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원고] 기독교사상 2009, 12월호, 오늘 여기서 읽는 시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박경철 [ E-mail ]
  

오늘 여기서 읽는 시편의 ‘삶의 자리’

오늘 여기서 읽는 시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시편 제1권(1-41편)을 중심으로,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박경철(한신대 구약학 교수)


매주일 설교본문은 다르지만 예배시마다 빠뜨리지 않고 읽는 성서가 있다. 시편이다. 교독문의 대부분이 곧 시편의 본문들이다. 예배가 경배와 찬양이라면 그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노랫말도 시편의 본문들이 주를 이룬다. 예배에 빠뜨리지 않는 기도에 담긴 간구와 탄식, 감사와 찬양 역시 시편의 본문들과 별 다르지 않다. 그렇게 시편은 기독인들에게 비록(?) 옛 계약(구약)의 말씀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도 친밀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말 누구나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일까? 예수의 원수사랑을 무색케 하는 원수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노래하는 시편의 많은 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즐겨 부를 수 있을까? 부를 수 없는 건가? 아니 왜 부르지 않는가?

“오 하나님, 저 놈의 원수가 빨리 뒈지게 하소서. 저 놈을 그 앉아있는 자리에서 당장 끌어내려 길거리에 나자빠지게 좀 해 주소서. 저 놈의 새끼들은 애비 없는 고아가 되고, 저 놈의 여편네는 과부가 되어 길거리를 싸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신세가 되게 좀 하옵소서. 당장이라도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저 놈의 재산을 모두 가져가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들어서 저 원수의 재산을 약탈하게 좀 해 주옵소서. 저 원수 놈에겐 그 누구도 사랑을 베풀 사람이 없게 하시고, 저 원수 놈의 고아 새끼들에겐 은혜를 베풀어 줄 자도 없게 해 주옵소서. 자손도 끊어지고,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이름까지도 지워지게 하옵소서”라고.

경건한 예배에서 과연 위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성가대의 영광스런 찬양의 노랫말로 부를 수 있을까? 그런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렇다. 시편 108편 8절에서 13절에 나오는 기도이다. 그런데 왜 기도하지 못하는가? 왜 찬양곡으로 쓰지 못하는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당해보지 못해서 그렇다. 저토록 복장 터지는 억울함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다. 애끓는 처절한 아픔의 한 맺힌 통곡을 해보지 못해서 그렇다. 단지 돈이 없다고 엄동설한에 머리채가 잡히고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혀 길거리로 내몰려 보지 못해서 그렇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걸했건만 바로 내 눈 앞에서 남편과 아들을 불태워 죽이는 저 저 짐승만도 못한 원수 놈들을 보지 못해서 그렇다. 아 정말 그렇다. 나는 아니기에 그렇다. 저들만의 이야기일 뿐이기에 그렇다. 내가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에 그들의 고통과 한 맺힌 절규가 공동의 기도와 찬양의 노랫말은 절대 맞지 않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시편을 정말 모르는 것이다. 시편의 모든 시들은 공동체의 예배에서 불려지고 읽혀지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지금의 시편은 신앙공동체의 규범이 된 정경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편을 골라 읽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150개의 시가 들어있는 시편에는 물론 여러 종류의 시들이 섞여있다. 고난 받는 자의 탄식도 있고, 감사하는 찬양의 노래들도 있다. 개인의 것이기도 하고 여럿이 부르는 공동체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상황에 따라 시편의 여러 시들 중에 때에 따라 마음에 맞는 것으로 골라 읽어도 되는 것일까? 악인과 의인이 서로가 좋아하는 시들을 골라 읽어도 될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시들만을 골라 암송해도 될까? 그 누구에게도 불편하지 않을 시들만 골라 성가대가 찬양해도 과연 되는 것일까? 부자들이 세를 누리는 교회에서 가난한 자의 편이 되시는 야훼를 노래하는 시들을 교독할 수 있을까? 세상의 권력을 나눠가진 자들이 세를 누리는 교회에선 불의한 법정의 권력을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정의로운 재판을 이끄시는 야훼를 노래하는 시들을 왜 부르지 않는가? 불의한 세상의 권력자를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의 편이 되시는 야훼를 노래하는 시들을 왜 왜 당신들은 부르지 않는가? 아니 왜 우리들은 불러오지 못했을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구원을 얻는 감사의 예배는 달리 보면 살인자들의 잔치와 무엇이 다른가? 피 흘리고 죽임을 당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는 예수의 부르짖음이 시편의 고난당하는 이들의 외침(시 22:1[2]1))에서 따 온 것임을, 예수가 민중의 아픔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거나, 그도 아니면 고난 받는 예수와 고난 받는 민중의 끈을 끊으려는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많아서 그렇다. 아니 그 수가 비록 적더라도 저들의 불의한 힘으로 억울한 자들의 울부짖는 입을 틀어막기에 그렇다.

시편을 골라 읽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시편의 150개의 시들이 개별적으로 읽혀지는 것과 현 150개의 시들이 지금의 모습, 곧 그 ‘책의 자리’(Sitz im Buch)로서 전체 한 권으로 읽혀질 때, 시편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사뭇 다르기에 그렇다. 본 글은 지면상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편의 제 1권인 1-41편의 시들이 서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지를 살핌으로써 공동체 예배를 통해 고난 받는 자들의 탄식이 저들만의 외침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의 것이며, 공동체의 진정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와 노래들이 어떻게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탄식의 외침과 함께 부를 수밖에 없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를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의 자리’로 다가서고자 한다.


‘삶의 자리’(Sitz im Leben)

구약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시편’ 하면, 궁켈(Hermann Gunkel)이라는 학자의 이름과 함께 ‘양식비평’과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는 용어들을 떠올려왔다. 구약의 어느 본문일지라도 각 본문들마다 시대적 정황들을 가지고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언제, 누가, 어떤 상황에서, 또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를 위하여) 해당 본문을 기술했는지의 문제는 지금의 성서 본문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본문의 ‘삶의 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궁금케 한다. 그러나 이상의 질문으로 쉽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본문도 쓰여진 당시의 특정 ‘삶의 자리’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처음 쓰여졌던 본문(만)이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것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본문이 전래되는 과정에 여러 편집과정의 역사를 거치면서 처음의 본문과 차이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그 전래의 역사와 편집의 역사들에 따른 본문의 변화는 각 시대마다 또 다른 각각의 ‘삶의 자리’들이 최초본문에 삽입되거나 또는 변경시켰을 수 있다. 또한 그것만으로 본문의 다양한 ‘삶의 자리’가 고정되어 그치는 것만도 아니다. 어느 본문이 최종적으로 고정이 되었다 하여도, 그 본문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읽혀지고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본문의 ‘삶의 자리’는 본문이 처음 쓰였던 그리고 여러 편집사에 나타난 여러 시대들의 것과 또 다른 의미를 전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해석학의 큰 질문이 놓이게 된다. 저자의 ‘삶의 자리’인가, 아니면 독자의 ‘삶의 자리’인가?

오늘 여기,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시편을 읽을 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시편의 노래와 시들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자리에서도 살아있(다고 믿)는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의 탄식과 우렁찬 찬양의 함성으로 다시 들릴 수 있기를 원할 때, 시편의 개별 시들의 ‘삶의 자리’들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여기, 바로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먼저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지는 성서해석학의 끊임없는 논쟁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거나 우선권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으나, 좀 더 쉬운(?) 쪽을 택하라면 필자에겐 후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개별 시들의 ‘삶의 자리’들을 규명한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설사 그렇다해도 확실치도 않기 때문이다. 보다 더 간단한 이유는 지금, 여기서 시편의 시들이 나, 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일이 필자에겐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의 ‘삶의 자리’는 오늘 그 시를 읽는 나와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된다. 굳이 성서비평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통시적이 아니라 공시적이다.


‘책의 자리’(Sitz im Buch)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150개의 시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23편의 처음과 끝이다. 많은 이들이 암송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러나 23편을 하나의 독립된 시(詩)로 취급해 읽거나 노래 부르는 것과, 이를 개별시가 아니라 그 앞, 뒤의 시들과 연결해서 연작시로 읽고 노래 부르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23편은 시인이 여호와의 성전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희망하며 다짐하는 노래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 연이은 24편은 “누가 여호와의 집에 머물 수 있는가?”(3절)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 윤리적 실천(4절)이 그 전제가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3편을 독립적으로 읽지 않고 현 시편의 최종형태 구성의 측면에서 그 뒤에 연이어진 24편과 함께 읽게 되면, 사회 윤리적 실천행위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종교적 제의 행위와 사회 윤리적 행위가 한 하나님 신앙 안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학적 메시지를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매 주일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23편을 노래한다고 해서 누구나 교인이 아니다. 교회에 들어가기 전, 24편을 상고하고 내가 오늘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신앙의 지도의 필요성이 곧 새로운 시편 읽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편을 골라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으로 읽는 새로운 시편 해석 방법론의 필요성이기도 하다.

현 정경으로서의 한 권 시편 전체의 최종형태가 보여주는 첫 모습은 그 구성이 다섯 권(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107-15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토라의 구성인 5경에 의도적으로 맞추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 권의 마지막 시들의 결구를 보면, 단순히 5경에 맞추기 위한 5권(부)으로 나눈 분류가 아니라, 각 권의 묶음을 전체 한 권 시편의 신학을 위한 의도적 구분과 배열임을 알 수 있다. 제1-4권의 마지막(41:14; 72:19[20]; 89:53; 106:48)은 모두 명사문장으로 시작되고 공통의 단어들(야훼, 하나님, 영원히, 찬양, 아멘)을 가진 송영으로 되어 있다. 특히 제4권의 끝(106:48)에는 ‘아멘’ 뒤에 ‘할렐루야’가 뒤따르는데, 이는 할렐루야 시들로(146-150편) 마무리 짓고 있는 제5권과 의도적으로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도적 묶음은 비록 개별시들의 주제가 다양할지라도 각 권마다 야훼의 구원행위에 대한 신앙고백적 성격들을 다양하게 펼친 뒤에 마지막에는 언제나 그 야훼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송영으로 끝을 맺는 다는 것이다. 곧 시편 각 권마다 그 전체 주제는 모두 ‘영원토록,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할렐루야)이다. 시편 전체 구성은 한마디로 할렐루야다!

아울러 제1-4권의 마지막 송영들에서 나오는 ‘영원히’의 단어는 제5권의 할렐루야 시모음집과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진다. 제4권의 마지막 106:48의 ‘영원히’는 다음 제5권의 시작인 107:1과의 연결이기도 하다. 시편의 마지막 할렐루야 시모음집(146-150)은 중요한 단어와 주제로 서로 연결고리들을 갖고 배열되어 있다(146:10=147:12 / 147:4=148:3 / 147:11=149:4 / 147:20=148:14 /148:14=149:1,9 / 149:3=150:4; 149:9=150:6). ‘영원히 야훼를 찬양하라’는 제1-4권의 송영들을 이어받은 송영집인 시편 마지막 할렐루야 시모음집들은 그 처음 146편에서 ‘나’의 찬양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 147편에는 ‘우리’와 ‘예루살렘과 시온’으로 확장되고, 148편에는 ‘모든 것들’ 곧 ‘주의 모든 천사들’과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해, 달, 별, 하늘, 땅, 물, 바다, 산, 들, 식물, 동물, 빈부귀천, 남녀노소...)이 찬양한다. 149편에는 시온에 사는 ‘모든 주의 성도들’(148:14과 연결)을 구체적으로 지목한 뒤에, 마지막 150편에서 이제는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까지 야훼를 찬양하라는 그 범위를 점차로 확대하는 의도적 배열의 구성을 보여준다.


시편의 처음(시 1-2편)과 끝(시 149-150편)

시편의 첫 장은 ‘토라’와의 연결을 통해 ‘복 있는 자’를 노래하고, ‘토라’를 묵상하는 것이 악을 버리고 의를 실천하는 길이며, 그것이 곧 복된 길임을 말한다. 이 주제는 시편의 모든 시들의 가장 중심된 주제를 말하는 것이다. 시 1편과 2편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 시 1-2편은 그 시작(1:1)과 끝(2:12)을 모두 ‘복 있는 자’로 연결 지어 하나의 통일된 시로 보이게 한다. 또한 1:2 과 2:1에 한글번역은 ‘묵상하다’와 ‘꾸미다’로 쓰였지만 여기 동일한 단어(하가)를 쓰고 있다. 아울러 1:6의 ‘악인의 길은 망하리라’는 2:12에서 ‘길에서 망하리니’와 동일하다. 비록 2편의 주제가 1편과 상이해 보이지만, 2편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뭇 민족들은 1편에서 말한 악인과 같다. 야훼가 악인들의 길을 망하게 하시듯(1:6), 세상의 군왕들이 야훼께 반역하며 걸어가는 그 길을 망하게 하신다(2:12).

시편의 가장 마지막 장인 150편은 시편 전체를 할렐루야 송영으로 끝을 맺고 있는 마지막 할렐루야 모음집(146-150편)의 끝임과 동시에, 시편 전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할 수 있다. 1편과 150편의 이러한 고유한 시편 전체 한 권을 위한 구성적 역할을 고려한다면, 시편 전체의 처음과 마지막을 잇는 2편과 149편은 서로 놀랍게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야훼가 왕을 ‘시온’에 세웠다는 2:6의 말씀은 시편의 마지막(149:2)에 ‘시온의 주민이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는 말과 서로 연결된다. 또한 이방 열국에 대한 심판의 선언 역시 시편 전체의 처음(2:8-9,12)과 끝(149:7-9)의 공통 연결 주제이다. 특히 ‘왕’에 대한 대조적 표현이 시 2편과 149편에 동시에 나타난다:


A            2:2f. 세상의 ‘왕’들이 대적함(3절: ‘족쇄를 벗고 쇠사슬을 끊자’)

                  2:6    시온에 야훼가 ‘왕’을 세움

      B'              149:2  시온의 왕으로 인해 즐거워 함

A'            149:8 세상 왕들에 대한 심판(‘족쇄로 채우고 쇠사슬로 묶음’)


이방에 대한 심판 선언의 표현으로 쓰인 “질그릇같이 부술 것”(2:9)은 이방 열국 심판을 위해 성도들의 손에 “두 날을 가진 칼”(149:6)이 들려 있다는 것과도 서로 연결된다. 세상의 군왕들이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거역하며 “족쇄 벗고 사슬을 끊어버리자”고 하지만(2:2-3), 결국 그들을 “족쇄로 채우고 쇠사슬로 묶을 것”이다(149:8). 또한 이방의 왕들과 민족들에  대한 심판(149:9)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1:5)과 서로 연결된다.

이상과 같이 시 2편과 149편의 연결은 시편의 처음과 끝이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된 한 권으로서의 신학적 의미를 보여준다.


제1권(시 3-41편)의 구성

1-2편을 제외한 제1권의 3-41편은 다시 네 묶음으로 구분되는데, 3-14편; 15-24편; 25-34편 그리고 35-41편이다. 이렇게 넷으로 구분되는 구성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묶음인 3-14편은 탄식과 간구의 시가 앞(3-7편), 뒤(9-14편)로 있고, 가운데 찬양시(창조시) 8편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제1권의 첫 묶음인 3-14편의 처음(3:9)과 끝(14:7)은 모두 야훼의 백성을 위한 야훼의 구원/도움이 공통 주제로 연결되어 있으며, 첫 묶음이 원수(대적)들의 “하나님이 너를 돕지 않는다”는 조롱으로 시작(3:3)한다면, 마지막(14:7)은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고 끝을 맺는다. 두 번째 묶음(15-24편)의 시작(15편)과 끝(24편)이 성전에 들어가는 입장시를 말한다면, 첫 번째 묶음은 성전 입장을 향하여 나아가는 시들로 배열되어 있다. 곧, 시인은 주께서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실 것임을 믿고(3:5), 그에게 올바른 ‘의의 제사’를 드리기를 희망하며(4:6), ‘야훼의 집’으로와 ‘주의 성전’을 바라본다(5:8). 야훼께서 빨리 나타나시기를 간구하고(6:4), 야훼께서 재판장으로 ‘법정’에 나타나셔서 의의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바란다(7:8-9). 이어서 7-9편은 ‘야훼의 이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재판장이신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니(7:18; 8:2,10; 9:3), 야훼가 곧 ‘시온’에 계시고(9:12), 시온의 성문(법정)에서 구원(의의 재판)을 베푸시니(9:15), 이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억눌린 자들을 돌보시는 행위다(10:10,14,17,18). 야훼가 성전에 계심을 선포하고(11:4),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는(12:6) 야훼를 간절히 기다리니(13:6), 이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시온에서 나와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14:7).

이상의 구성이 보여주는 것은 3-14편에서 야훼의 구원의 행위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그 장소는 무엇보다도 시온의 성문법정에서의 정의의 판결을 가리킴으로써,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들 및 야훼의 거룩한 산 시온에 머물 수 있는 이들의 자격을 사회정의와 윤리의 실천 강령으로 그 요건으로 제시하는 15편과 의도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묶음인 15-24편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시들이 주제별로 서로 교차대구(chiasmus)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A 성전입장시:  시 15편

        B    신뢰시:         시 16편

          C          탄식시:         시 17편

            D                제왕시:         시 18편

              E                      창조/토라시:    시 19편

            D'                제왕시:         시 20-21편

          C'          탄식시:         시 22편

        B'    신뢰시:         시 23편

      A' 성전입장시:  시 24편

이상의 15-24편의 의도적 교차대구의 구성이 보여주는 그 중심에 놓인 19편은 이 전체 묶음의 처음(15:2=19:13f)과 끝(24:4=19:13f)을 연결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구성이 보여주는 신학은 이렇다. ‘야훼의 종’(19:12)은 창조주 하나님(19:1-7)께서 주신 토라(19:8-15)안에서 ‘깨끗한’(15:2=19:13f; 24:4=19:13f) 삶을 사는 길만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으며(15편; 24편), ‘죽음의 세력’(16:10; 23:4)으로부터 지켜주시는 야훼를 의지하오니, 부디 ‘원수들’(17:9-12;  22:13-22)로부터 구원해 주셔서, 주께서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주시기를(18:51; 20:10; 21:2) 바란다는 것이다.

세 번째 묶음인 25-34편은 그 처음(25편)과 끝(34편)이 모두 알파벳 시편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시편은 공통의 단어들을 통해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두 시의 관련은 처음이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린다”고 시작하여(25:1), 구원의 간구(“건져주소서!”)로 끝을 맺었다면(25:22), 끝에 가서 주님의 종들의 영혼을 '건져주심'을 감사함으로 끝을 맺음으로써(34:23), ‘간구’-‘감사’의 구조를 갖는다. 34편은 알파벳 첫자 ‘알렙’으로 시작해서(2절) 끝자 ‘타브’로 끝난 뒤(22절), 다시 ‘페’로 시작하는 한 절(23절)을 더 쓰고 있다. 22개로 이루어진 히브리어 알파벳의 가운데 11절의 시작인 ‘라멧’과 연결하면, 이 시는 ‘알라프’, 곧 배우다(qal), 가르치다(piel)의 뜻을 가리켜, 34편 가운데 있는 11절의 ‘야훼를 경외하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시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특히 이 세 번째 묶음의 첫 시인 25편의 중심(25:4,5,9)이 되는 단어이고, 25-34편중에 이 단어는 오직 25편과 34편에만 나온다.

네 번째 묶음인 35-41편의 마지막 41편은 첫 번째 다윗시 모음집인 제1권의 마지막 시편으로 제1권의 첫 번째 시인 시 1편과 다음과 같이 같은 중요 단어들을 통해 서로 연관되어 있다:

복 있는 자

즐거워 함

일어남

망하다

1:2=41:2

1:2=41:12

1:5=41:9

1:6=41:6

1편과 41편의 연관은 다분히 제1권의 통일성을 위한 하나의 묶음을 염두에 둔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41편은 그 앞의 40편과도 연결된 시이다. 우선 이 두 시편은 가난한 자의 기도로 서로 연결된 시이다(40:18=41:2). 비록 원수들이 조롱하지만(40:16; 41:7-8),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기도자는 복된 자이다(40:5=41:2). 41편이 제1권의 마지막 시로서 1편과 관련이 된다면, 제1권의 네 번째 묶음의 마지막이랄 수 있는 40편은 41편과 연결됨과 동시에 다음의 연결고리들을 통해 그 처음 시인 35편과 앞, 뒤를 둘러싸고 있는 시이다. 네 번째 묶음의 첫 시인 35편에도 역시 원수들의 조롱하는 말(35:21,25)이 있고, 이들이 결국에는 ‘수치’를 당할 것이며(35:26=40:15), 야훼를 기뻐하는 자들은 ‘야훼가 위대하다’고 노래할 것이다(35:27=40:17). 35-41편의 전체 구성은 힘없고 가난한 자가 고통에 처해 있을 때, 원수들은 기도자의 고난을 감싸주기는커녕 오히려 조롱하며 악한 궁리나 한다(35:15-16; 35:2-5). 하지만 기도자는 저들이 끝내는 수치를 당하고 넘어질 것임을 안다(35:26-27; 36:13), 그러니 악인이 잘 되는 것 같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나 오직 야훼의 법도를 지키며 야훼를 신뢰하면 그가 구원하심을 확신한다(37편). 이 믿음 가운데서 주위의 사람들의 무관심과 악담과 음모 가운데서도(38:12,13), 대꾸하지 않고(39:2-3) 오직 야훼만을 기다리며 고통 중에 야훼를 간절히 찾는다(38-39편). 이제 40-41편은 야훼를 간절히 찾고 기다림의 응답을 노래하며 감사한다(40:2f.). 시편의 제1권의 마지막 4번째 묶음은 마치 욥기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듯하다. 고난 받는 욥의 탄식과 야훼의 구원을 간절히 부르짖는 모습이 그렇고, 그를 찾아온 세 친구들의 태도에 대한 욥의 질타와 악인이 잘되는 것 같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것들과, 오직 야훼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욥의 모습이 그렇다.

시편 제1권의 3-41편 첫 번째 다윗시모음집의 전체 구성이 주는 메시지는 원수(대적)로 인한 위기에서의 탄식과 야훼의 구원에 대한 신뢰와 응답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1권의 각 네 묶음들의 가운데 있는 시들은 모두 찬양시이다(8, 19, 29)이며, 특히 19편과 네 번째 묶음의 가운데 있는 37편의 알파벳 시는 무엇보다도 야훼의 법(토라)를 중요 핵심주제로 삼고 있다(37:30).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이제 다시 정리해 말해보자. 시편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었나?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배시에 신앙공동체 모두가 불러야 할 시편의 기도와 간구, 감사와 찬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야훼의 구원의 행위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그 구원의 구체적 실현이란 가진 자들, 세상의 불의한 왕에 의해 저질러진 온갖 불법과 불의를 심판하시는 시온의 성문법정에서의 야훼의 정의의 판결이다. 시온이란 정의의 재판이 이루어지는 법정이며, 신앙공동체가 예배하는 신앙의 장소인 성전이 있는 곳이다. 오늘 누가 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성도인가? 야훼의 정의의 길, 그 가르침, 토라를 준수하는 자이다. 가난한 자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 야훼의 정의의 도(道)를 따르는 자이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가는 이들은 정의의 야훼를 의지하는 자들이며, 이들이 믿는 믿음이란 정의의 야훼께서 저 원수들을 분명코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지금은 세상의 원수가 승리한 듯 보이나, 세상의 왕이 아니라 야훼께서 직접 기름부어 세우실 왕이 마침내 승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고난 받는 가난한 자들의 억울한 하소연과 외침에 비록 세상의 원수들은 조롱하며 오히려 악한 궁리를 일삼지만 저들은 끝내 망할 것이다. 비록 주변의 많은 이들의 무관심과 악담과 음모들 속에서도 오직 정의의 심판주가 되신 야훼만을 기다리며 고통 중에서도 야훼만을 찾는 믿음이다. 감사한다면 분명 응답해 주실 야훼임을 믿기에 드리는 감사와 찬양이다. 이것이 시편이다. 고난과 탄식이라면 불의에 의한 것이며, 감사와 찬양이라면 정의의 심판뿐이다. 이것이 시편의 ‘삶의 자리’이고 골라 읽지 않은 시편의 ‘책의 자리’이다.

바로 이렇게 읽는 시편의 오늘의 ‘삶의 자리’에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고난의 ‘삶의 자리’에 위로의 촛불을 켜는 이들이 있다. 탄식과 분노의 ‘삶의 자리’에 두 주먹 불끈 쥐고 촛불을 켜는 이들이 있다.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저 흑암의 세상 법정에 공의와 정의의 빛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고난 받는 자의 애끓는 탄식의 외침이 어느새, 정의의 심판을 기다리는 믿음과 희망의 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아 죽인 골고다의 외침이, 세상의 불의한 권력과 자본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불태워 죽이던 바로 바로 우리 땅 남일당에서 다시 들리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는 하나님의 딸들의 탄식이 다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있다. 탄식과 감사가 둘이 아니다. 탄원의 간구와 감사의 찬양이 결코 둘이 아니다.

용산참사 269일째 되는 날 남일당 골목 담벼락엔 검은 천에 시 한편이 걸렸다. 시인은 촛불을 물대포로 끄는 개독인 장로가 아니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정의의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 장로님이다.


야만의 시간, 역사의 땅 - 용산참사 269일째 되는 날에(2009년 10월 15일)

고 춘 식


지금 우리는,

국가의 이름으로

피맺힌 절규를 <방치>하는

참으로 가당찮은 현실을 본다.


오늘 우리는,

<무관심>과 <무대응>이

이토록 잔악무도한 폭력이 되고 있는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현장을 다시 목격한다.


9개월이 아니다.

269일이 아니다.

6,456시간이 아니다.

387,360분이 아니다.

23,241,600초?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들이 비웃으며 방치한 시간들,

그 잔인한 시간들은 이미

매섭고 차디찬 비수들이 되어

절망을 살고 있는 기가 막힌 가슴들을

샅샅이 저민다, 뒤적인다.

확인하면서 살점을 발라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은

269일, 그 터무니없는 세월 동안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가난밖에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라>마저 빼앗아 버렸다.

<나라>를 빼앗긴지라 <국민>이 못 되는 <사람>들이

여기서 지금 통곡하고 있다.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아버지들의 온 몸이 불에 타고

남편들의 생명이 일망타진되고,

가난들이 초전박살을 당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이 아직도 모자라

이토록 잔인하고 철저하고 끈질긴 복수,

끝도 모를 모독으로 앙갚음을 당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 작고 가난한 절규 하나를 잠재우기 위해

갖가지 <국가> 권력 기관들이 똘똘똘똘 뭉쳐서

서로 자기들만 아는 눈짓을 하고 있는 그 이유를 모른다.

국가 총동원령을 내린 그 이유를 모른다.


아, 그러나 그 비겁과 야만의 시간이 길어진 그 세월에

새로운 시작들이 이곳에서 잉태되고 있으니 놀라워라.

새로운 역사들이 태동하고 있으니 놀라워라.

새로운 광야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으니 놀라워라.


가장 야만적인 살육이 자행된 이곳이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그 야만이 범접하지 못하는 땅이 되었지 않은가.


온 국토, 온 산하, 온 국민의 가슴을

온통 거짓과 꼼수로 먹칠을 해대는 정권,

그러나 이곳만은 그 정권의 거짓과 위선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땅이 되었지 않은가.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한 이 땅에,

이 아스팔트 위에,

손가락으로 파서 새겨 놓은 <사람들>의 증언,

피 묻은 역사의 증거들이 선명하지 않은가.


민주, 인권과 자존과 사람다움을 새롭게 깨우치고

그 다짐들을 새겨 넣은 부르짓음이 뚜렷하지 않은가.


비겁투성이의 철면의 나라에서,

비굴 아니면 굴종을 선택해야 하는 부끄러운 나라에서,

유일하게 <인간>으로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나니

그 누구도 오염시키지 못할

성역을 이루어 놓았지 않은가.


지금 여기는 <비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유일한 땅이다.

지금 여기는 저들만의 대한민국을 거부하는 유일한 땅이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법들이 들어올 수 없는 땅이다.


이곳은 더럽혀지고 처참해진 대한민국에서

오직 하나뿐인 지순한 영토가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지금 이 269일의 <현장>은

국민과 생명과 인권과 가난을 무참히 모독하는 자들의

준열한 법정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서슬 푸른 형장이 되고 있지 않은가.



1) 시편의 많은 시들의 절수는 한글성경번역본들과 히브리성서의 절수 표시와 다르다. 이는 각 시들의 표제어들을 히브리성서가 하나의 절로 여긴데 반해, 한글성경번역본들은 이를 그 다음절과 함께 1절로 묶었다. 그래서 히브리성서 절수가 한글성경번역본들의 절수보다 한 절씩이 적다. 본 글에서는 한글성경과 히브리성서의 절수가 다를 경우, 이를 일일이 다 표기하지 않고, 모두 히브리성서의 절수를 따랐음을 미리 밝혀둔다.


2009-11-17 13: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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