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원고] ‘거둠’의 설교인가, ‘뿌림’의 성서인가?
  박경철
  

[세계와 선교 196호, 2008년 9월]

‘거둠’의 설교인가, ‘뿌림’의 성서인가?

박경철



I. 들어가는 말


지난 세기 한국교회 급성장의 요인들과 그에 따른 다양한 논의들을 일일이 거론치 않아도, 개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그 첫 모습은 개 교회 교인수와 함께 교회의 외형적 규모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를 굳이 부정적이라고 꼬집지 않더라도 이러한 외형적 성장과 부흥은 많은 교인 수에 의존한 ‘헌금’에 기인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 ‘헌금’은 교인의 ‘드림’이 아니라, 교회의 ‘거둠’으로 비추이기도 한다. 좀 더 곱씹어 보는 이들의 눈엔, 교인의 ‘드림’의 ‘헌금’ 역시도 더 많은 ‘수확’,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한 개인의 투자적 ‘뿌림’이라고까지 보인다. ‘뿌리지 않고서는 거둘 수 없다’는 자연의 법칙을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만, ‘뿌림’과 ‘거둠’의 자연의 순환인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의 참 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 성서는 이 둘, ‘뿌림’과 ‘거둠’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 무엇을 ‘뿌리고’, 무엇을 ‘거두어야’ 할 것인가?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이방민족들과 함께 똑 같은 자연 속에서, 똑같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연의 변화와 순환의 법칙 가운데에서 독특한 야훼신앙을 만들어내고 지켜냈다. 고대 이스라엘이, 구약성서가 말해주고 있는 자연 속에서의 야훼신앙이란 무엇일까? 오늘 역시도 자연 없이 살 수 없고, 그 자연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에게 고대이스라엘의 신앙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인간의 일상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곧 시간이다. 인간 누구에게나 영향을 주는 단순한 일상의 보편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의미로써의 시간이다. 이는 인간은 자연의 순환의 시간 구조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자연환경에 맞추어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자연의 어떤 시간구조에 맞추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달력(calendar)이다. 전통적인 농경문화민족인 우리나라는 달을 기준으로 한 월력(月曆)을 사용해 왔지만, 해(日)를 기준한 서양력의 보급과 함께 우리의 전통문화가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곧 어떤 자연의 시간구조에 맞추느냐에 따라 한 민족의 문화와 삶의 양태가 얼마나 크게 좌우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유목민 전통의 야훼 신앙이 가나안의 농경문화신앙과의 대립 가운데 나타난 중요한 시간구조의 변화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나타난 점이다. 출애굽기 34장은 이스라엘의 법전중 가장 오래된 계약법전(출 20:22-23:33)의 기본이 되었던 종교법1)으로 여기서 야훼신앙제의와 이스라엘의 농사절기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출 34:18-26)2). 야훼제의를 가리키는 축제와 순례절(hag)을 지칭하는 세 개의 대명절이 제시되고, 각각 쉬는 날들이 ‘일곱’이라는 축제기간과 함께 언급된다. 이는 한 해의 가장 큰 세 번의 이스라엘의 야훼제의가 가나안의 농경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이 달의 주기와 무관한 7일 주기와 맺어짐으로써 달을 중심으로 했던 비야훼 종교의 주기와 분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또한 본래는 달의 변화에 맞춘 15일 기준의 초하루와 월삭의 축제와 연관되었던 ‘사바투’ 제의를 달의 변화와 무관한 해의 변화에 맞춘 7일 주기의 ‘안식일’(사바트)로 바꾸는 것에서도 나타난다.3) 그렇게 함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 비록 농사를 짓고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이었지만, 그 땅에서 자연신에 지배 받는 가나안의 농경문화의 신앙을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자연은 창조주 야훼의 피조물이며 땅의 모든 풍요의 주인인 야훼신앙의 삶으로 바꾼 것이다. 결국 가나안에서의 야훼신앙은 “생활의 시간적 주기를 독자적으로 새롭게 구조화한 데 있다”4)는 것이다.

음력과 양력 외에 교회가 사용하는 또 다른 시간구조가 곧 교회력이다. 일 년의 삶을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력은 기독인들의 삶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오랜 교회의 신앙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현 교회력에는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력이 아닌, 본래 구약성서의 유대력에서부터 온 농사력에 맞춘 두 개의 절기인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갖고 있다. 한 해 농사를 짓고 ‘거둠’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적 의미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그동안 자칫 풍성한 열매에만 집착하는 기복적 신앙만을 키운 면도 없지 않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발전의 저변에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라는 로또식 유혹에 헌신과 헌금을 강조해 온 면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결실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한다”는 나눔과 섬김, 고난과 순교의 그리스도의 삶이 보다 중요하고 진정한 성서의 가르침이지 않겠는가! 씨앗을 뿌리지 않고 열매를 얻을 순 없다. 진정한 추수감사는 ‘씨뿌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울며 씨를 뿌리러(메쉐크-핫짜라)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는 성구는 잘도 외우며, 해마다 ‘추수감사절’은 지켜오면서도 그동안 ‘씨뿌림의 야훼축제력’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교회가 ‘거둠’의 기원과 축복은 강조하면서도, ‘뿌림’과 ‘헌신’에 있어서는 소홀히 해 오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나안 농경문화에서 이스라엘의 야훼제의화에 나타난 시간구조의 변화가 보여주는 신학적 의미는,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과 같이 ‘거둠’에만 강조하는 현 교회력에 새로운 시간구조인 ‘씨뿌림’의 야훼축제력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의 일 년의 생활주기를 올바른 야훼신앙으로 정립한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씨뿌림’에 대한 구약성서의 보도들을 통해 ‘씨뿌림’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II. ‘거둠’과 ‘뿌림’에 대한 구약성서의 가르침



구약성서는 ‘거둠’과 ‘뿌림’의 불가분의 관계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모든 씨 맺는 채소와 씨를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드신 일’(창 1:11-12,29)은 씨(쩨라)를 통한 생명의 영속, 곧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결과의 계속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노아홍수 사건 이후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콜-바사르)와 맺은 약속의 기저에는 곧 자연(땅)의 기본 순환 법칙의 영구성이 놓여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쩨라)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cf. 전 3:2). ‘심음’(뿌림)없이 ‘거둠’이 올 수 없다는 영구불변의 법칙이 정해진 것이다. 구약의 가장 오래된 계약법전에서 야훼제의 절기력 가운데 하나인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키라는 명령은 ‘네가 밭에 뿌린 것(아쉐르 티쯔라 밧싸데)’을 전제한 첫 수확을 말한다(출 23:16). 계약법전의 근간이 되었던 출 34장에서 야훼축제력과 휴무의 관계에 있어서도 수확철인 ‘밭걷이’ 축제뿐 아니라, 파종을 의미한 ‘밭갈이’가 매우 중요한 야훼제의력과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34:21). 또한 ‘뿌림’과 ‘거둠’의 불가분의 관계는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심판’(호 8:7a; 사 17:11; 렘 12:13; 45:4; 미 6:15; 학 1:6)과 ‘구원’(호 10:12a; 사 30:23a; 65:22)의 메시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구약의 오랜 지혜전승에서도 ‘뿌림’과 ‘거둠’의 관계는 서로 떼어낼 수 없다(욥 4:8; 잠 11:18; 22:8; 전 11:4). ‘거둠’은 ‘뿌림’으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축복(창 26:10; 암 9:13; 사 30:23; 32:20; 시 107:37)이지만, ‘뿌림’ 그 자체가 반드시 축복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파종을 하여도 그 수확을 얻지 못한다는 것(레 26:16)을 제시함으로써, ‘뿌림’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통로임을 전한다(레 26:3-5). 팔레스타인의 계절적 영향에 따른 밭갈이철에 내리는 이른비는 곧 ‘뿌림’과 관련한 하나님의 축복이다(신 11:14). 특히 경제적 가치를 ‘거둠’에만 의존하는 일반적 상식과 달리, 구약성서는 ‘거둠’의 양이 아니라, ‘뿌림’의 양으로 그 가치의 기준을 정하고 있음(레 27:16: “어떤 사람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밭에서 얼마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에게 바치려고 하면, 그 밭의 값은 그 밭에 뿌릴 씨앗의 분량에 따라 매기게 된다. 예를 들면, 그 밭이 한 호멜의 보리씨를 뿌릴 만한 밭이면, 그 값은 은 오십 세겔이다.”)을 보면, 열매보다 씨앗, 그 종자의 귀중함을 알려준다. 이사야는 ‘씨뿌림’의 지혜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알려준다(사 28:24-25). 이 농사의 지혜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이기도 하다(V.26,29).

이상의 성서보도들은 ‘거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존 교회력이 갖고 있는 반절의 감사절 신앙생활의 주기를 온전하게 해 주는 ‘뿌림’의 감사절의 필요성을 일러준다고 할 수 있다.

III. '씨뿌림‘ 금지에 담긴 신학적 의미


구약성서는 ‘거둠’과 관련하여 ‘뿌림’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과 아울러, 반면에 ‘뿌림’을 금지하는 법조항을 제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둠’도 없는데, 씨를 뿌려서는 안 된다는 구약성서의 법조항의 의도는 무엇이며, ‘씨뿌림 금지’가 갖고 있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금지케 하는가?

먼저 두 종자를 함께 심지 말라는 보도이다(레 19:19; 신 22:9). 이는 단지 혼합재배에 대한 ‘뿌림’ 금지의 농사법을 설명하는 의미를 떠나, 무엇보다도 가나안의 혼합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의 의미(레 18:3,30)로 받아들여야 하다. 단순히 두 종자의 파종금지만이 아니라, 소와 나귀가 함께 멍에를 메어 밭을 갈지 못하게 함으로써(신 22:9) ‘다른 종류의 가축과의 교미 가능성을 금지’(레 19:19)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아울러 ‘두 종류로 직조한 의복 착용을 금지’(레 19:19)함으로써 외형적으로도 가나안 신앙과의 혼합을 염두에 둔 비야훼종교와의 혼합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이상의 혼합주의에 대한 배격은 레 18장에서 근친간의 성행위 금지조항과 맞물려 있고, 이는 19장 처음에 나오는 우상금지법과 연결됨으로써 전반적으로 모든 계명들은 이방종교와의 혼합에 대한 분리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레위기 11장에 있는, ‘부정한 짐승들의 주검에 닿은 것들은 부정하게 된다’는 조항들에 있어서, 씨(쩨라) 만큼은 제외된다. 그러나 이미 물에 젖은 씨에 그 주검이 닿았을 경우에는 이 씨 역시 부정하게 되고(레 11:37). 이 씨는 파종할 수 없다. 이는 아직 생명의 싹을 키우지 않은 마른 씨와, 물에 젖어서 생명의 싹이 자란 것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다. 단지 씨앗으로서의 중요성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씨앗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생명의 가치는 곧 파종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은 무엇보다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성별된 의미를 지니며, 이 거룩함에 대한 요구와 명령(레 11:45)이 정과 부정을 구별하는 것과 맞물림으로써, 파종 여부의 구별 역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해방행위에 대한 제의적 요소와 관련을 맺게 된다. ‘씨뿌림’의 제의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즉, 레위기 11장(나아가 성결법전의 중심 역시)은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그가 거룩하시니 그의 부름 받은 백성들 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대 전제하에서, 정과 부정의 구분들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에 씨, 파종에 대한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생명의 ‘뿌림’을 통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생명을 주신 해방자 야훼를 찬양케 하는 것이다. 경제적 부를 위한 ‘거둠’의 기원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뿌림’의 신학은, 반생명적인 부정한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파종금지에 관한 구약성서의 주된 조항은 무엇보다도 정기적인 휴무를 정하고 있는 안식년 그리고 희년법과 관련이 되어있다. 계약법전에는 아직 ‘안식년’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으나, 여섯 해 동안 파종과 수확 후, 제 칠년이 되는 해에는 파종이 금지되고, 땅을 묵혀서 땅에 자라는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했다(출 23:10f.). 이는 엿새 동안의 일의 허락과 제 칠일의 휴무조항을 서로 관련 맺음으로, 무엇보다도 짐승과 남녀종들 및 나그네로 하여금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조치로 여겼다(출 23:12f.). 성결법전(레 17-26장)에는 ‘안식년’(쉐나트 샤바톤)과 ‘희년’(요벨)이 정식으로 거론되는데(레 25:1-13), 안식년과 희년에 파종과 거두어들임을 금지하는 조항은 무엇보다도 땅으로 하여금 쉬게 함으로써, 땅의 재생산력을 높이려는 데 있다(레 25:6f.). 그러나 이는 단순히 땅의 자연적 생산성을 높이려는 새로운 농법기술을 제시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칠일주기에 맞춘 야훼신앙화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칠 년째 파종과 소출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 8년째부터 땅이 더 많은 수확을 낸다는 것이 아니다. 땅이 스스로 자기 생산력을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거둠’은 땅의 주인이신 야훼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면, 이미 여섯째 해에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나게 하신다는 것이다(레 25:20ff). 안식년과 희년의 파종금지조항은 무엇보다도 바알종교와의 단절을 위한 야훼신앙의 시간주기의 구조적 변화의 신앙적 실천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종금지의 해를 오늘날 교회가 지킬 것인지의 문제는 한 해 농사일에 대한 금지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는 풍요의 주인이 바알이 아니라, 야훼에게 있음을 말하려 했던 성서의 근본 목적에 따라 농사와 농경정책이 자본인 시장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인간의 땅 정복의 고리를 끊는 것이고, 땅으로 하여금 생태적 자연능력을 갖도록 되돌려 주는 일로 나아가는 생명농법으로서의 농사일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땅의 소산물을 빼앗기고 점차 농사일을 포기하게끔 하는 부자들의 세계화 정책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의 소산물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을 먹이게 하는 야훼의 생명농법을 지향해 가는 성서의 근본 취지를 살리는 일이다. 이것이 맘몬의 자본주의로부터 야훼종교신앙을 지켜내는 일이다. ‘뿌림’의 금지는 곧 무엇을 ‘뿌려야’ 하는 지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IV. 나가면서: 무엇을 뿌려야 할 것인가?


고대근동에서는 파종(짜라)을 위한 씨앗(종자/쩨라)은 빈궁한 삶을 이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연장의 수단이 되었으며(참고, 창 47:19,23f), 하나님께 받치는 십일조는 단지 ‘거둠’의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땅이 낸 종자의 십일조’(마사르 하아레츠 밋쩨라 하아레츠) 역시 중요하게 명시되고 있으니, 이는 곧 야훼께 받치는 거룩한 제물이 되었다(레 27:30)5). 구약성서가 말하는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는 단지 ‘십분의 일’이라는 산술적 의미를 떠나, 전체를 ‘십’이라고 볼 때, 그 처음이 된 ‘일’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분의 일’ 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전체 ‘십’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 전체를 가능케 한 그 처음인 ‘일’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데 십일조의 본래적 의미가 있다.6) 그렇기 때문에 ‘거둠’의 ‘십분의 일’만이 십일조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모든 ‘거둠’의 근거(처음)가 되는, ‘종자(처음)의 십일조’에 ‘뿌림’의 신학이 들어있다. 종자(씨앗)는 곧 생명이며 모든 ‘거둠’의 근거요, 처음이기에 이것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한 해의 생명과 먹거리를 책임져 주시는 야훼께 자신을 맡기는 신앙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 앞에 드리는 ‘종자의 십일조’라 할지라도, 어떤 종자(씨앗, 근거)를 심을(뿌릴) 것인지를 알아보자.

‘심은대로 거둔다’(갈 6:7)는 말에는 무엇을 뿌리고 심을 것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떤 특정작물재배를 위한 종자선별이나, 많은 양의 ‘거둠’을 위한 종자개발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거둠’의 긍정과 부정의 결과의 원인이 ‘뿌림’에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풍요의 ‘거둠’의 기원에 푹 빠져 있던 때, ‘뿌림’의 신학을 대변했던 이가 바로 주전 8세기 예언자 호세아였다. 바알 종교의 풍요와 다산의 근원은 하늘이 땅에 비를 내려 줌으로 땅이 그 소산물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모든 관계의 근원은 다름 아닌 야훼라는 점을 밝힌다(2:23-24[21-22]). 야훼가 하늘에 대답하니 하늘이 땅에 대답하고 땅이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으로 이쯔르엘에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쯔르엘 땅의 비옥한 풍요의 근원은 오직 야훼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풍요의 근거는 이쯔르엘 땅이 살인과 폭력이 사라지는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앞서 전제한다. 바알 종교 제의 거부와 사회 정의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 땅의 생명들과 맺은 계약은 온 땅에서의 전쟁의 사라짐과 모든 전쟁 무기가 파기된 평화의 세상이며, 정의와 공의의 회복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2:22[20]). 풍요를 위해 ‘거둠’만을 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전 8세기에 외쳤던 예언자 호세아의 외침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뿌려야’하고, 무엇을 ‘거두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

(호 10:12)


1) 이 연구는 무엇보다도 J. Halbe, Privilegrecht Jahwes Ex 34,10-28, FRLANT 114, Gottingen, 1975의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다.


2) 이에 대해서는 특히 F. Crusemann, Die Tora, Theologie und Sozialgeschichte des altestestamentlichen Gesetzes, Munchen, 1992, 프랑크 크뤼제만, 토라 1, 구약성서 법전의 신학과 사회사, 김상기 역, 한국신학연구소,1995, 255-264를 참고하라.


3) 고대 바벨론의 월신제의인 ‘사바투’와 ‘안식일’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특히 , G. Robinso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Old Testament Sabbath. A Comprehensive Exegetical Approach, Beitrage zur biblischen Exegese und Theologie 21, 1988을 참고하라. 그는 구약성서의 7일주기의 정기적 휴무일로서의 ‘안식일’제도는 포로기 이후에 와서야 정착했다고 본다.


4) 크뤼제만, 토라, 261.


5) 대하 31:6은 야훼께 바치는 십일조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와 양의 십일조 뿐 아니라, 야훼께서 거룩하게 한 성물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나온다. 여기에 종자(쩨라)가 속하는 것인지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레 27:30에 따라 ‘종자’ 역시 하나님께 드린 거룩한 예물로서 십일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6) 구약성서에는 첫 열매와 십일조가 함께 병행되어 나오는 본문을 흔히 볼 수 있다(신12:7; 14:23; 대하 31:5; 느 10:37; 12:44 etc.).


2008-09-13 12: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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