.)이라는 것이다57). 이러한 구도는 앞서 언급했던 이사야서 전체 구도와 동일하다. 특히 전체 이사야서 결론부인 사 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상은 정의실천의 요구를 그 저변에 깔고 있는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66장에 가서 온 열방들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을 말한다. 특히, 사 11:10과 66:1은 야훼가 계시는 장소에 대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이곳으로 야훼가 온 열방들이 몰려오게 할 것이며, 그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11:10; 66:18). 그러나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이 장소(예루살렘/시온)는 무엇보다도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열방들이 시온으로 몰려와서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곧 거기서 정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62:2). 66:18f.는 열방들 중에 선택된 자들이 다시 야훼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다른 열방들에게로 보내어지고 그럼으로써 다른 열방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냄을 받았던 열방들이 다른 열방들을 데리고 시온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야훼는 이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뽑겠다고 말한다. 이런 표상은 전에 없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런 세계를 가리켜 22절은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야훼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65:17ff.가 말하는 착취가 없고, 강자들의 폭력이 사라지는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전제될 때, 그곳으로 온 열방이 몰려올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서 전체의 결말이다. 특히 이상의 이사야서의 결말은 이사야서 처음에 나왔던 주제들의 그 순서와 동일하다. 사 1장은 이스라엘(예루살렘/시온)의 죄악을 고발할 때, 그들의 잘못된 제의(V.11-15)와 함께 사회 불의(V.16-17; 21-23)를 통렬히 비난한다. ‘정의’와 ‘공의’가 충만했던 그곳이 살인만이 있을 뿐이다(V.21). 그러나 야훼는 죄악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을 ‘정의’와 ‘공의’로 다시 회복시키신다(V.27). 이러한 시온의 정의의 회복은 곧이어 사 2:2-4에서 온 열방들의 순례로 이어진다. 이는 온 열방들이 그리는 평화의 세계란 모든 전쟁의 무기들이 농기구로 바뀌고 다시는 전쟁의 연습도 없는 세계란(2:4, 참고, 미 4:1-4) 정의의 선행이 있은 후임을 말하는 구도인 것이다. 이러한 구상이 이사야서 서론부와 결론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전체 이사야서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신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IV. 나가면서


‘선교’의 개념에는 ‘전하는 자’와 ‘전함을 받는 자’가 서로 관계하고 있다. ‘선교신학’의 논의중에는 상당부분 ‘전함’의 내용과 그 방법들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지 않고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전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 보다 정확히 표하자면 전하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무엇을, 어떻게 전할 지의 논의 이전에 전하는 자의 자기 모습이 ‘선교’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보다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속에서 본 논문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구약성서, 특히 이사야서를 통해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에 대하여 ‘전하는 자’로서의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을 취하여야 하는 지, 그리고 그것이 열방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지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다.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 구성이 전하는 바는 이렇다. 제일 먼저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땅(시온/예루살렘) 안에서 사회정의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시온/예루살렘) 안에 정의가 실현되면, 그 곳이 진정한 평화(영원한 유토피아적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가 실현되고 평화가 정착된 곳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모든 열방(민족/온 생명체)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정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 지는 세상이며, 이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이 열방의 땅이 아니라, 자기의 땅에 사회정의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의와 평화를 이룬 이스라엘이 열방으로 선교의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방이 바로 그 땅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말이다.







[주제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스라엘과 열방(Israel und Volker), 이사야(Jesaja), 야훼의 종(Gottesknecht), 정의와 평화(Gerechtigkeit und Frieden)

■ Zusammenfassung(Abstract)


Das Verhaltnis zwischen Israel und Volker

‘Missio Dei’ im Sicht des Jesajabuches


Das Thema zum Verhaltnis zwischen Israel und Volker steht im Grund der alttestamentlichen bzw. biblischen Diskussionen als ein Beispiel der Frage nach der  Beziehungen zwischen ‘Subjekt’ und ‘Objekt’ der Mission im Bezirk der Missionstheologie. Die vorliegende Arbeit geht es vor allem um das Verhaltnis zwischen Israel und den Volkern im Sicht der Komposition des ganzen Jesajabuches im Sinne seiner Endgestalt. Diese methodische Interesse fragt sich nicht danach, wie, von wie vielen Verfassern und in welchen verschiedenen Zeiten unser Text geschrieben bzw. in seine jetzige Endgestalt zusammengefasst wurde. Vielmehr fragt sie danach, wie sich der vorliegende Text in seiner jetzigen Endform verstehen lasst.

Eine spezifische Vorstellung des Jesajabuches fur den Begriff ‘Bund fur das Volk’ und 'Licht der Volker' im Sinne der Frage nach der Problematik zwischen Israel und den Volkern ist insbesondere in Jes 42 und 49 in den sogenannte Gottesknechtliedern zu finden. Zusammenfassend hat der Gottesknecht als Verkorperung des Bundes das Ziel des Heils der Volker. Das Volk Israel spielt dabei die Rolle eines Vermittlers fur das Heil der Volker. Dennoch bedeutet das Heilslicht Israels fur die Volker durch die Verkorperung des Bundes ganz und gar keine Einbeziehung der Volker im Bund. Das Heil der Volker wird weder durch Ausweitung des Bundes auf die Volker noch durch ihre Aufnahme in diese Verkorperung des Bundes erschienen. Andererseits hat das Volk Israel als die Verkorperung des Bundes eine eigene Verpflichtung als Licht zum Heil der Volker. Es ist merkwurdig, dass die Frage nach der theologischen Bedeutung der Voraussetzung fur das Licht des Volkes Israel als Heil der Volker kaum beachtet wird. In der Tat kommen ‘Licht’-Motive im Zusammenhang mit einer Heilsansage fur das Volk Israel sehr haufig im ganzen Jesajabuch vor. 'Licht' als Motiv fur das Heil bzw. die Wiederherstellung des Volkes erweist sich als ein wichtiger Hinweis auf die einheitliche Komposition des ganzen Jesajabuches. Aber das Licht als Heilszeichen fur das Volk Israel bzw. seine Wiederherstellung bezieht sich uber das Heil Israels hinaus auf das Heil der Volker. Das Volk Israel soll fur das Heil der Volker zuerst selbst zum Licht werden(42:6; 49:6). Dieses Licht Israels ist das Licht ihrer Gerechtigkeit fur die Volker, weil die Volker sehen werden, dass in Zion/Jerusalem das Licht der Gerechtigkeit praktiziert wird(62,1f.).

Das ganze Jesajabuch wird vor allem durch Anfang(Jes 1:2-2:4) und Ende(Jes 65:17-66:24) des Buches mit mehreren Bezugen umklammert. Dies fordert vom Leser, das Buch von Anfang bis Ende mit voller Aufmerksamkeit durchzulesen. Dabei zeigt sich, dass das ganze Jesajabuch in seiner gesamten Konzeption absichtlich eine Komposition bildet. Das heisst, dass das Zion/Jerusalem allererst gereinigt bzw. in Recht und Gerechtigkeit fur die dorthin stromenden Volker gebracht werden muss. Es wird namlich vor allem die Durchsetzung der Gerechtigkeit bzw. des Friedens Israels fur das Heil der Volker bzw. allen Fleisches vorausgesetzt.

Der Grund fur die Volkerwallfahrt nach Zion liegt darin, dass die Tora Jhwhs aus Zion kommt, es daruber hinaus in Zion Frieden und Freude gibt. In diesem ewigen Friedensort gibt es kein Boses mehr, weil gegen die Feinde Jhwhs das ewige Gericht angekundigt wird. Nun beginnt dort ein neues Leben. Das ist das Leben fur alle Menschheit aus Israel und Nicht-Israel in der neuen Schopfung. Die Problematik der Gerechtigkeit bzw. des Friedens in Zion und damit Israel wird ein Kriterium fur das Heil der Volker, weil sie dorthin stromen. Daher wird zur Erschaffung dieser neuen Erde als eine eschatologische Heilsvision besonders fur die Volker zuerst die Durchsetzung der Gerechtigkeit Israels immer vorausgesetzt. Ohne diesen Gedanken geht der Sinn der gewollten Komposition des Abschlusses des Jesajabuches im Ganzen verloren.

Insbesondere spricht die Neuschopfung Gottes in Zion nicht von der zukunftigen Erwartung, sondern von der aktuellen Gegenwart, die man jetzt sehen kann. Das heisst, dass auf der erschaffenen neuen Erde die Problematik der sozialen Ungerechtigkeit nicht von der Hoffnung auf irgend eine Zukunft verdrangt, sondern hier und jetzt beseitigt werden soll. Die im Jesajabuch entfalteten Forderungen zur Praxis der sozialen Gerechtigkeit gelten. Ja, fur hier und jetzt fur das Gottesvolk Israel selbst! Dies zeigt sich, was die erste Aufgabe fur ‘Missio Dei' in einer neuen Diskussion der Missiontheolgie 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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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문은 2007년도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2) 이에 대해서는 채수일, 『21세기의 도전과 선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특히 89이하(“하나님의 선교” 신학의 미래)를 참고하라.


3) 이에 대해서는 테오 순더마이어,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채수일 엮어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를 참고하라. 구약성서와 선교에 관한 중요 참고문헌들은 Alfred Neufeld, Die alttestamentlichen Grundlagen der Missionstheologie (Verl. fur Kultur und Wiss, 1994); Erich Scheurer, Altes Testament und Mission (Brunnen-Verl: 1996)를 참고하라.


4) ‘선교’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에 대한 구약성서신학의 논의들에 대해서는 James Chukwuma Okoye, Israel and the nations: a mission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Orbis Books: 2006)를 참고하라. 특히 이사야서의 현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를 이스라엘의 사회정의의 실현이 열방들의 시온순례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관계에 대한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박경철, 이스라엘의 정의와 열방의 구원: 이사야서의 최종형태에 나타난 제의, 성전, 종말론, 사회정의와 관련된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연구(Park, Kyung-Chul, Die Gerechtigkeit Israels und das Heil der Voelker: Israel und die Voelker im bezug auf die Themen "Kultus-Tempel-Eschatologie und soziale Gerechtigkeit" in der Endgestalt des Jesajabuches), BEAT vol. 52, Peter Lang, Frankfurt a.M., 2003, 이에 대한 세계저널에 실린 서평들에 대해서는 Judith Gartner, in: ThLZ 130/3(2005), 260-262; Uwe Becker, in: ZAW 116/3(2004), 470-471; J. Middlemas, in: JSOT 28/5(2004), 98; Joachim Schuster, in: JETh 18(2004), 231-232등을 참고하라.


5) O.H.Steck는 그의 예언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에 대해 이러한 독서법이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 Die Prophetenbucher und ihr theologisches Zeugnis (Tubingen: 1996), V,를 참고하라. 그러나 Steck는 현 성서의 최종형태 그 자체의 의미를 묻기 보다는 그 이전에 어떻게 해서 각 예언서가 지금의 최종형태의 모습을 지니게 됐는지, 그 전(全) 역사과정에 대한 편집사비평 방법을 제안한다.


6) Remdtorff는 이런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관심을 내 비취면서 “현 최종형태 이사야서 전체에 대한 구성을 묻는 일은 그 동안 구약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진 주제가 아니었다” 고 말한다. R.Rendtorff,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in: VT XXXIV, 3(1984), 295-320, 295(= ders.,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 1991), 141-161). 성서의 최종형태구성비평에 대한 필자의 논문들은 http://ot.re.kr 을 통해 볼 수 있고, 그 중 최근의 대표적인 논문으로 시편에 대한 지난날의 연구방법과 달리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비평방법론을 적용한 박경철, “한 권으로 읽는 시편”, 김영일 외, 『시편-우리 영혼의 해부학, 김이곤 교수 정년퇴임기념논문집』 (서울: 한들출판사, 2006), 11-57을 참고하라.


7) 이에 대해서는 특히 J.M. Schmidt, "Gedanken zum Verstockungsauftrag Jesajas (Is 6)", in: VT XXI(1971), 68-90을 참고하라.


8) B. Duhm, Das Buch Jesaia (Gottingen: 1892, 5. Aufl. 1968). Duhm은 40-55장의 연대를 기원전 540년으로, 13:2-22; 14:4b-21.22f. 와 21:1-5은 제2이사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익명의 작품이며, 이른바 ‘종의 노래’라 불리는 42:1-4; 49:1-6; 50:4-9; 52:13-53:12는 포로기이후 익명의 작품이고, 56-66장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한 사람 제3이사야의 것으로 보았다. 또한 56-66장안에서 에스라와 사마리아 사람들간의 신정론에 대한 사상의 차이가 나타나고, 전체 이사야서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70년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연대가설은 1947년 쿰란에서 발견된 기원전 2세기경으로 밝혀진 이사야 대(大)두루마리(1QIsa)로 인해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9) 새로운 이사야서 연구의 방법론적 전환의 논의들에 대해서는 M.A. Sweeney, “The Book of Isaiah in Recent Research”, in: Currents in Research Biblical Studies 1, (Sheffield: 1993), 141-162; H.G.M. Williamson, “Synchronic and Diachronic in Isaian Perspektive”, in: Johannes C. de Moor (Hg.), Synchronic or Diachronic? A debate on method in Old Testament exegesis, OTS 34, (Leiden u.a.: 1995), 211-226; M. Tate, “The Book of Isaiah in Recent Study”, in: J.W. Watts u. P.R. House (Hg.), Forming prophetic literature: essays on Isaiah and the Twelve, in honor of John D.W. Watts, JSOT.S 235, (Sheffield: 1996), 22-56 등을 참고하라.


10) Rendtorff 도 이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일치된 견해가 ‘제1이사야’(1-39장) 배경 속에선 위의 질문에 명백한 대답을 구할 순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 Rolf Rendtorff, “Jesaja 6 im Rahmen der Komposition des Jesajabuches”, in: ders.,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 1991), 162-171. 이에 대해서는 J.M. Schmidt, “Gedanken zum Verstockungsvertrag Jesajas (Is. VI)” 와 R. Killian, “Der Verstockungsvertrag Jesajas”, in: ders., Bausteine Biblischer Theologie. FS. G.J. Botterweck, BBB 50(1977), 209-225등을 참고하라.


11) 이 본문들과 사 6장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R. Clemnts, “Beyond Tradition-History. Deutero-Isaianic Development of First Isaiah‘s Themes”, in: JSOT 31(1985), 95-113, 특히 101-104와 R. Rendtorff, “Jesaja 6 im Rahmen”를 참고하라.


12) 사 6장에 대한 양식비평적 논의에 대해서는 O.H. Steck, "Bemerkungen zu Jesaja 6", in: BZ 16(1972), 188-206, 특히 191f.을 참고하라.


13)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에 대해서는 특히, B.G. Webb, "Zion in Transformation. A Literary Approach to Isaiah", in: D.J.A. Clines u.a.(Hg.), The Bible in Three Dimensions, JSOT.S. 87, 65-84를 참고하고, 그 외에 구약성서 전반과 관련해서는 J. Hausmann, Israels Rest. Studien zum Selbstverstndnis der nachexilischen Gemeinde, BWANT 124, 7/4, (Stuttgart u.a.: 1987); G. Robinson, “The Idea of Rest in the Old Testament and the search for the basic character of Sabbath”, in: ZAW 92(1980), 32-42등을 참고하라.


14) Rendtorff는 사 1장과 6장의 연결과 관련하여, “이사야서 1장은 바로 독자들에게 6장의 완고한 신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왜냐하면 6장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아도, 독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화가 미쳐 있음은 그들의 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본다. Rolf Rendtorff, “Jesaja 6 im Rahmen”, 162-171.


15) Clements는 사 1:9이 587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상황에서 701년 아사야 예언안에 들어 온 것으로 본다.  R. Clements, Isaiah 1-39, NCBC (London: 1980), 39. 이에 대해 Rendtorff는 여기 해석학적 두 가지 질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이를 편집층의 시각에서 볼 것인지, 이니면, 이를 정경적 관점에서 현 최종형태의 의미를 볼 것인지 하는 것이다. R. Rendtorff, "The Book of Isaiah: A Complex Unity. Synchronic and Diachronic Reading", in: R.F. Melugin und M.A. Sweeney (Hg.), New Visions of Isaiah, JSOT.S 214, (Sheffield: 1996), 32-49, 41.


16) 이에 대해서는 특히, St.A. Irvine, "The Isaianic Denkschrift: Reconsidering an Old Hypothesis", in: ZAW 104(1992), 216-231; U., Berges, Das Buch Jesaja, Komposition und Endgestalt, HBS 16, (Freiburg u.a.: 1998), 87ff.를 참고하라.


17) 이에 대해서는 U. Berges, Das Buch Jesaja, 88 및 그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G.T. Sheppard, "The Anti-Assyrian Redaction and the Canonical Context of Isaiah 1-39", in: JBL 104(1985), 193-216를 참고하라.


18)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에 대한 구약신학적 논의에 대하여는 필자의 연재물인, 박경철, “종교적 행위와 사회정의 실천의 관계(I~III)”, 금식, 안식일, 선교, 기장회보 486~8호, 2007, 8~11월호를 참고하라.


19) 일반적으로 ‘종의 노래’에 속하는 본문은 42:1-4; 49:1-6; 50:4-9; 52:13-53:12 이라고 본다.  그러나 J.Werlitz는 ‘종의 노래’라는 분류의 근거가 그 ‘양식개념’(Gattungsbegriff)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모아놓은 ‘수집개념’(Sammelbegriff)이라고 말한다. J.Werlitz, “Vom Knecht der Lieder zum Knecht des Buches. Ein Versuch uber die Erganzung zu den Gottesknechtstexten des Deuterojesajabuches”, in: ZAW 109(1997), 30-43, 30 Anm. 1. ‘노래’ 문제의 논의에 대해서는 idem., Redaktion und Komposition. Zur Ruckfrage hinter die Endgestalt von Jesaja 40-55, BBB 122, 1999, 특히 26 Anm. 50을 참고하라.


20) ‘종의 노래’에 대한 논의들과 가설들에 대해서는 J.Werlitz, “Vom Knecht der Lieder”, 특히 30-34, 그리고 idem., Redaktion und Komposition, 특히 26-39를 참고하라.


21) E.Haag, “Bund des Volkes, Licht der Heiden (Jes 42,6)”, in: J.Blank u. G.Hasenhttl (Hg.), Glaube an Jesu Christus. Neue Beitrage zur Christologie, (Dusseldorf: 1980, 28-41, 29. 아울러 이 문제에 대해선 특히 J.J.Stamm, “Berit `am bei Deuterojesaja”, in: H.W.Wolff (Hg.), Probleme biblischer Theologie, FS. G.von Rad, (Munchen: 1971), 510-524를 참고하라.


22) 연결형으로 결합된 이 두 단어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 Baltzer는 “만약 ‘열방들의 빛’을 속격형 목적어로 이해할 경우, 이는 그 앞에 있는 ‘백성의 계약’이란 곧 백성에게 계약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K.Baltzer, Deutero-Jesaja, KAT X,2, (Gutersloh: 1999), 179.


23) 두 본문의 관련에 대해서 N.Lohfink, “Bund und Tora bei der Volkerwallfahrt. Jesajabuch und Psalm 25”, in: ders. u. E.Zenger, Der Gott Israels und die Volker. Untersuchungen zum Jesajabuch und zu den Psalmen. SBS 154, (Stuttgart: 1994), 37-83, 특히 50, Anm. 44를 참고하라. 그리고 사 49:1-9의 구조에 대해서는 L.Ruppert, “Das Heil der Volker (Heilsuniversalismus) in Deutero- und Tritojesaja”, in: MThZ 45(1994), 137-159, 146을 참고하라.


24) 이에 대해서는 K.Elliger, Deuterojesaja. 1. Teilband Jesaja 40,1-45,7, BK XI/1, (Neukirchen-Vluyn: 1978), 233f. 와 J.J. Stamm, “Berit `am” bei Deuterojesaja, in: H.W.Wolff (Hg.), Probleme biblischer Theologie, FS. G.v.Rad, (Munchen: 1971), 510-524, 510-524를 참고하라. ‘백성’이 이스라엘일지 아니면 온 인류를 가리키는지의 문제는 ‘암’과 ‘고임’을 서로 동의어로 볼지 아니면 서로 상대적인 주제의 병행을 위해 쓰여진 것인지 그 번역상의 문제에 있다. Baltzer는 이 문제(이스라엘 또는 인류)는 ”결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고 본다(K.Baltzer, Deutero-Jesaja, 180).


25) 참고, H.-J.Hermisson, “Israel und der Gottesknecht bei Deuterojesaja”, in: ZThK 79(1982), 1-24.


26) Crusemann은 종의 소명과 이스라엘의 소명은 “단지 서로 긴밀하게 나란히 병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서로 내적 통일성을 이룬다”고 말한다. F. Crusemann, “Ihnen gehoren ... die Bundesschlsse (Rom 9,4). Die alttestamentliche Bundestheologie und der christlich-jdische Dialog”, in: KuI 9(1994), 21-38, 33. 종과 이스라엘의 일치와 분리되는 모습으로 인해 이에 대해 통시적 연구를 한 것들로는 특히 R.G.Kratz, Kyros im Deuterojesaja-Buch. Redakt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en zu Entstehung und Theologie von Jes 40-55, FAT 1, (Tubingen: 1991)과 O.H. Steck, “Gottesknecht als Bund und Licht. Beobachtungen im Zweiten Jesaja”, in: ZThK 90(1993), 117-134; ders., Gottesknecht und Zion. Gesammelte Aufsatze zu Deuterojesaja, FAT 4, Tubingen 1992가 있다.


27) 참고, Haag, “Bund des Volkes”, 30-31; 35-36; Werlitz, “Vom Knecht der Lieder, 34-36.


28) Haag 역시 1-4절과 6절을 연결해서 보고, 6절의 익명의 부름 받은 자와 1절 야훼의 종을 동일인물로 본다. 그러나 그는 이 모두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야훼의 종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라고 보는 Elliger의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Haag, “Bund des Volkes”, 31).


29) 이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이는 Ralph W. Klein, Israel in Exile.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6, (Philadelphia: 1979)이다.


30) 특히 이 본문들은 모두 ‘눈 멀고 귀 먹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동일한 모티브를 갖고 있다.


31) W. Eichrodt는 ‘베리트’를 그의 구약성서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잡았었다(참고, Eichrodt, Theologie). M. Noth 역시 그의 암픽티오니 가설의 중심에 ‘베리트’를 두고 있다 (Noth, zwolf Stamme 참고). 이완 반대로 C.Westermann 은 ‘계약’이라는 이 개념은 구약성서신학의 중심 개념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생겨나는 표지일 뿐”이라고 본다 (Westermann, Theologie, 35). 구약성서의 ‘베리트’ 에 대한 개념 및 ‘계약신학’(Bundestheologie)에 대한 연구사에 대해서는 E.W. Nicholson, “Covenant in a Centuryof Study since Wellhausen”, in: J. Moor u.a. (Hg.), Crises and Perspectives, OTS 24(1986), 54-69; 같은 이, God and his People. Covenant and Theology in the Old Testament, (Oxford: 1986); R.A. Oden, “The Place of Covenant in the Religion of Israel”, in: P.D.Miller u.a. (Hg.), Ancient Israelite Religion, FS F.M.Cross, (Philadelphia: 1987), 429-447; E. Zenger, “Die Bundestheologie  ein derzeit vernachlassigtes Thema der Bibelwissenschaft und ein wichtiges Thema fur das Verhaltnis Israel Kirche”, in: ders. (Hg.), Der Neue Bund im Alten. Zur Bundestheologie der beiden Testamente, QD 146, (Freiburg: 1993), 13-50, 그리고 이를 잘 요약정리하고 있는 Crusemann, Bundestheologie, 특히 22 이하 등을 참고하라. L. Perlitt는 8세기 예언자들이 ‘계약’이라는 주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계약신학’은 후대 신명기 학파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L. Perlitt, Bundestheologie im Alten Testament, WMANT 36, (Neukirchen-Vluyn: 1969 를 참고하라). Crusemann은 ‘베리트’ 개념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바로 이전, 멸망에 대한 호세아의 신학적 작업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Crusemann, 위의 책 24). 흥미로운 것은 이 ‘베리트’ 라는 개념이 오경 전체에서 매우 의도적인 구성 속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밝혀준 이는 R. Rendtorff이다(R. Rendtorff, “Bund als Strukturkonzept in Genesis und Exodus”, in: ders.,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 1991), 123-131 123-131를 참고하라).


32) 이에 대해서는 Lohfink, Der Begriff Bund, 161-176; Kitchen, The Fall and Rise of Covenant, 429-447; Zenger, Bundestheologie, 13-50; Neef, Bundestheologie, 1-23; Ego, Abraham als Urbild, 25-40; Avemarie, Bund als Gabe und Recht, 163-216 등을 참고하라.


33) Crusemann, “Bundestheologie”, 3.


34) 위의 책.


35) 참고, Baltzer, Deutero-Jesaja, 181. Lohfink는 ‘이끌어내다’라는 용어는 출애굽유형론(Exodustypologie)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지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엑소더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N.Lohfink, “Bund und Tora”, 50). 그러나 Ruppert는 종의 사명은 분명 정치적인 것이라고 보고, 이는 어떤 집단(kollektiv, 이스라엘)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 좁은 의미에서든지 아니면 보다 큰 어떤 의미의 정치적 해방을 이끄는 것이라고 본다(L.Ruppert, “Heil der Volker”, 143). 그러나 사 62:2와의 관련성에서 비추어 볼 때,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이 표상은 포로기 이후시대 사회적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견지에서 현 본문 스스로 언급하는 그대로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말해 본문에 언급된 그대로 읽으면, 부정과 불의에 의해 감옥에 갇힌 자들이 야훼의 종을 통해 공의와 정의로 감옥으로부터 풀려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6) Haag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특별한 과거 경험의 배경이 이제 온 인류에게로 확장되고 있다”고 본다(Haag, “Bund des Volkes”, 35.


37) 사 65:17f.의 ‘새 창조’ 주제는 이사야서 마지막 66:22f.과 평행을 이루고, 무엇보다도 온 열방들 나아가 온 생명체들의 시온 순례와 연결되어 있다.


38) Haag은 “야훼의 종이 백성의 계약과 열방들의 빛이 되는 것이 ... 곧 야훼의 이 세상에 대한 구원사역과 동일한 사역을 담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Haag, “Bund des Volkes”, 41).


39) 열방들이 오직 야훼만을 섬기게 된다는 것은 이사야서의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Christopher T. Begg, “The Peoples and the Worship of Yahweh in the Book of Isaiah”, in: M. Patrick Graham u.a. (Hg.), Worship and the Hebrew Bible, FS John T. Willis, JSOT.S 286, (Sheffield: 1999), 35-55를 참고하라.


40) 이런 면에서 Lohfink가 “열방들의 시온순례를 그리고 있는 그 어떤 성서본문도 이것이 열방들이 이스라엘의 계약 안에 포함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 단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N.Lohfink, “Der Neue Bund und die Volker”, in: KuI 6(1991), 115-133, 116.


41) 2:2-5; 5:30; 8:20; 9:2; 13:10; 30:10.26; 42:6; 45:7; 49:6; 51:4; 58:8; 59:9; 60:1.3.19-20; 62:1. 42:6; 58:8 그리고 59:9에서는 ‘빛’이 ‘정의’라는 용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cf. 49:6: ‘빛’ 과 ‘구원’; 51:4: '빛‘과 ’공의‘; 59:9: '빛’, ‘공의’, ‘정의’).


42) Sweeney는 이 빛이 사 8:22-9:1의 어둠(흑암)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Marvin A. Sweeney, “The Reconceptualization of the Davidic Covenant in Isaiah”, in: J.van Ruiten u.a. (Hg.), Studies in the Book of Isaiah, FS W.A.M. Beuken, BEThL 132, (Leuven: 1997), 41-61, 54).


43) “이는 야훼의 종들의 기업이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義)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참고, W.A.M.Beuken, “Isaiah LIV: The multiple identity of the person addressed”, in: J. Barr (Hg.), Language and meaning: Studies in Hebrew language and Biblical exegesis, OTS 19, (Leiden: 1974), 29-70.


44) 사 54장에서 대화의 상대역으로 언급된 2인칭 여성 단수형은 야곱-이스라엘(42:24; 43:1.22; 44:1.2.5.21.23; 45:4; 46:3; 48:1.12; 49:5.6), 시온-예루살렘(51:11.16.17; 52:1.2)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45) “복이 있을지어다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46) 이 문제에 대해서는 K.Elliger, Deuterojesaja in seinem Verhaltnis zu Tritojesaja, BWANT 63, (Stuttgart: 1933), 6ff.와 94ff.를 참고하라. 그는 이 노래가 제2이사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이사야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H.-J. Hermisson, “Der Lohn des Knechts”, in: J. Jeremias u. L. Perlitt (Hg.), Die Botschaft und die Boten, FS H.W. Wolff, (Neukirchen-Vluyn: 1981), 269-287, 특히 283 참고. 4번째 종의 노래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E. Kutsch, Sein Leiden und Tod. Eine Auslegung von Jesaja 52,13-53,12, BSt 52, (Neukirchen-Vluyn: 1967);  J.A. Soggin, “Tod und Auferstehung des leidenden Gottesknechtes Jesaja 53,8-10”, in: ZAW 87(1975), 346-355; O.H. Steck, “Aspekte des Gottesknechts in Jesaja 52,13-53,12”, in: ders., Gottesknecht und Zion, Gesammelte Aufsatze zu Deuterojesaja, FAT 4, (Tubingen: 1992), 22-43; E. Haag, “Stellvertretung und Suhne nach Jesaja 53”, in: TThZ 105(1996), 1-20등을 참고하라.


47) 첫 번째 종의 노래 서두(42:1)와 네 번째 종의 노래 서두(52:13) 모두 ‘보라’(הנה)라는 말로 시작한다. Baltzer는 이것은 “전체(종의 노래)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신호(Signal)”라고 말한다(K.Baltzer, Deutero-Jesaja, 496).


48) Rendtorff는 구약성서에서 ‘하늘과 땅’ 두 단어가 함께 쓰일 경우, 이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Schoffungshandeln)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Wirksamkeit Gottes)의 영역으로서의 전 세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참고, 신 3:24; 4:39; 왕상 8:23; 사 1:2; 49:13; 66:1; 렘 23:24; 시 96:11; 113:6; 대상 29:11). R. Rendtorff,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Ein kanonischer Entwurf. Bd.1: Kanonischer Grundlegung, (Neukirchen-Vluyn: 1999), 12.


49) V.17a: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49) V.17a: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V.18b: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창조하리니”


50) 두 번에 걸쳐 쓰인 “보라!”는 지금 현재의 일을 가르치는 단어다.


51) 이에 대해서는 특히 W.A.M. Beuken, "The main theme of Trito-Isaiah, 'The servants of YHWH'", in: JSOT 47,(1990), 67-87; J. Blenkinsopp, "The Servant and the Servants in Isaiah and the Formation of the Book", in: Craig C.Broyles/Craig A.Evans(Hg.),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VT.S 70/1, (Brill u.a.: 1997), 155-176을 참고하라.


52) 야훼의 새 창조에 대한 모습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사야서의 결론부(65:17-66:24)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52) 야훼의 새 창조에 대한 모습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사야서의 결론부(65:17-66:24)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65:17: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65:17: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V.18: 야훼가 예루살렘기쁨의 도성으로, 그 백성(주민)이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하신다.

   V.18: 야훼가 예루살렘기쁨의 도성으로, 그 백성(주민)이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하신다.

  66:10: 예루살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

  66:10: 예루살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

   V.20: 야훼께서 모든 백성을 그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할 것이다

   V.20: 야훼께서 모든 백성을 그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할 것이다

   V.21: 야훼가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뽑을 것이다.

   V.21: 야훼가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뽑을 것이다.

   V.22: 왜냐하면, 야훼가 만드시는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

   V.22: 왜냐하면, 야훼가 만드시는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

   V.23: 모든 육체들이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마다 야훼를 경배하러 올 것이다.


53) 이사야서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특히, U. Berges, "Die Armen im Buch Jesaja. Ein Beitrag zur Literaturgeschichte des AT", in: Bib 80(1999), 153-177을 참고하라.


54) 사 5:7이 비슷한 발음을 가진 두 단어(‘쩨데카’-정의/ ‘쩨아카’-울부짖음)를 사용하여 사회를 고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65:19에서의 ‘쩨아카’(울부짖음)가 없는 세상은 다시 말하면 ‘쩨데카’(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5) 이에 대해서는 O.H. Steck, "Beobachtungen zur rezeption von Gen 1-3 in Jes 65,16b-25“, in: J. van Ruiten u. M. Vervenne(Hg.), Studies in the book of Isaiah, (Leuven: 1997), 349-365; idem., "...ein kleiner Kanbe kann sie leiten. Beobachtungen zum Tierfrieden in Jesaja 11,6-8 und 65,25", in: J.Hausmann u. H.-J.Zobel(Hg.), Alttestamentlicher Glaube und Biblische Theologie, FS. H.D.Preuss, (Stuttgart: 1992), 104-113; T.A.G.M. Ruiten, "The intertextual relationship between Isaiah 65,25 and Isaiah 11,6-9", in: F.Garcia Martinez u.a.(Hg.), The Scriptures and the scrolls: Studies in honour of A.S. van der Woude on the occasion of his 65th birthday, VT.S 49, (Brill: 1992), 31-42 와, 특히 사 11:1-16과 제3이사야서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B.D.Sommer, "Allusions and Illusions: The Unity of the Book of Isaiah in Light of Deutero-Isaiah's Use of Prophetic Tradition", in: R.F.Melugin und M.A.Sweeney(Hg.), New Visions of Isaiah, JSOT.S 214, (Sheffield: 1996), 459-470을 참고하라.


56) 가난한 자들을 향한 메시아 기대는 사 61:1-3에서 다시 나타난다. 사 11:2에서 ‘야훼의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위에 내렸다면, 사 61:1에서는 '야훼의 영'이 그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에게 내린다. 사 61장에서 예언자 소명기사의 중심은 그 목적이 사회 약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57) 사 11장 1절과 10절은 모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 나옴’을 동일하게 씀으로써 그 이하의 주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8-03-06 10: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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