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서평] 조헌정 목사의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박경철
  

조헌정 목사의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예언자와 오늘의 시대정신』을 읽고

박경철(한신대 구약학 조교수)1)


변명

조헌정 목사님(이하 조목사)의 설교집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예언자와 오늘의 시대정신』은 그가 지난 2008년 향린교회에서 행한 예언자 시리즈 ‘하늘뜻펴기’ 이른바 설교원고들을 엮어낸 설교집이다. 본인이 지금 한 권의 책으로 된 설교집을 읽고 나름대로 평을 하려는 것은, 흔히 이름붙이는 ‘설교비평’이 아니다. 그건 아예 가능하지 않기에 그렇다. 설교는 청중의 듣기가 전제된 것인데, 듣지 않았기에 그렇다. 비록 그의 설교동영상을 통해 들을 수 있다 할지라도, 이 또한 ‘설교비평’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설교란 선포자와 청중간 쌍방향의 시,공간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조목사가 이미 지적했듯이, “...제한된 영상을 통해 보는 것과 예배에 직접 참여해서 그 분위기를 체득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65)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1960년대 토착화 논쟁이후 개신교계에 최대의 반응을 불러일으킨”2)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에 대해 “...적어도 비평하려는 ...교회(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 번쯤은 직접 와서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하고 책의 가장 앞자리부터 날카롭게 반론하는 조목사의 의중을 엿보아서일까? 그래서 처음부터 나의 평이 ‘설교비평’이 아니라고 굳이 밝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설교비평’이 갖는 무거운 짐을 떠맡지 않으려는 속내를 부러 드러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가 보다.

이렇게나마 ‘설교비평’의 무게감을 잠시 벗을 수 있다면 애써 에두르지 말고 말하자. 예언서 전공자인 본인에게 있어서, 조목사의 예언서 본문의 설교들에 대한 평이 아니라, 예언서 설교 시리즈로 엮인 한 권의 조목사의 예언서 신학에 대한 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서는 것이 솔직하다고. 지난날의 예언자의 말에 대한 연구에서 벗어나, 현 최종형태로서의 예언서, 곧 한 권의 책에 대한 새로운 성서해석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조목사의 한 권의 예언서 설교집은 우선 친밀하고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의 평은 조목사의 개별 설교원고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전체 한 권의 예언서 설교집으로 엮인 책,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에 대한 서평이 될 것이다. 이는 내 의도가 아니다. 조목사가 연속 시리즈로 행한 설교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내 귀와 눈으로 그의 설교를 청취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이 한 권의 책 안에 들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청중의 설교가 아닌 독자의 설교집3)

그러나 내가 조목사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설교비평’의 불가성을 말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설교와 설교집의 특성을 예언서를 통해서 새롭게 인식하려는 내 본색이 더 짙다.

예언서에 나오는 내용은 먼저 예언자들의 선포가 있었(을 것이)다. 현 예언서는 그 후로 많은 것들이 수정과 편집과정을 거친 오랜 문서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비록 가장 이른 문서예언자인 아모스의 활동연대가 주전 8세기라 할지라도 당시 예언자 아모스의 청중이 들은 그의 예언/선포가 현 아모스서 전체는 아니다. 문자주의자들에게 백보 양보해 설사 모두가 그렇다 할지라도, 현 아모스서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들려지고, 읽어오고 있는 청중과 독자들에겐 더 이상 주전 8세기가 중요치 않다.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무엇이 굳어진 문자를, 아모스의 선포를 받아들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전 8세기의 아모스의 예언서포를 정확히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실상 더 이상 아모스의 목소리 그 자체가 어느 시대에서든 중요치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70년대말 발터 찜멀리(W. Zimmerli)의 “예언자의 말로부터 예언서에로"(”Vom Prophetenwort zum Prophetenbuch”, ThLZ 104(1979), 481-496)의 소논문의 발표를 계기로, 현 예언서에서 예언자의 원선포를 가려내는 일의 중요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형태로 엮어진 개별 예언서 책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들이 새로운 예언서 연구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 아모스서의 책 전체가 주는 메시지를 찾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 실상 그것을 넘어서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다. 비록 원 아모스의 말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할지라도, 저마다 찾은 아모스의 말 또한 모두가 한결같지가 않다. 역사적 예수 논쟁의 결론이 그런 것처럼.

그렇다면 이제 말하자. 조목사의 주일설교시 당시의 청중이 아니었기에 ‘설교비평’이 불가한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설교집에 대한 서평의 가능성은 당시 예배에 참여했던 향린교우가 아닌, 그의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을 읽는 그 어느 독자들에게도 그의 설교집/책은 살아있는 선포가 되고, 예언이며 진정한 설교가 될 수 있다. 이 때 그의 설교집/책이 비로소 지금 여기에 펼쳐지는 하늘의 뜻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지 어떤 책을 읽는 독자라고 해서 모두 그 책의 선포 당시와 동질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의 선포가 정경으로서의 예언서가 된 이유에는 예언자의 시대정신을 자기 시대에 재해석과 적용을 통해서였다. 조목사의 설교가 일회성의 선포가 아닌 이유가 바로 이 책을 통해서인 것이다. 조목사가 예언자들의 시대정신을 오늘의 시대에 재해석한 것은 조목사가 처음이 아니다. 정경으로서 지금까지 읽어왔던 익명의 다수의 정경신앙공동체원들이다. 성서를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는 조목사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래서 비성서적이다. 조목사가 아니라 성서가 본래 그렇다는 말이다. 조목사는 성서가 해 온 방식을 그대로 올곧게 따라했을 뿐이다. 문제는 따라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고, 실상 그대로 보고 하라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조목사는 본 것이고, 쉽지 않은 따름을 연속적으로 해 왔다는 것이 일반 설교가들과 다른 것이다. 아니 아주 크게 다르다. 문제는 조목사가 아니다. 그의 성서재해석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성서의 방식을 그대로 전한 것을 들은 설교 청중들의 시대정신이 문제고, 이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성서의 방식대로, 조목사의 방식대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로 따라갈 지가 문제다. 바로 여기서만 청중과 독자들이 성서적인가 아닌가만 있을 따름이다.


조목사의 설교가 참인가?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을 전해주는 조목사의 설교는 좋은 설교인가, 아니 참 설교인가? 그가 숱하게 질타하는 남한의 보수 대형교회들의 설교는 나쁜 설교인가? 아니 거짓설교인가? 무엇이 기준인가? 진보든 보수든 인정하는 성서(경)를 갖고 말해보자. 성서 안에도 진보예언자, 보수예언자들이 있었다. 진보, 보수 제사장들도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참 예언자들과 거짓예언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구분이 무엇인가?

우선 제1성서가 말하는 ‘예언’에 대해 말해보자. 조목사가 정확히 표현해 주듯이, ‘나비’로서의 예언(預言)은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 전달하는 말이지, 앞날을 점치듯이 말하는 예언(豫言)이 아니다(72). 그래서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첫째 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지, 하느님으로부터 보냄(파송)을 받았는지의 여부다(렘 14:13f; 23:16,21; 28:15). 그런데 예언자들마다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들 하니, 이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시청 앞에서 한 쪽은 촛불을 들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른 한 쪽에선 이를 ‘사탄’이라고 설교하고 있는데 무엇이 참 설교이고, 참 목사인가?

참, 거짓 예언자의 두 번째 성서의 구분은 예언의 성서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렘 28:9; 신 18:22). 그런데 이것도 문제다. 서로 상반된 예언이 무엇이 맞는 지는 두고 볼 일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무엇이 참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한 쪽은 FTA가 경제를 살리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는데, 조목사는 FTA가 “단순한 경제교역이 아닌 군사적, 국제정치적으로 예속된 남한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 정신문화의 찬탈”(91)이라고 말한다. 지금 당장 무엇인 참인가? 언제까지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인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마지막은 평화(샬롬)를 외치는 예언자가 거짓이라는 것이다(렘 6:14; 8:11; 14:13; 겔13:10,16). 평화를 외치는 것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번역상의 문제인데, 평화의 때가 아님에도 괜찮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모든 게 다 잘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치고, 약자가 짓눌림을 당해도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확실한 잣대다. 예언자들이 잘못된 사회, 정치체제를 비난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든 게 다 잘 되가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이것이 예언자의 시대정신이며 역사의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말할 수 있다. 오늘 무엇이 좋은, 아니 참 설교이며, 누가 참 목사인가? 누가 거짓 목사인가? 예레미야가 성전에 가서 선포한 설교의 첫 말은, “이것이 성전이다. 성전이다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는 것이었다. 왜?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치고 사회의 약자들이 무고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성전에서의 태연한 종교놀음이라니, 어찌 이것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집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그의 질타였다. 조목사의 ‘하늘뜻펴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 남한의 교회에서 참 설교와 참 목사의 구분은 오늘의 발 빠른 신자유주의 사회, 정치, 경제체제로의 내달림에 대해 잘 되는 일이라 박수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온 몸으로 막아서고 이것이 죽음으로 내닫는 위기의 때라고 외치는 것에 있다. 조목사나 나의 판단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구분이요 판단이다. 그러니 조목사의 설교를 “설교와 시국강연을 혼동함으로써 그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축소시킬 염려가 있다”(41)는 정용섭 목사의 판단은 오히려 비성서적 혼동이며, 정목사 자신이 만든/조각한 신의 염려는 아닌가?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너무 직설적일까? “내 말이라 하고 전하는 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다. 제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면서 너희를 속이는 것들이다.”(렘 23:16)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은?

그의 예언자/서 설교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예언자의 시대정신이고 이에 대한 오늘의 우리의 자리에서의 재해석한 시대정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하고 우선 그의『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책의 중요한 특징들을 말해보자.

첫째 가장 큰 특징은 예언자 연속 ‘하늘뜻펴기’다. 연속이라 해서 예언서 개론책도, 평신도용 예언서 성경공부교재도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신학교에서 교재로 읽혀질 예언서 입문의 필독서이기도 하다.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21)과 그에 대한 조목사의 반론(43)과 부록으로 실은 비평본문이 되었던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 설교원문(398)이 실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에 그렇다. 그의 ‘예언자 연속 하늘뜻펴기’는 2008년 향린교회에서 행한 그의 주일설교의 연속이지만, 단순한 주일설교의 연속모음 또한 아니다. 끊임없이 사회, 정치, 경제적 불의에 맞서 이어졌던 예언자들의 시대정신이, 2008년 오늘의 역사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끊임없이 재해석해간 조목사의 시대정신의 연속이다. 어느 설교집이 책 뒤에 설교일자를 적어놓은 것이 있던가! 단지 설교일자를 기억하려는 메모가 아니라, 그 날, 그 때 우리 사회, 정치 경제 역사 전반에 걸쳐 무슨 일이 있었고, 그때 설교자로서, 예언자로서 무슨 하늘 뜻을 폈는지를 적어 놓은 설교집을 난 여태 한 번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그의 ‘예언자 연속 하늘뜻펴기’는 단순히 성서 예언서 순서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언자들의 활동 시대순을 맞춰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이른 주전 8세기 아모스에서부터 마지막 포로기 이후 하깨에 이르기까지가 그렇다.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2008년 4월에서 12월까지 월별로 진행된 사건이 어떻게 그렇게 예언서 성서 본문과 일치할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조목사가 인용한 칼 바르트의 말처럼, “설교가는 한 손에 성서를 그리고 한 손엔 신문을 들어야 한다”에서 조목사는 신문을 먼저 보고 성서를 펼쳤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일반 설교가들에게나 설교학에 있어서 토론의 대상이 될지는 모르지만, 조목사에게서는 그 순서가 무의미해 보이는 듯 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 이슈들에 따라 성서를 골라 읽었다면 그의 ‘예언자 연속 하늘뜻펴기’가 지금의 순서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예리하게 예언자들의 시대정신을 각 사회 이슈와 관련시킨 그의 예리함의 이유를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성서학자의 눈에는 그가 성서를 너무도 훤히 꿰뚫고 있기에 무엇이든지 관련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성서주석과 현실인식의 관련은 단순한 성서의 해박한 지식을 꿰어 맞추기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는 여호와증인도 잘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깊은 인문학적 인식이다. 앞서 말한 참예언자의 시대정신이 그에겐 깨어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이러한 예리한 예언자의 시대정신과 오늘의 문제에 대한 그의 시대정신과의 관련들을 한 예로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본다. 그의 모든 설교가 다 그러하기에 그렇다.

조목사의 “작은 촛불이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되어” 미가 설교를 보자(132).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의 밭을 빼앗던 미가시대의 불의는 조목사의 눈에는 오늘날 부동산투기로, 도시재개발이란 미명하에 쫓겨나는 가난한 철거민들로 나타나더니, 미국산 쇠고기 파동의 핵심이 월령문제가 아니라, 몇개월동안 협상을 끌고 당기다가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왜 MB가 캠프 데이비드 미국 대통령 별장에서 하룻밤 잔다고 한 그날과 겹쳐 일어났냐는 것을 직시한다. 그토록 급하게 처리한 것에 대해 조목사의 미가서 본문 인용을 보자: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2:1) 조목사가 성서를 먼저 보았을까, 신문을 먼저 보았을까? 얼마나 우문인가? 예언자의 시대정신을 오늘의 현장에서 예리하게 재해석해내는 조목사에겐  모차르트에게 내린 신의 은총이 있고, 이를 바라보는 예언서 전공자인 나는 살리에르적 질투심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둘째,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의 특징 중 그의 용어사용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책들이 책 앞에 「일러두기」를 둔다. 그가 미리 알리는 이 책에서 사용한 용어 3가지는 단순히 조목사가 어떤 성서번역본의 용어를 사용했는지를 일러두려는 것에 있지 않다. 공동성서번역을 따른 이유를 그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에큐메니칼 정신이 그에게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가라사대...”의 번역본 성서로 설교를 해야 더 권위적이라면 이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한 현대판 예루살렘 성전인 보수 대형교회와 이를 지상 최대 사명으로 알고 따르려는 집단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있어서 조목사가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의 말씀을 자주 언급하는 것도 그가 택한 성서번역본의 의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모두는 아니다. 공동성서번역본의 이집트를 개역의 애굽으로 굳이 쓰는 이유를 현 이집트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남기고 싶지 않으려 했다는 그의 의도가 그렇고, 구약과 신약이라는 지난 2천년의 교회사의 숱한 부정적 논쟁을 다 설명하진 않아도, 제1성서와 제2성서라는 표현을 현장 목회자의 설교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조목사가 최근 성서학계의 동향을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조목사가 ‘설교’를 ‘하늘뜻펴기’로 사용하는 것은 그가 순수 우리말을 고집해서라기보다는 제1성서가 말하는 예언자의 선포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밝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되풀이 전달방식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목사가 이해한 제1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할 입을 가진 예언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을 가진 고발자들”(제1부제목)들이다. 그 만큼 그가 바라보는 성서시대와 오늘 이 시대에 대한 그의 눈은 그 어떤 설교자와 성서학자들보다 예리하다. 하느님의 뜻, 한울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의 ‘하늘뜻펴기’의 핵심은 예언자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오늘의 현장에서 펼치는가에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를 ‘민족분단’에 두고 있는 조목사의 시대정신의 언어는 언제나 ‘남한’이라 칭하는 그의 표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사회, 한국교회를 말할 때마다, 그는 ‘남한’이라는 말을 단 한번도 빼놓지 않음으로 제일먼저 아니 마지막까지 허물어야할 예루살렘 성전처럼, 마비된 현 분단개인주의사회와 반공이데올로기분단교회를 향한 그의 외침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대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문제는 그의 일관된 ‘남한’ 용어 하나만으로도 조목사가 펼치려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게 한다. 굳이 통일을 말하지 않아도, 그의 하늘 뜻이 ‘남한’에 펼쳐지는 순간마다 분단을 딛고 통일조국을 향한 결단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세 번째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의 특징은 성서본문의 해석/주석과 오늘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일반 설교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모든 설교가 해당 성서본문을 갖고 이루어지지만 거의 대부분은 해당 성서구절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당성서구절의 몇몇 단어들, 그것도 번역된 우리말에 대한 설교자의 무한한 상상력에 설교의 전부를 기대어 알레고리로 빠지고 있는 대다수의 설교들과 조목사의 ‘하늘뜻펴기’는 사뭇 다르다. 조목사가 다루는 성서본문은 해당 예언서의 대표본문이고, 매번 해당 예언서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며 계속적으로 반복시킴으로 본문의 전체 예언서 내용을 이해시킨다. 그럼에도 따분한 성경공부가 되지 않는 것은 매번 현 시대의 문제를 예언서 본문 곳곳을 제시하여 예언자 시대의 선포가 오늘 현장에서 다시 생생히 살아나게 하는데 있다. 그의 ‘하늘뜻펴기’ 후에 이어지는 파송의 말씀은 전체 설교의 요약이나 반복이 아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설교다. 이는 귀로 듣는 설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세상으로 나가 들은 설교를 몸짓으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고백과 결단의 자기 다짐문으로 이어진다.

네 번째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의 모든 ‘하늘뜻펴기’에 나타난 조목사의 성서풀이에 보인 그의 심미적 문학성이다. 그 대표적 예가 “빼앗긴 땅, 그러나 빼앗길 수 없는 희망” 애가 설교다(247). 그는 애가의 히브리시의 문학적 미학을 소개한다(249). 애가 각 장이 히브리알파벳 22자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 있는 3장은 세 번 반복되어 66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비가를 노래한 애가에 대한 조목사의 히브리시 해석의 절정은 단지 히브리성서원문의 특징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의 심리학의 주창자 엘리자베스 큐블러의 ‘죽음과 죽어감’의 5단계를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애가의 시를 다섯 명 한국 시인의 시 5편으로 비교, 분석한다. 그의 시 선택의 미학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다. 사족 없이 그의 선택만을 소개하면 이렇다. 1단계 ‘부정과 고립’에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단계 ‘분노’에서는 한 주 전 향린교회 1923년 관동대지진 무고한 희생의 조선인 6600명의 추모식을 떠올려 재일조선인 김학렬 시인의 ‘9월의 증언’, 3단계 ‘협상’에서는 불길같은 비운의 여류시인이며 한신인이었던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4단계 ‘절망과 우울’에서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을 그리고 마지막 5단계 ‘수용인가? 탈출인가?’에서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문익환 목사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이다.

마지막으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하늘뜻펴기’에 나타난 성서본문의 시대정신을 오늘의 시대와 관련을 맺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지는 조목사의 시대정신의 주석작업에서 설명한다.


예언자의 시대정신의 주석과 조목사의 시대정신의 하늘뜻펴기

주석을 ‘엑세게시스’ 라 부른다. 밖으로의 ‘엑스’라는 말이 접두어로 쓰여 성서본문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로 흔히 오랫동안 여겨져 왔으나, 최근에는 오히려 ‘에이스게시스’ 곧 ‘안으로’의 뜻인 ‘에이스’를 붙여서 성서 본문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라고도 이해한다. 조목사의 '하늘뜻펴기‘는 이 둘이 복합적이다. 예언자들의 시대 안으로 들어가고(에이스), 그들의 시대정신을 오늘의 현장으로 끌어내어오기도(엑스)하기 때문이다. 들어오고 나가고, 나가고 들어오는 그의 ’하늘뜻펴기‘는 메기고 닫는 우리 장단의 흥겨움까지 베어있다. 그의 ‘에이스’와 ‘엑스’의 자유로움은 살아 숨쉬는 성서의 생명감이요, 조목사에겐 오늘을 살아있게 하는 시대정신이다.

모든 설교의 시작은 해당 성서본문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흔히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하고 운을 띄운 뒤에 해당 성서본문을 읽는다. 2800년전의 예언자에게 주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대전제에서부터 설교는 시작한다. 그래서 성서를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이 둘의 관계, 곧 이스라엘과 오늘 교회를 어떻게 관련짓느냐에 설교의 성패가 달려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그래서 성서본문의 삶의 자리에 대한 학문적 주석 작업과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를 직시하는 인문학적 역사인식의 깊고 낮음이 좋은 설교, 아니 참된 설교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목사의『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다. 단지 그 어떤 설교와의 비교만이 아니라, 그의 제1성서에 대한 학문적 깊이와 예언서에 대한 간명하되 부족하지 않은 풀이에서 예언서전공학자에게 더욱 놀라움을 준다. 설교에 쓰인 그의 예언서 해석은 따분한 구약개론도, 난해한 구약신학도 아니다. 구약전공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짧은 정답은 더더욱 아니다. 숱한 학계의 논쟁을 비껴가지 않으나, 매달려 헤매지도 않는다. 그가 찾아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언자의 시대정신이다.

그 한 예로 다니엘서에 대한 그의 설교를 보자. 구약학계에선 히브리정경의 구분상 다니엘서는 성문서에 속한다. 예언서 시리즈에 왜 다니엘서가 포함됐는지 필자는 의아했다. 물론 조목사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성문서인 다니엘서에 대해 비평적 입장을 소개한다. 내용은 바빌론 시대의 이야기 이지만, 주전 2세기 헬라 시대의 저작임을 소개한다. 그런데 뒤이어 다니엘서는 “단순히 삶의 지혜를 말하는 문학서가 아닌 분명 오늘의 시대를 깨울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예언서”(303)로 그는 말한다. 여기서 학자와 설교자의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서는 학자로서의 조목사가 새롭게 바라보는 예언자의 시대정신으로서의 예언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예언자의 시대정신은 바빌론 시대 느부갓네살의 풀부불에 죽으면 죽으리라로 저항했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시대정신은 400여년의 뒤로 돌아가 에피파네스의 학정에 저항하는 히브리 민중의 이야기로, 그리고 2천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설교를 했던 당일(2008년 11월 9일) 전태일 열사추모회를 통한 오늘 우리 현장의 시대정신으로 풀어나간다. 그래서 “하느님의 의를 위해 선택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의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통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예수의 말씀 해석을 통해 묻는다.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인가, 전태일 열사가 살아 있는 사람인가?”(313) 하고.

조목사의 ‘하늘뜻펴기’는 하늘 하느님의 뜻, 예언자들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오늘 이 땅에 펼치는가 이지만, 그 순서가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다. 반대의 경우이기도 하다. 곧 오늘 이 땅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 답으로 하늘의 뜻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의 순서가 항상 복합적이다. 왔다 갔다 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하늘의 문제이건 땅의 문제이건 때론 길어도 지루하지 않고 짧아도 답답하지 않다. 성서시대와 오늘을 왕래하는 그의 ‘빽투더퓨처’는 치밀한 구성으로 다져져 2800년 전의 예언자들이 2008년에 살아나게 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금 예언자의 시대로 돌아가게도 한다. 그의 시간왕래의 시대정신은 단지 성서와 오늘만이 아니다. 오늘의 또 다른 우리의 어제와도 관련을 맺게한다. 한 예로 “노래하라 고난당하는 사람들아!” 제2이사야 ‘하늘뜻펴기’(150)인 날이 2008년 6월 29일 이었다. 조목사는 21년 전을 상기시킨다.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군사정권의 국민 앞에서의 항복 선언은 같은 패거리인 노태우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술수였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의 바다를 보면서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라는 열흘 전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도 위기를 잠깐 모면해보겠다는 일종의 기만이었을 따름이다”(160)라고 꼬집는다. 그의 시간왕래는 어제와 오늘만이 아니다, 어제, 오늘이 내일이기도 하다. 그 예가 “신앙의 혁명, 민중의 부활, 민족의 통일” 에제키엘 하늘뜻펴기다(287). 에제키엘의 마른뼈 환상에 대한 해석에서 조목사는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따름이지 그것이 믿음의 목표는 아니”(295)며, “환상이라는 단어 너머에 숨어있는 역사의 진의를 붙잡아야 한다”(296)고 말한다. 그래서 마른뼈의 부활은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민중의 부활, 민족의 부활... 바빌론 지배세력의 억압에 대한 민중의 저항”(298)으로 본다. 조목사는 이제 한 주 뒤에 있을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갈구하며 고통 받는 파주의 무건리 형제자매들과 함께하기 위한 현장예배를 위한 전초적 메시지를 던진다(300).  그는 에스겔의 마른뼈의 부활에서도 예수의 부활을 보지만, 보수 기독교인의 영생부활의 개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오늘 역사 현장의 부활의 현장에서 예수를 만난다. 아니 만나러 가자고 선동한다. “부활한 나를 만나려 하거든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부로 가득 찬 예루살렘이 아닌 역사의 현장, 민중이 고통 받는 저 현장으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301)이라 본다. 그래서 그의 ‘하늘뜻펴기’는 어제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오늘 마당에 털 푸덕 펼쳐놓지만 않고, 내일의 현장으로 가져가기 위해 다시 둘둘 말아 내기도 하는 것이다.

조목사의 ‘하늘뜻펴기’가 너무도 일률적인 현실사회비판이 아닌가 하고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조목사가 바라보는 예언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조목사의 일관된 사회비판이 문제가 아니라 성서 본문 스스로가 그렇다. 예언자들의 현실비판이 너무도 구체적이다. 그러니 동일하게 현실의 불의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고발하고 비난하고 심판의 쓴소리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조목사의 ‘하늘뜻펴기’는 다른 의미로 보아 정통 문자주의 설교인 셈이다.

그의 모든 ‘하늘뜻펴기’가 하나의 설교처럼 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서 있던 2008년의 4월과 12월까지의 모습이 여전히 동일한 게 아니었던가! 여전히 불의하기에 동일한 정의를 외쳐야 하고, 여전히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기에 또 다시 동일한 평화를 외쳐야하고, 여전히 돈이 판치는 세상에 짓눌린 가난한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은 한 편의 설교가 아니다. 제1성서 예언서가 16편이고, 제2성서의 복음서 3편 그리고 부록에 4편이 실렸다. 모든 ‘하늘뜻펴기’ 성서 본문이 다르고, 그 관련일지의 사건들도 다르다. 그런데도 조목사가 여전히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실상 성서 전체가 여전히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먼저 아는 일이 중요하다. 조목사의 성서해석의 중심이 그거다. 그가 본 ‘하늘뜻’ 성서 전체 복음의 핵심은 자유와 평화, 해방 그 외 다른게 없다.

조목사의 ‘하늘뜻펴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개인은 이명박이고, 집단은 권력을 가진 정치인과 부자들, 그리고 국가로는 미국이다. 아울러 시대는 신자유주이다. 이는 예언자가 고발하고 비난했던 당대의 왕들이었고, 권력을 가진 정치, 종교지배자들, 그리고 바벨론제국이었으며, 물질만능의 풍요의 이방신앙인 바알숭배였다. 결국 조목사의 현실비판은 성서의 예언자들을 그대로 오늘의 말로 바꾼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니 그의 ‘하늘뜻펴기’가 성서설교일 수밖에 없다. 예언자가 품은 하느님의 뜻이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약자들의 총칭이었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었다면, 조목사가 오늘의 하느님의 사람들로 보는 이들은 기륭전자 비정규노동자들이고, 촛불의 축제를 열었던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신음하던 여중생들이고, 제국의 전쟁연습장으로 피폐화된 평택의 대추리 사람들과 파주의 무건리 주민들이다. 정치권력에 기생한 부패한 종교지배자들인 제사장을 예언자들이 비난했다면, 신자유주의에 기생하여 성장제일주의로 치닫고 이명박을 여호수아로 칭송하는 보수 대형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향한 조목사의 질타 역시 성서의 예언자들과 다르지 않다.

조목사의 설교가 너무 정치색을 띠었다는 지적이 있다면 조목사는 반대하지 않는다. 성서의 예언자들이 이미 “너무 신경과민적”(228)이라고 조목사 스스로 말하기에 그렇다. 그가 철저히 성서적이면 성서적일수로, 예언자적이면 그럴수록 그의 ‘하늘뜻펴기’는 불의한 싸움판의 세상에서 극도로 신경이 과민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조목사의 인용처럼 우리가 오늘 우리 옆에 두어야 할 것은 광부들의 카나리아와 잠수함 승무원들의 한 마리 토끼이듯이, 곧 “민감한 역사 인식과 사회적 위기의식”이다. 조목사는 자신의 ‘하늘뜻펴기’의 보통성을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조금만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이러한 위기의식은 쉽게 가질 수 있다”(228)고. 기독인들이 오늘의 위기적 사회인식에서 촛불과 소금 밀알의 소명을 잊는다는 것을 그는 단지 존재적 의미를 상실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직분을 망각한 일종의 죄악이다”(229)고 고발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마지막 설교는 평화로 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지점에서 오늘 우리가 단지 구경꾼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것으로 충분한지를 묻는다. 이는 정말 “예수께서 원하시는 일이 과연 그것뿐인가?”(231)고 물으며 끝을 맺는 그의 ‘하늘뜻펴기’ 물음이 아니라, 더 강한 그의 항변이요, 매서운 회초리가 아닌가? 그래서일까? 조목사는 책을 읽을 때 정신이 번쩍 나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하늘뜻펴기’는 “양의 신음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자의 으르렁소리”(418)가 되어야 한다고. 서평을 쓰려고 한 번을 읽고, 두 번을 읽어도 정신이 번쩍 나도록 사자처럼 소리치는 조목사를 떠올리지만 지금껏 내가 보아온 조목사는 양같이 순한 분이다. 아니면 양의 탈을 쓴 사자일지도...


1) 박경철 교수는 호서대학교(B.A)와 한신대학교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독일 괴팅엔대학교, 프랑크푸르트대학교, 빌레펠트 베텔신학대학교에서 공부했다(Th.D.).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빌리 쇼트로프와 프랑크 크뤼제만 교수로부터 유물론적 성서해석과 사회사적 성서해석을 수학했고, 지난날 성서해석학의 주류였던 역사비평방법론을 극복하고 현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에 나타난 신학적 의미를 찾는 일을 자신의 구약학의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전북 완주 들녘교회 협동목사를 거쳐 김제에 있는 임상교회에서 담임목회(2004-2007)를 했고, 전주대학교 겸임교수(2001-2006)를 거쳐 2007년 3월부터 한신대학교 구약학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2) 김경재 교수님의 추천사에서 13


3) 사실 조목사의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책에는 ‘설교집’이라는 표현이 없다. 어쩌면 조목사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책이 일반 설교집들이 그러하듯이 여러 설교원고들은 단순히 모아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필자가 ‘설교집’이라고 쓴 표현은 단지 개별 한 편의 ‘설교’에 대한 평이 아니라, 이와 견주어 한 권의 예언서 설교집에 대한 서평을 말하고자 했을 뿐임을 밝힌다.


2009-02-01 15: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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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본 글은 기독교사상 2009년 3월호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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