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논문발표]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새로운 유대제의공동체 구성원에 관한 논쟁
  박경철
  

아래 논문은 2010년 9월 30일 한국구약학회(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발표할 논문입니다.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새로운 유대제의공동체 구성원에 관한 논쟁

Zur Problematik der Mitgliedschaft der neuen Juden-Kultgemeinde in der nachexilsichen Zeit

종말론적 구원의 대상자로서의 이방인과 고자, 그들은 누구인가?

-사 56:1-8을 중심으로-


박경철(한신대, 구약학)


1. 들어가면서


한국 현대사의 중요 논쟁은 무엇보다도 해방 전후사의 문제로 집결된다.1) 왕조체제이후 제국의 침략에 의한 식민통치 그 이후, 새로운 민족공동체 건설에 있어서 그 정체성의 문제다. 이 문제를 여기서 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데 있어서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성서신학에 있어서도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점을 거론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현 정경의 형성과 더불어, 단지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에 관한 신학적 논의뿐 아니라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중심이기도 하다.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본토로 귀환한 유대공동체는 무너진 이스라엘의 왕국, 곧 새로운 다윗왕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포로기 이후 초기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슈는 무엇보다도 성전재건에 있었다. 문제는 성전재건을 통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제의 공동체 건설에 있어서 그 구성원에 대한 논의였다. 본 논문은 이 점에 집중하여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신학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다. 특히 포로기 이후 새로운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논의의 중심이 된 ‘이방인’에 대한 문제와 함께, 이사야 56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고자’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본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새로운 유대제의 공동체 구성원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기독교계도 이들을 위한 교회와 신학의 입장을 취하기 위하여 성서를 다시 읽으려는 일들이 일고 있다.2) 구약성서의 사회약자보호법과 관련된 여러 본문들에 ‘이방인’에 대한 본문들을 찾아 오늘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약자들을 위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관심과 노력3)을 기울여야 하는 데에는 누구나 긍정적이다. 그런데 사회약자들을 지칭할 때, ‘이방인’,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갑자기 ‘고자’를 거론한다면 너무 생뚱맞지 않을까? 사 56장이 그렇다.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 56장은 ‘이방인’과 더불어 ‘고자’를 특정하여 거론하는가?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공동체 구성에 있어서 이 두 그룹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B. Duhm 이래 이른바 ‘제3이사야’(Tritojesaja)로 구분된 사 56-66장의 그 첫 장인 사 56장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말론적 이상을 그리고 있다.4) 그런데 3절 이하에 종말론적 구원의 대상자로 ‘이방인’(브네/벤-한네카르)5)과 ‘고자’(핫사리심/핫사리스)6)를 지목하고 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사 56장은 무엇 때문에 이들을 지목하였고, 현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2. 사 56장의 ‘이방인’과 ‘고자’의 출신에 대한 문제


1) 이방인’(브네/벤-한네카르)은 누구인가?

우선, ‘이방인’이라는 개념이 구약성서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게르, 토샤브7), 짜르8), 노크리/네카르)에 이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고, 그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게르’9)는 자신의 집을 떠나 친척도 소유지도 없는 다른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아가던 당시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키지만10), 이들이 반드시 혈통이 다른 이민족 개념의 ‘외국인’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으로 지칭될 때는 ‘짜르’와 ‘노크리/네카르’가 쓰였다.11) 오늘날 ‘외국인노동자’를 ‘이주노동자’라 부르는 이면에는 그들을 배타적 민족주의의 틀에서 보려는 ‘외국인’ 또는 ‘이민족’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인식이 깔려있다. 아울러 ‘탈북자’에 대해 ‘새터민’이라고 용어를 고쳐쓰는 이면에는 남한과 북한을 서로 대립적이거나 이질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으며, 아울러 어느 한 편에 체제우월적 인식을 줄 수 있는 측면을 지양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면에서 ‘새터민’은 구약성서의 ‘게르’로 가리킬 수도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들의 땅에 있던 ‘이방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주제는 매우 중요하게 곳곳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한편으론 ‘이방인’(이방민족)과의 분명한 구분을 말하기도 하고12), 또 한편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법적 요구들이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구약성서 곳곳(십계명13), 신명기법전14), 제사문헌1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 약자들인 ‘이방인’(게르)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법적 책임을 지닌다.16) 그런데 특이하게도 국가이전시기 본문에는 ‘이방인’(게르)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17) 이에 대해서 크뤼제만은 이스라엘 왕조국가가 생성되기 이전 시기엔 ‘이방인’(게르)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18) 비로소 예레미야(7:6; 14:8; 22:3)와 에스겔(14:7; 22:7,29; 47:22f.)에게 가서야 이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주전 7,6세기, 곧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해 수많은 망명객들이 생겨나면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19)

그런데 사 56장은 이상의 구약성서 곳곳에 나타나는 ‘이방인’ 사랑과 보호에 관한 주제도 아닐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단어가 다르다. 즉 ‘게르’가 아니라 ‘벤/브네-한네카르’이다. 특히 이사야서의 제3부(56-66장)에는 ‘게르’ 대신에, ‘네카르’만 나온다.20) 구약성서에서 ‘노크리’와 ‘브네-네카르’가 나오는 여타의 본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사 56장의 ‘이방인’(브네/벤-한네카르)은 첫째, 신 15장 3절과 23장 21절에 나오는 ‘외국인’(노크리)은 아니다. 여기에는 기본 경제법에 관한 사항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여기 언급된 ‘이방인’은 정기적으로 채무를 갚아야 했으며, 이자금지법에서 제외된 자들을 의미했다.21) 두 번째로 창 17장 12절, 27절에 나오는 외국에서 돈주고 사 온 노예로 할례를 받아야 하는 그런 ‘이방인’(브네-네카르)개념도 아니다. 사 56장에서는 전혀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사야서내 다른 본문들과 비교하면 어떤가?22) 예를들어, ‘성벽공사노동자’(60:10), ‘밭(포도원) 일꾼’(61:5)으로 쓰인 ‘브네-네카르’는 아마도 느헤미야 시기 노예이거나 날품팔이였을 것이다.23)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지만, 사회경제적으로 빈약한 하층민들로서 종교제의에서도 빗겨 서있던 자들24)이었다. 사 56장 3절과 6절에 나오는 ‘브네/벤-한네카르’와 60장 10절과 61장 5절에 나오는 ‘브네-네카르’를 동일하게 볼 수 있는 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사 56장의 ‘이방인’은 무엇보다도 야훼의 제의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25) 특히, 사 56장의 ‘이방인’(브네/벤-한네카르)은 이사야서 다른 본문들에 나오는 ‘이방인’(브네-네카르)과 다르게 정관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는데 여러 문제가 있다.26) 이들은 ‘외국인’인가? 아니면 스 2장 59절 이하(=느 7:61f.); 6장 21절과 느 10장 29절에 나오는 출신이 불분명한 이들인가? 그도 아니면 ‘땅의 민족들’에 의해 불결한 자들로 구별된 자들인가?

사 56장에 나오는 ‘이방인’(3절 단수: 벤-한네카르, 6절 복수: 브네 한네카르)은 단순히 ‘외국인’이 아니라, 야훼를 ‘섬기기’(V.6aα)위해, ‘야훼께 연합한 자’(V.3aα, 6aα)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V.6aβ)하고, ‘그의 종이 되고자’(V.6aγ)하는 이들이다. 그 뿐 아니라. ‘안식일이 더럽혀지는 것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자’(V.6bα)이며27),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자’(V.6bβ)이다. 마침내 이들은 ‘야훼의 거룩한 산’, 곧 그의 ‘기도하는 집’으로 제물을 갖고 올라가게 되는 자들이다(V.7a). 사 56장은 여기 나오는 ‘이방인’의 출신성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않기에 이를 규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 56장의 현재의 구성을 보면, 3절과 6절의 ‘이방인’은 7절 하반절에 따라 ‘온 민족들’로부터 온 이들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은 야훼가 이미 모은 이스라엘 백성들, 그 위로 더 불러모을 이들이기에(V.8b), ‘흩어졌던(쫒겨났던) 이스라엘 백성들’(V.8aβ)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 56장은 여러 주제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방인’의 문제는 사 56장의 여러 주제들과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56장의 종말론적 표상은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와 사회정의의 문제와 제의의 문제가 함께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2) ‘고자’(사리스/사리심)는 또 누군가?

사 56장이 말하는 ‘고자’(사리스/사리심)란 음낭을 제거해 생식능력이 없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당시 일반적인 궁중관리28)를 의미하는가? 아울러 ‘고자’의 출신성분이 비유대인 궁중관리인가(참고, 창 37:36; 왕하 23:11; 렘 38:7; 단 1:3.7ff.)29), 아니면 포로기 이후 본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출신인가?(참고, 사 39:7=왕하 20:18; 24,15)30) 귀환명단 보도명단(스 2:1-70=느 7:4-72)에 이들이 들어 있지 않기에, 그들이 본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출신인 지는 불분명하다. 출신성분을 분명하게 규명짓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사 56장 1-8절에 나오는 ‘고자(들)’의 탄식을 보면 이들이 ‘이방인’의 출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자(들)’은 ‘이방인’이 제기하는 야훼가 자신들을 자기(야훼) 백성들로부터 떼어낼 수도 있을 것(V.3aβ)에 대해 항변하거나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과 ‘고자’ 두 특정부류를 지목하여 각각의 문제들을 제기하는 사 56장을 통해, 여기서의 ‘고자’는 ‘이방인’과는 달리 이스라엘 출신으로 보는 것이 어울린다. 3절에서의 ‘고자’(핫사리스)가 “보라, 나는 마른 나무다”라고 항변 내지는 탄식하는 이유가 다음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면, 그리고 이것이 5절의 “아들들과 딸들”보다 더 좋은 영원한 이름을 주겠다는 야훼의 구원-희망의 약속과 관계된다면, 여기서의 ‘고자’는 생식불능의 남자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궁중관리인 ‘내시’를 가리키는 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무엇 때문에 사 56장의 종말론적 구원의 대상으로 이 두 특정그룹을 언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3절 상반절과 6절 상반절에 나오는 “야훼께 연합한”(hwhy-la hwlnh)이란 표현은 무슨 뜻인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는 이방인들이 ‘야훼성전제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본다.31) 또한 6절에 나오는 “그를 섬기기 위하여”(wtrvl)의 ‘섬긴다’(trv, Pi.)는 뜻은 야훼 제의를 위해 시중드는 것으로, 특히 성전에서의 제사장직32)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만약 3절 이하가 이방인의 야훼제의 참여 허락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면, 특히, 그들의 제사장직의 제의행위를 허락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사야 56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제의참여 주제가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시대를 여는 하나의 징표라면, 중요한 것은 이 주제가 이스라엘의 사회정의 실천의 문제(V.1-2)를 종말론적 표상과 함께 이스라엘과 열방과의 관련에서 다루고 있는 현 사 56장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방인’은 야훼가 자기 백성에게서 자신들을 떼어낼(구별할) 것(ldb, Hi.)33)이라고 말(생각)하지만, 야훼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금한다(V.3).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그 이방인’은 ‘야훼께 연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야훼는 그들을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떼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더 포함 시키려고 한다(V.8).

거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3절의 이방인의 탄식에 주목하면서, 이를통해 포로기 이후 유대 공동체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방인의 탄식은 야훼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탄식속에 야훼가 ‘너’가 아니라 제3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당시, 누군가 아니면 그 어떤 단체 또는 어떤 권력기관(Instanz)34)이 야훼의 이름을 빌어 이방인이 야훼 제의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35)으로 인한 이방인의 탄식이라고 본다. 이로부터 사 56장 3절 이하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들은 거의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 곧 이방인의 제의 공동체 입교 거부에 대한 물음들에 집중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포로기 이후 당시 외국인, 혼혈인36)들의 제의참여 및 제의공동체 참여, 나아가 이들과 함께 사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포로기 이후 본문들을 사 56장과 관련지어, 사 56장은 그러한 입장들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과연 사 56장이 그러한 포로기 이후 본문들과 관련을 맺는 것인지, 그리고 사 56장이 포로기 이후 본문들이 보이는 이방인 제의 참여 거부 입장에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나아가 도대체 사 56장은 ‘이방인’과 ‘고자’ 두 특정 그룹을 지목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다시 새롭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3. 사 56장과 겔 44장의 제의 공동체 구성원 관련


사 56장과 관련하여 비교할 첫 번째 본문은 겔 44장 6절 이하이다.37) 겔 44장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계약을 깬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이방인’(브네-네카르)들을 성전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곧 겔 44장은 ‘이방인’의 성전제의 참여 거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Fischbane는 사 56장은 겔 44장, 그리고 레위인 외에는 누구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민 18:1-7과 반대되는 본문으로, 포로기 이후 새로운 변화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38)  Berges 역시 사 56장과 겔 44장은 주제뿐 아니라 여러 개념들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39). 그러나 Blenkinsopp40)와 Schramm41)은 사 56장 3-8절과 겔 44장 4-14절은 이방인에 대하여 서로 관련이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본다. 우선 사 56장에서는 ‘이방인’에 대하여 항상 정관사를 붙여 쓰고 있지만(V.3a: rknh-!b; V.6a: rknh ynb), 겔 44장에는 ‘이방인’에 대하여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V.7a: rkn-ynb; V.9a: rkn-!b). ‘이방인’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정관사를 쓰고 있는 본문은 구약성서 전체에서 사 56장이 유일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겔 44장이 강조하려는 점은, 여기서의 성전노예로 일했던 ‘이방인’은 몸과 마음에 할례받지 않은 자들로 비이스라엘인42) 이다. 사 56장에서는 ‘이방인’들에게 겔 44장이 언급하는 것과 같은 할례의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겔 44장 10-14절에서는 단지 이방인들의 성전출입의 문제뿐 아니라, 이들을 성소에 들여오게 하여 성소를 더럽히게 했던 레위인들의 범죄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이들이 제사장 직무의 일을 볼 수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 56장의 ‘이방인’이 겔 44장이 말하고 있는 할례를 받지 않은 성전노예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겔 44장은 사 56장에서 ‘이방인’과 함께 중요한 관련으로 다루고 있는 ‘고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겔 44장과 사 56장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 56장의 ‘이방인’은 단지 외국인이거나, 할례받지 않은 성전노예가 아니라, 제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야훼제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자들이며, 정의를 행하고(1-2절 관련), 야훼께 연합한 자들이며, 안식일을 지키고 야훼의 계약을 붙잡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 56장은 에스겔이 말하는 ‘이방인’의 성전제의 참예금지 사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보다는, 이와 관련성이 없는 다른 새로운 비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사 56장과 에스라-느헤미야의 ‘이방인’ 적대 정책과의 관련


사 56장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이것이 에스라-느헤미야의 이방인 적대 정책과 반대되는 입장이라는 견해이다(참고, 스 9:1-4; 느 13:1-3)43). 그러나 사 56장 3절 이하가 에스라-느헤미야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에스라-느헤미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 56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인물들과는 전혀 다르다. 사 56장의 인물들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로 거론되고 있는 ‘이웃민족들’(스 9:1; 느 10:29)이나, 특히 ‘이방여인들’(스 10:2,10,11; 느 12:27)과 그들의 ‘자녀들’(스 10:3)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땅의 백성들’(스 10:11; 느 10:29)도 아니며, ‘모든 혼혈인들’(느 13:3)도 아니다.44) 에스라-느헤미야에 나오는 ‘이방인’ 역시 겔 44장에서 본 것과 같이, 사 56장과 달리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Schramm은 사 56장은 이방인 남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외국인 여자들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45). 그는 ‘에스라법’을 받아들인 자46)는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 56장 3-8절의 안식일 준수와 계약을 붙잡으라는 요구는 에스라-느헤미야의 입장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개종한) 이방인에게도 회개의 가능성47)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라고 본다(참고: 스 6:21).48)

에스라-느헤미야의 보도는 포로기 이후 비록 유대인들이 외국인들(특히 외국인 여자들)과 함께 사는 문제를 거론하지만, 이방 여인들과의 이혼에 대한 문제는 단지 스 10장 3절과 11절 이하에만 거론되고 있으며, 그 또한 모든 이방인들과의 단절에 대해서는 보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49). 그렇기에 Crüsemann은 이방여인들이 이스라엘의 야훼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본문은 어디에도 없다고 본다.50) 느헤미야에 따르면 실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비유대인이었던 이웃지방의 사회 지도층 귀족 관리들의 잡혼의 문제를 중요시 하고 있다.51) 비록 사 56장 3절이하의 이방인들의 탄식이 에스라-느헤미야 시대를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것이 에스라-느헤미야의 잡혼에 대한 금지정책에 반대하는 본문인지는 불명확하다. 왜냐하면 사 56장 3-8절의 구원선포는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것도 아니며, 에스라-느헤미야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관련을 찾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사 56장의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선포의 조건에는 정의를 실천하고 안식일을 준수하며,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사 56장과 같이 ‘고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도 이 두 본문간의 상호 관련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느 13장 1-3절에 따르면 이방인과의 분리정책은 ‘모세의 책’(1절)을 비로소 읽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암몬족속들과 모압족속들이 영원히 야훼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법은 이른바 ‘공동체 총회법’이라 일컫는 신 23장 2절 이하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신 23장에는 특히 ‘신낭이 잘린자’의 공동체 일원이 되는 것이 금지된다는 보도가 있으나, 느 13장에는 단지 모압과 암몬 족속들만 거론되고 있다. 이는 에스라-느헤미야의 이방인들에 대한 정책은 무엇보다도 이방 여인들과의 잡혼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사 56장이 느 13과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사 56장 역시 모압 또는 암몬족속 출신의 이방인들을 거론했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다. 사 56장과 느 13장과의 관련의 문제는, 느 13장이 신 23장의 ‘공동체 총회법’에서 다루고 있는 ‘이방인’과 ‘신낭이 잘린 자’ 두 그룹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52) 그렇다면 사 56장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방인’과 ‘고자’의 문제를 함께 거론하고 있는 신 23장과의 관련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5. 사 56장과 신 23장 2-9절의 ‘공동체 총회법’(Gemeindegestz)과의 관련


거의 모든 주석가들53)은 사 56장이 ‘이방인’(신 23:4[3], 암몬과 모압족속; 8절이하에는 에돔과 애굽족속은 제외됨)과 ‘신낭이 잘린자’(신 23:2,3a)들이 ‘야훼 총회’54) 일원이 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이른바 ‘공동체 총회법’55)이라 불리는 신 23장 2-9절과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들이 보이는 것처럼, 사 56장이 신 23장과 정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지56), 아니면 사 56장이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인지57), 그래서 옛 법조항인 신 23장이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58)의 여러 주장들은 의문이다.

사 56장과 신 23장의 관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이 두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동일한가 하는 것이다. 사 56장 3,6절에 나오는 ‘이방인’이 신 2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야훼총회’에 거부당하고 있는 암몬족속이거나 모압족속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 56장 3,4절에는 ‘고자’라고 언급된 반면에, 신 23장 2절에는 ‘신낭이 잘린 자’라고 업급되고 있다. 아울러 사 56장에는 신 23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두 민족(모압, 암몬)에 대해 거론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점은 이 두 본문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사 56장에서는 신 23장에 거론된 단어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주제에 있어서도 상이하다. 사 56장에 거론된 인물들(이방인, 고자)은 무엇보다도 안식일을 지키고 야훼의 계약을 붙잡고 있는 자들이다.

또 다른 문제는 사 56장 3절의 고자들의 탄식이다. 그들의 탄식은 이방인의 탄식과 다르다. 고자들의 탄식은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염려가 아니다. 만약 사 56장 3절 이하가 신 23장 2절 이하와 서로 대립하는 본문이라면, 고자들의 탄식 역시 이방인의 탄식과 같이 공동체에서 분리될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자들의 탄식은 이와 다르다. 아울러 신 23장 2절의  ‘야훼 총회’가 사 56장의 포로기 이후 ‘제의공동체’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지 역시 의문이다. 신 23장 2-9절의 ‘총회법’은 그 뛰따르는 10-15절의 ‘병영터를 정결하게 하라’는 것과 매우 잘 연결되어 있다.59) 병영터의 정결법과 관련된 신 23장 2절의 ‘야훼 총회’는 사 56장이 말하는 제의공동체의 문제가 아리나 전쟁에 나서는 남자들의 정결에 관한 것이다(참고, 삿 20:1.2). 신 23장의 야훼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법규는 곧 ‘야훼의 전쟁에 나서는 진영에 들어올 수 없다’60)는 것과 맞물려 있고, 사 56장은 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주목할 것으로 신 31장 12절의 토라를 듣고 배우기 위한 모임/회중(lhq Hi. imp.)에는 모든 백성들, 곧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과 이방인($rg ‘너의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yr[vb ‘너의 성읍안에’). 아울러 이 이방인들(~yrg)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두려워 하는(~kyhla hwhy-ta wary) 이들이다. 신 31장과 사 56장의 차이는, 신 31장 12절의 ‘이방인’(~yrg/rg)은 ‘토라의 모든 말씀들’(hrwth yrbd-lk)을 지키는 자들이고, 사 56장 3절 이하의 ‘이방인들(rknh-ynb)은 야훼께 속한 자들(hwhy-la hwlnh) 안식일을 지키고(tbv rmv), 야훼의 계약을 붙잡은 자들이다(ytyrbb qzx).

결론적으로 위에 언급된 겔 44장, 에스라-느헤미야 그리고 신 23장의 본문들은 비록 포로기 이후 공동체안의 이방인 문제들의 상황을 거론하고 있지만, 사 56장 3절 이하의 내용은 이상의 본문들과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 56장은 이와는 다른 포로기 이후새로운 제의 공동체를 위한 종말론적 비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 56장은 무엇 때문에 새로운 등장인물들로 이방인과 고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6. 결론: 이방인과 고자에 대한 새로운 논의-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속에서


지금까지의 사 56장의 이방인과 고자의 문제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이방인의 탄식에 대해서만 집중하였다. 사 56장 3절에 있는 이방인과 고자에 대한 야훼의 답변에 대해서는 간과하였던 것이다. 만약 사 56장 3절 이하가 겔 44장, 에스라-느헤미야 그리고 신 23장의 주장들과 대립하고 있는 본문이라면, 즉 이방인과 고자들이 포로기 이후 새로운 제의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훼가 이상의 본문들의 입장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해야 한다. 곧 이방인과 고자의 공동체 입회 허락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비판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야훼가 “너희는 이방인과 고자들을 공동체에서 쫒아내서는 안된다”등의 말이다. 그러나 사 56장의 야훼의 말은 이방인과 고자들을 몰아내려는 자들에 대한 반대 답변이 아니라, 이방인과 고자 자신들에게 직접 하는 말이다.

이방인들의 염려와 탄식은 저들이 야훼 공동체로부터 쫒겨날 것(V.3aβ: wm[ l[m hwhy ynlydby ldbh)에 대해서, 그리고 고자들은 자신들의 후손이 그칠 것(V.3bβ: vby #[ yna !h)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야훼는 이들에게 특별히 ‘이름을 줄 것’(아들과 딸들보다 저 좋은 영원한 이름)을 약속한다. 여기 비평적 문제가 따른다. 5절 하반절 앞에 있는 새로운 이름에 대한 약속(wl-!ta ~lw[ ~v)과 5절 하반절 뒷부분의  ‘잊혀(끊어)지지 않을것’(trky al) 모두 단수형으로 쓰인 것이 이방인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고자를 향한 것인지의 문제다. 대분분의 주석가들은 wl(im 3.m.sg.) 대신에 4절에 있는 고자들과 관련해 5절 상반절의 서두에 있는 ~hl 에 맞춰 ~hl(im 3.m.pl.) 으로 읽는다. 이 경우 trky 는 관계사 rva 문장과 연결지어 고자들과 관련이 된다. 그런데 3-6절안에 이방인과 고자를 단수와 복수로 서로 번갈아 쓰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야훼가 새로운 이름을 줄 것이라는 약속과 공동체로부터 쫒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단지 이방인뿐 아니라 고자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절 하반절 뒷부분의 하나님의 답변인 ‘잊혀(끊어)지지 않을 것’(trky al)는 한편으론 3절의 야훼의 백성으로부터 쫒겨날 것에 대한 이방인의 염려와 탄식에 대한 응답이다. 아울러 6절의 ‘야훼의 이름을 사랑하려는’(hwhy ~v-ta hbhal)의 언급은 5절의 이름을 부여할 것과 연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의 약속인 ‘잊혀(끊어)지지 않을 것’(trky al)은 그 앞장의 마지막인 사 55장 12-13절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는 아이가 없어 후손이 그칠 것에 대해 염려하는 희망을 갖지 못한 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앞 장인 사 55장의 처음(55:1)은 목마른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향한 야훼의 구원으로의 초대이며(@sk wl-!ya rvaw ... amc-lk) 마지막(V.13)은 ‘잊혀(끊어)지지 않을’(trky al) 영원한 소망의 비전을 말한다.61) 놀랍게도 동일한 단어들(#[, ~v, trky al)이 사 56장 3절과 5절에서 고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새로운 구원과 희망의 비전들을 말하고 있는 바로 앞장의 마지막인 55장 12-13절에 동일하게 나온다.62) 포로기 이후 새로운 제의공동체로의 참여의 문제를 희망이 사라진 대표적인 사람들인 이방인과 고자들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의 중요한 과제는 성전의 재건과 제의의 회복이었다. 이 중요한 새로운 과제앞에 놓여진 문제가 곧 누가 새로운 제의공동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방인들이 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염려는 고자들에게도 동일했을 수도 있다. 사 56:3-7의 ‘야훼와 연합한 자’(hwhy-la hwlnh)는 단지 이방인에게만 쓰였다. 고자는 아니다. 만약 이 표현, ‘야훼와 연합’한다는 표현이 야훼제의로의 참여를 의미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방인에게만 허용되는가? 야훼 제의로의 참여를 위해 고자들에겐 어떤 의무가 따르는가? 이 문제는 고자들이 다른 여러 장애인들과 구분되어 진다는 점과 관련지어야 한다. 레 21:16-24에 따르면 장애인들은 그들의 제물을 제단에 가져 올 수 없다. 비록 구약성서내에 장애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63), 사 56장은 장애인에 대한 자비의 문제나 또한 이들의 제의 참여의 금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사 56장은 고자들의 야훼 제의 참여의 문제와 이들의 공동체 내에서의 삶의 문제를 다룬다. 56장 5절에서 고자들에게 야훼 제의에 참여를 허용하는 것은 이들에게 ‘야훼의 집안에서’64) ‘손과 이름’(참고, 사 66:22)이 주어지게 된다는 점에 있다. 사 56장 5절의 야훼의 약속인, ‘잊혀(끊어)지지 않을것’(trky al)은 그들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3절의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방인들과 고자들의 염려와 탄식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온 것이며, 이에 대한 야훼의 약속은 무엇이며, 사 56장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이방인들의 염려와 탄식은 스스로 갖은 야훼의 백성으로부터 내몰림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야훼에게 연합한’ 이방인들은 분명 야훼 신앙을 알고 있던 자들이었고, 그 야훼 신앙이란 야훼가 자기 백성을 선택했다는 전승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65) 이점에서 사 56장은 선택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사 44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특히 44:1).

사 44장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분명이 야훼와 이스라엘, 나아가 이스라엘의 후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V.3b).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그들이 야훼에게 속해 있으며,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V.5). ‘이름을 부여함(명명)’ 주제는 분명 ‘선택’에 대한 중요한 주제중 하나다. 사 44장 5절에는 이스라엘의 자손들66)이 자신들의 손에 야곱의 이름을 쓰고 자신을 ‘주의 것’이라 쓴다는 표현은, 사 56장 5절에서 고자들에 대한 구원의 표현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두 본문 모두 동일한 단어들인 ‘이름’과 ‘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67) 사 56장의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것이라는 야훼의 약속은 고자들(나아가 이방인들 역시), 한편으론 희망을 품지 못하던 이들이며, 후손이 없어 야훼의 백성으로부터 내몰림을 당할 것이라 여기던 이들을 향한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보다도 안식일을 지키며, 야훼가 기뻐하는 것을 행하는 자들이며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사 5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택전승의 선상에서 무엇이 새로운 종말론적 구원과 희망의 비전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 56장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한 희망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안식일 준수와 야훼의 계약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고 있는가? 이 주제는 정의와 종말론, 특히 이스라엘과 열방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사 56장에서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사 44장과 56장의 관련성은 사 44장 만이 아니라 사 44장 이하의 장들에서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열방간의 관계의 문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선 사 44장은 그 앞 장인 43장과 각기 그 첫 서두(42,1; 43,1f.)에서 ‘선택’의 주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68)

사 43장과 44장은 하나님을 ‘창조주’(43,15; 44,24)와 ‘구속주’(43,1.14; 44,6.22.23.24)로 표현하고, 출애굽 모티브와 함께 구원의 표상을 전한다(43,16f.; 44,27). 이 두 장의 연결뿐 아니라, 사 43장은 또한 그 앞 장인 42장과도 ‘이 전’69)과의 변화라는 주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43,18f.; 42,9)70) 사 42장은 야훼의 종을 선택한 그 이유로 그가 ‘백성의 계약’(~[ tyrbl)과 ‘열방의 빛’(~ywg rwal)으로 택한다. 이는 사 49장 6,8절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야훼는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의 종으로 선택(49,3)한 목적으로 이스라엘, 야곱을 그에게도 돌아오게 하며 모아들인다. 나아가 49장 6절71)은 이스라엘을 그의 종으로 선택한 목적이72) 무엇보다도 열방을 구원하기 위함이다.73) 시온으로 모여들게 하는 종말론적 표상에 따라, 이는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참고, 특히 49:22; 60:3f.; 66:20). 이 모습이 사 56장 8절에도 나온다.

이상의 본문들은 야훼의 종인 이스라엘과 열방간의 관계를 다룬다. 비록 이스라엘을 야훼의 종으로 선택하는 것은 분명 열방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야훼의 종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42:1 aycwy ~ywgl jpvm). 사 42장 4절에 따르면 야훼의 종의 임무는 온 땅에 공의가 이루어질 때까지이다(jpvm #rab ~yfy). 섬들(열방들)74)은 이를 위해 토라를 기다린다(wlyxyy ~yya wtrwtlw 참고, 2:3). 야훼의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은 분명 이스라엘뿐 아니라 섬들(열방들)에 까지 미친다. 그렇기에 사 42장 6절은 무엇 때문에 야훼가 그의 종을 불렀는지, 이스라엘과 열방간의 관계가 무엇이어야 하는 지를 밝힌다:

~ywg rwal ~[ tyrbl $ntaw $rcaw $dyb qzxaw qdcb $ytarq hwhy yna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주목해야 할 점은 위의 문장안에 사 56장에서 보이는 중요한 단어들이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qdc, qzx, dy, tyrb, ~[). 사 42장과 49장, 55장 그리고 61장 간의 연결들은 무엇보다도 ‘계약’이란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75). 야훼의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야훼가 정의로 불렀고, 이는 열방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42장 6절과 49장의 ‘백성의 계약’(~[ tyrb)과 ‘열방의 빛’(~ywg rwa)은 분명하게 열방의 구원의 문제로 직결된다. 이스라엘이 열방을 위한 빛이 되는 것은 시온으로 몰려오는 종말론적 표상에 있어서 열방에게 하나의 분명한 구원의 표식이 되는 것이다(참고, 특히 60:1ff.). 62장 1절 이하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빛의 의무는 곧 열방의 구원을 위한 정의를 실천하는 의무다.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전제가 곧 이스라엘이 먼저 열방의 빛으로서 정의를 실천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62장 1절에서 이스라엘의 정의와 구원을 위한 야훼의 의지가 표명된다. 2절은 열방에 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이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열방은 정의의 빛이 된 이스라엘, 곧 시온으로 몰려온다는 것이다(V.2. 참고, 시 98:2f.). 시온의 빛은 이스라엘이 비추이는 구원을 위한 정의의 빛이다(V.1b hqdc hgnk acy-d[).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정의를 실천하는 일은 우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며, 그 다음 이는 열방의 구원의 표시가 된다. 여기 이 중요한 개념인 ‘빛’과 ‘구원’은 곧 ‘정의’와 관련되며, 이는 항상 이스라엘과 열방 사이의 관계, 특히 종말론적인 표상과 밀접하게 맺어져 있다(참고, 51:4ff.)76).

사 56장의 현 구성에서77), 열방의 구원을 위한 이스라엘의 정의 실천의 전제는, 곧 공의와 정의 실천(V.1.2)과 이방인과 고자의 안식일 준수와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것(V.3-6)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로 모아들이는 하나의 새로운 종말론적 비전(V.7-8)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이방인과 고자의 탄식은 야훼의 이스라엘 선택 전승에 따라 야훼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염려이며, 야훼가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의 의미는 열방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정의를 실천하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의 실천에 대한 야훼의 이스라엘의 선택사상이 결코 열방을 그가 선택한 백성, 공동체로부터 제외될 것에 대한 염려와 탄식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이방인과 고자가 이러한 야훼의 새로운 종말론적 비전을 위하여 안식일 준수와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일이 놓여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는 야훼의 종의 새로운 공동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사야서 전체 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사야서 그 처음(2:2-5)과 마지막(66:22-23)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모습을 종말론적 이상으로 서로 맞물려 있음이 사 56장 8절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사야서 전체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는 곧 열방의 구원을 위한 이스라엘의 정의 실천이라는 맥과 같이하며, 사 56장은 이상의 야훼의 새로운 공동체 구상에 있어서, 각자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가 이스라엘인이든 비이스라엘인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육신의 후손, 그 대를 이을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안식일을 지키고 야훼의 계약을 붙잡으며,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점에 있어서, 사 56장은 야훼의 새로운 종말론적 제의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는데, 포로기 이후, 이방인과 고자들이 이러한 새로운 종말론적 공동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그룹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소외된 이들 중에 하나로 대표되는 이들이지만, 이들을 한 예로 들어 무엇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과제인지를 오히려 더욱 강조하려는 것이다. 곧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어느 누구나 야훼께 연합한 자들이며, 안식일을 준수하고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자들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 56장은 사회정의, 안식일, 계약 주제들이 포로기 이후 새로운 종말론적 야훼 제의공동체 구성을 위한 이스라엘과 열방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V.1.2.4.6). 사 56장은 겔 44장과 대립해 있지도 않고, 에스라-느헤미야의 잡혼금지정책에 반대하거나, 신 23장의 야훼 총회법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 위한 본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 56장은 무엇보다도 한편으론 야훼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 정의로 선택했다는 전통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론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봉헌하며 기도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참고, 왕상 8:41-4378); 시 65:3). 무엇보다도 성전은 만민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성전의 재건을 통한 제의의 회복, 곧 야훼가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V.7) 드려지는 성전이 만민(열방)을 위한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의 회복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야훼는 ‘흩어지 이스라엘을 모으고’ 거기에 더 많은 이들을 모으실 것이다(V.8). 포로기 이후 제2성전을 중심으로한 성전제의 공동체는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에게까지 개방되어 있다. 전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안식일을 준수하고 야훼의 계약을 붙잡는 일이다. 야웨께 연합한 새로운 제의공동체 구성원은 곧 야훼의 종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이사야서 전체를 읽는 독자는 사 56장을 단지 그 당시 곧 포로기 이후 성전제의공동체 구성원의 문제로 인한 갈등 관계로만 읽지 않는다. 이사야서 전체가 말하고 있는 주제를 따라 이해한다. 그는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가 새로운 종말론적 이상에서 이스라엘의 정의의 실천과 열방의 구원의 표상으로서 시온으로의 몰려온다는 그림을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안에서 이해할 것이다.


1) 김일영 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2』, 책세상(2006)과 한국현대사에 대한 고전적 명서인 한길사에 나온 6권 시리즈로 나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1-6권 및 정혜경, 『해방 전후사 사료 연구 1』, 도서출판선인(2002)와 정용욱, 『해방 전후사 사료 연구 2』, 도서출판선인(2002)등을 참고하라.


2) 예를 들면, 김해성, "한국 이주노동자 실태와 전망", 「교회와 세계」 182(199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박경태, "한국 사회 속의 민중: 외국인 이주 노동자 - 노동력 송출국에서 본 이주노동자의 사회적 연결망 - 필리핀의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신학사상」113(2001),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26-48; 박흥순, “신약성서로 본 조선족 이주노동자, 포도원 일꾼 비유(마 20:1-16)를 중심으로”,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엮음,『조선족 선교의 현실과 미래』, 서울: 평화와 선교, 2005, 41-62를 들 수 있다.


3) 예를 들면, 이영월, 최영실, "한국 안의 이방인", 「살림」 142(2000), 6-20.


4) 사 56장이 전체 이사야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 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R. Rendtorff, "Jesaja 56,1 als Schlüssel für die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in: ders.,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1991), 172-179을 참고하라. 렌토르프는 이사야서 제1부(1-39장)에는 ‘정의와 공의’가 한 쌍으로 자주 등장하고, 반면에 제2부(40-55장)에는 ‘공의와 구원’이 나타나는데, 사 56:1에 ‘정의, 공의, 구원’이 함께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사 56장을 제3이사야로 따로 떼어내어 보려는 것에 반대하고, 이사야서 전체의 구성을 보려고 한다. 아울러 이사야서 전체 구성에 대한 그의 논문,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in: VT XXXIV(1984), 295-320=ders.,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1991), 141-161을 참고하라.


5) 이 개념에 대해서는 A. Bertholet, Die Stellung des Israeliten und der Juden zu den Fremden, Freiburg u.a.(1896), 특히 133ff.; J.J., Stamm, "Fremde, Flüchtlinge und ihr Schutz im alten Israel und seiner Umwelt", in: A. Mercier(Hg.), Der Flüchtling in der Weltgeschichte, Bern(1974), 31-66; F. Crüsemann, "Fremdenliebe und Identitätssicherung. Zum Verständnis der Fremden – Gesetze im Alten Testament, in: WuD(1987), 11-24, 11-24 등을 참고하라.


6) 이에 대해서는 W. Th. Smitten, "Der Tirschatain Esra-Nehemia", in: VT 21(1971), 618-620; U. Rüterswörden, Die Beamten der israelitischen Königszeit: Eine Studie zu sr und vergleichbaren Begriffen, BWANT 117, Stuttgart(1985), 특히 96-100등을 참고하라.


7) 참고: 창 23:4; 레 25:23,55. 크뤼제만은 옆에 함께 앉아 있는, 곧 ‘우거하는 자’의 뜻을 지닌 ‘토샤브’가 제사법전에서는 거의 항상 ‘게르’와 같이 쓰이는 것을 보아, ‘게르’를 혈통적으로 분명하게 구분짓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Crüsemann, "Fremdenliebe", 14.


8) 이 단어는 출 29:33; 30:33에서는 ‘타인’, ‘외지인’등의 개념으로, 사 1:7; 61:5에서는 ‘외(국)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9) 이에 대해서는 Bertholet, Stellung des Israeliten; R. Albertz, "Ihr seid Fremdlinge in Agypten gewesen-Fremde im Alten Testament[repr]", in: (Anti-)Rassistische Irritationen: biblische Texte und interkulturelle Zusammenarbeit, S. Wagner u.a. (Hg.), Berlin(1994), 25-38등을 참고하라.


10) 크뤼제만은 이것이 타 민족에 속한 이를 가리킬 수도 있고(사 14:1), 이스라엘 타지파 사람일 수도 있다고 본다(삿 17:7). F. Crüsemann, Die Tora. Theologie und Sozialgeschichte des alttestamentlichen Gesetzes, München(1992), 214.


11) Bertholet, Stellung des Israeliten, 2를 참고하라. 둠에 의하면 ‘노크리’ 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대립하는 존재로, 그리고 반면에 ‘게르’는 유대인이거나 비유대인 일수도 있으며 주민들과는 다른 상대적 존재로 본다. Duhm, B., Das Buch Jesaia, Göttingen(1968, 5판), 420. 참고: 왕상 8:41; 창 17:12,27의 ‘노크리’는 이방인에게서 사온 노예들로 이들 역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출 12:43; 레 22:25; 겔 44:7,9).


12) 특히 E. Schwarz, Identität durch Abgrenzung. Abgrenzungsprozesse in Israel im 2. vorchristlichen Jahrhundert und ihre traditionsgeschichtlichen Voraussetzungen, EHS.T 162, Frankfurt/M.(1982)를 참고하라.


13) 출 20:10,13-15; 신 5:14,17-19. 계약법전: 출 22:19f.; 23,9.12f. 크뤼제만은 출 22:26ff와 23:1ff는 이방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본다. Crüsemann, "Fremdenliebe", 19.


14) 신 10:19; 14:28f.(26:12); 24:14,17; 27:19.


15) 민 15:14ff.; 레 17:8; 18:26; 19:10,18,33f.; 20:2; 22:18; 23:22; 24:10ff.; 겔 47:22이하는 새로운 땅에 가서 살게 될 때에 이방인에게도 기업을 물려줄 것을 명시하고 있다.


16) 이에 대해서는 특히 Crüsemann, "Fremdenliebe", 17-24를 참고하라.


17) C. Schäfer-Lichtenberger, Stadt und Eidgenossenschaft im Alten Testament. Eine Auseinandersetzung mit Max Webers Studie „Das antike Judentum“, BZAW 156, Berlin u.a.(1983), 특히 311f.를 참고하라.


18) Crüsemann, Tora, 215.


19) Crüsemann, Tora, 215. 이런 이유로 그는 계약법전의 생성시기를 주전 8세기 말 또는 7세기 초 라고 본다.


20) 특히 이 용어는 구약성서 전체에서 17번 중 제3이사야서에 5번 등장한다: 56:3,6; 60:10; 61:5; 62:8. 참고 K.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im Tritojesajabuch, eine literarkritische und redaktionsgeschichtliche Studie, WMANT 62, Neukirchen-Vluyn(1990), 31 Anm. 120.


21) 참고, Cürsemann, "Fremdenliebe", 21;  G. Stemberger, "Das rabbinische Judentum in der Darstellung Max Webers", in: W. Schluchter(Hg.), Max Webers Studie über das antike Judentum. Interpretation und Kritik, stw 340, Frankfurt/M.(1981), 185-200, 특히 193ff.


22) 이사야서 내에  정관사 없이 rkn-!b 가 나오는 본문들(60,10; 61,5; 62,8)은 사 56장의 이방인들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60:10; 61:5; 62:8의 rkn-!b 는 사 56장에서 다루고 있는 제의공동체로의 참여문제와 관련된 주제와는 다르다. 62:8의 rkn-ynb 는 이스라엘의 적대자들로 쓰이고 있기에 사 56장과의 논의에서는 제외된다.


23) 이에 대해서는 F. Cürsemann, "Israel in der Perserzeit. Eine Skizze in Auseinandersetzung mit Max Weber", in: W. Schluchter(Hg.), Max Webers Sicht des antiken Christentums. Interpretation und Kritik, stw 548, Frankfurt/M.(1985), 205-232, 특히 213f.를 참고하라.


24) 사 61:5의 ~yrz 같은 이들, 참고, 출 29:33; 30:33, Crüsemann, "Fremdenliebe", 14f.


25) 쾨넨도 이 부분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한다.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31.


26) 예를 들어 출 44장; 스 9:1-4; 느 13:1-3; 신 23:2-9를 참고하라.


27) 사 56장은 단순히 ‘안식일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이 더렵혀 지는 것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것’을 다룬다. 이런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오직 이곳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박경철, “안식일의 제의적 의미와 사회정의”, 「구약논단」 17(2005), 56-77을 참고하라.


28) 참고: 삼상 8:15; 왕상 22:9; 왕하 8:6; 9:32; 24:12; 25:19(=렘 52:25); 대상 28:1; 렘 29:2; 34:19; 41:16.


29) 특히 에스더 안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시기 궁중내시들을 언급할 때 나온다(에 1:10,12,15; 2:3,14,15,21; 4:4,5; 6:2,14; 7:9).


30) 요세푸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잡아간 이들 중에 고자로 만들어 궁중에서 일하게 했다고 보도한다. Ant. X 10:1. 참고, A.D. Nock, "Eunuch in Ancient Religion", in: ARW 23(1925), 25-33. 젬스도르프는 ‘고자들’은 궁중관리로 유대인 출신으로 본다(참고 사 39:7). E. Sehmsdorf, "Studien zur Redaktionsgeschichte von Jesaja 56-66", in: Teil I. u. II. ZAW 84(1972), 515-576, 557.


31) 블렌킨소프는 이들을 개종한 이방인들로 야훼제의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본다. J. Blenkinsopp, "Second Isaiah-Prophet of Universalism", in: JSOT 41(1988), 83-103, 95, 그는 같은 본문으로 사 14:1; 슥  2:15; 에 9:27을 든다. 위의 논문 102, 주 34. 사 14:1과 비교한 것에 대해서는 C. Westermann, Das Buch Jesaja 40-66, ATD 19, Göttingen(1966), 249를 참고하라.


32) 참고,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9. 특히 그는  56:3-8 과 66:18-22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33) Vgl. Sehmsdorf, Redaktionsgeschichte, 553 Anm. 186.


34) Westermann, Jesaja 40-66, 250.


35) 월리스는 이 본문을 통해 포로기 이후 누가 공동체 구성원이 될 수 있고, 누가 그렇지 못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본다. G. Wallis, Die Gemeinde des Tritojesajabuches. Eine tradit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 Berlin(1957), 188.


36) D.L. Smith-Christopher, "The mixed marriage crisis in Ezra 9-10 and Nehemiah 13: A Study of the Sociology of post-exilic Judaean Community", in: Second Temple Studies, 2. Temple Community in the Persian Period, vol 2, T. Eskenazi(Hg.) u.a., JSOT.S. 175, Sheffield(1994), 243-265.


37) 참고, E. Achtemeier, The Communityand Message of Isaiah 56-66, Augsburg(1982), 35; M. Fisc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 Oxford(1985), 138ff.; P.A. Smith, Rhetoric and Redaction in Trito-Isaiah. The Structure, Growth and Authorship of Isaiah 56-66, VT.S 62, Leiden(1995), 58;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23.


38) Fischbane, Interpretation, 138ff.


39) U. Berges, Das Buch Jesaja, Komposition und Endgestalt, HBS 16, Freiburgu.a.(1998), 511, 참고: 주 472: ‘안식일 준수’: 겔 44:24 - 사  56:2,4,6; ‘계약 파기’(겔  44:7) - ‘계약을 붙잡음’(사 56:4,6); rkn(h) !b: 겔 44:9; 사 56:3,6; llh: 겔 44:7; 사 56:6. 겔 44장과 사 56장의 논쟁에 대해서는 또한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23f.를 참고하라.


40) Blenkinsopp, "Second Isaiah-Prophet of Universalism" 96.


41) B.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Reconstructing the Cultic History of the Restoration, JSOT.S. 193, Sheffield(1995), 122. 그는 사 56장이 개종한 이방인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본다.


42) 이들의 성전출입은 성전정결례에 절대금지된 조항이었다. 이들은 성소와 관련된 그 어떤 일들도 금지된 자들로 이방신들을 섬기는 불경건한자들로 야훼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은 결고 허락되지 않았다. G. Fohrer, K. Galling, Ezechiel, HAT I, 13, Tübingen(1955), 248.


43) 이에 대해서는 Wallis, Gott und seine Gemeinde,188f.195.199f.; Fischbane, Interpretation, 268; Sehmsdorf, Redaktionsgeschichte, 555-556;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23등을 참고하라.


44) O.H. Steck, "Zu jüngsten Untersuchungen von Jes 56,1-8; 63,7-66,24“, in: ders., Studien zu Tritojesaja, BZAW 203, Berlin/NewYork(1991), 229-265, 246 주 111.


45) Schramm, Opponents, 123, 주 6.


46) 그 땅에 머물러 부정해 진 사람들이 다시 정결해 지고 유월절 식사에 초대받은 자들에 대한 문제가 외국인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스 6:21). 스미스는 이들은 야훼제의에 참여한 외국인으로 본다. Smith, Rhetoric and Redaction, 55f.


47) 스미스는 사 56장이 이방인의 개종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그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고 본다. M. Smith, Palestinian parties and politics that shaped the Old Testament, New York/London(1971), 137-139.


48) Schramm, Opponents, 123.


49) Crüsemann, "Perserzeit", 225, 주 42.


50) Crüsemann, "Perserzeit", 209.


51) Crüsemann, Perserzeit, 220. 특히 느 6:17ff.; 13,4ff.


52) Smith, Rhetoric and Redaction, 57.


53) Duhm, Jesaia, 421; Pauritsch, Die neue Gemeinde, 36.44; Smith, Rhetoric and Redaction, 57;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30.


54) 제의공동체를 위한 ‘야훼총회’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는 특히 L. Rost, Die Vorstufen von Kirche und Synagoge im Alten Testament. Eine wortgeschichtliche Untersuchung, BWANT 76(F.4,24), Stuttgart(1938), Darmstadt(1967 2판), 특히 87-91를 참고하라.


55) 이에 대해서는 Bertholet, Stellung des Israeliten, 특히 142-145. 신 23:2-9의 연대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 E. Nielsen, Deuteronomium, HAT I/6, Tübingen(1995), 219f.; K. Galling, "Das Gemeindegesetz in Deuteronomium 23", in: FS. A. Bertholet, 1950, 176-191; D. Michel, "Zur Eigenart Tritojesajas", in: ThViat 10(1965/66), 213-230, 224.


56) 세키네는 사 56장의 이방인과 고자들의 탄식은 이들이 야훼 공동체에 머물기를 원했으나, 신 23장에 의거해 이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해 내려는 그룹들로 인한 것이라고 본다. S.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Jes56-66) redaktionsgeschichtlich untersucht, BZAW 175(1989), 34.


57) H. Donner, "Jesaja LVI 1-7: Ein Abrogationsfall innerhalb des Kanons-Implikationen und Konsequenzen", in: VT.S. 36(1983), 81-95, 82, 아울러 그는 신 23:2-9이 포로기 이후 신명기 본문에 추가된 것으로 본다. 84.


58) Westermann, Jesaja 40-66, 250.


59) Nielsen, Deuteronomium, 219.


60) Nielsen, Deuteronomium, 221.


61) 사 55장과의 연결에 대해서는 O.H. Steck, "Beobachtungen zu Jesaja 56-59", in: BZ. NF 31(1987), 228-246=ders., Studien zu Tritojesaja, BZAW 203, Berlin/NewYork(1991),169-186, 170; 두 본문간의 동일한 단어 사용은 다음과 같다: ~v: 55:13; 56,5; xmf: 55:12; 56:7; tyrb: 55:3; 56:4,6.; h/bwrq: 55:6; 56:1; #[: 55:12; 56:3; 열방(민족): 55:4-5; 56:7.


62) 베르게스는 사 55:12-13에서 야훼에게 속한 자들은 푸른 나무들로 비교되는 모습이 사 56장에서 고자들이 ‘마른나무’(3절)라고 탄식하는 모습과 비교된다고 본다. 고자들의 탄식에 대해 야훼는 이들에게 영원한 이름을 주어 ‘잊혀(끊어)지지 않을것’(trky al)을 약속하는 것은, 사 55:13에서 야훼의 영원한 표지이 ‘잊혀(끊어)지지 않을것’(trky al)과 서로 잘 연결된다고 본다. Berges, Jesaja, 510.


63) 예를들어 레 19:14; 신 27:18; 시 146:8; 사 35:5; 42:7; 렘 31:8.


64) 쾨넨은 사 56:5의 ‘성벽’은 성전벽을 의미하고, 사 60-62의 ‘벽’은 예루살렘 성벽을 의미한다고 본다.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32


65) 이에 대해서는 특히 K. Galling, Die Erwählungstraditionen Israels, BZAW 48, Gießen(1928); K. Koch, "Zur Geschichte der Erwählungsvorstellung im Alten Testament", in: ZAW 67(1955), 205-226; R. Rendtorff, "Die Erwählung Israels als Thema der deuteronomischen Theologie", in: Die Botschaft und die Boten, FS. H.W. Wolff. J. Jeremias and L. Perlitt(Hg.), Neukirchen-Vluyn(1981), 75-86"; E. Zenger, "Israel und Kirche im einen Gottesbund? Auf der Suche nach einer für beide akzeptablen Verhältnisbestimmung", in: KuI 6(1991), 99-114", 특히 104ff.를 참고하라.


66) 윈클은 사 44:5이 단지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로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문제를 논하는 것으로 본다. D.W. van Winkle, "Proselytes in Isaiah XL-LV?: A Study of Isaiah XLIV 1-5", in: VT 47(1997), 341-359.


67) 44,5: larfy ~vbw [...] wdy [...] bq[y-~vb

   56,5: ~lw[ ~v [...] ~vw dy


68) 43,1: aryt-la larfy $rcyw bq[y $arb hwhy rma-hk ht[w

         hta-yl $mvb ytarq $ytlag yk

   44,1: wb ytrxb larfyw ydb[ bq[y [mv ht[w

   44,2: wb ytrxb !wrvyw bq[y ydb[ aryt-la $rz[y !jbm $rcyw $f[ hwhy rma-hk


69) ‘이 전’과 ‘다가올 것, 나아가 새로운 것’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는 J. Werlitz, Redaktion und Komposition. Zur Rückfrage hinter die Endgestalt von Jesaja 40-55, BBB 122, Bonn(1999),특히 104f, 주  43f.을 참고하라.


70) 43,18: wnnbtt-la twynmdqw twnvar wrkzt-la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43,19a: hw[dt awlh xmct ht[ hvdx hf[ ynnh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42,9: ~kta [ymva hnxmct ~rjb dygm yna twvdxw wab-hnh twnvarh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71) byvhl larfy yrycnw bq[y yjbv-ta ~yqhl db[ yl $twyhm lqn rmayw

#rah hcq-d[ yt[wvy twyhl ~ywg rwal $yttnw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72) ‘야훼의 종’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많지만 일반적으로 야훼의 종과 이스라엘을 서로 분리할 수는 업ㅅ다는 것이 학계의 주된 입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H.-J. Hermisson, "Israel und der Gottesknecht bei Deuterojesaja", in: ZThK 79(1982), 1-24을 참고하라.


73) 이 주제, 곧 ‘열방을 구원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현 정경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역사 초기인 아브라함 선택 기사에 이미 나타난다(참고, 창 12:1-3; 18:18; 26:4; 야곱 이야기 안에 있는 28:14).


74) 이사야서 전체에서 섬들(열방)이 시온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들을 보여주는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11:11f.; 24:15; 41:5; 42:4,10ff.; 49:1; 51:5; 59:18f.; 60:9(참고, 23:2ff.); 66:19.


75) 이사야서 전체에서 ‘계약’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박경철, 『한 권으로 읽는 구약성서』, 제 7장: 이사야서에 나타난 계약의 신학적 의미, 153-208을 참고하라.


76) V.4a: wnyzah yla ymwalw ym[ yla wbyvqh             이스라엘

   V.4b: [ygra ~ym[ rwal yjpvmw act ytam hrwt yk     토라, 공의, 열방의 빛

   V.5a: wjpvy ~ym[ y[rzw y[vy acy yqdc bwrq          종말론, 정의, 열방의 구원

   V.6b: txt al ytqdcw hyht ~lw[l yt[wvyw           종말론, 구원, 정의

   V.7a: ~blb ytrwt ~[ qdc y[dy                    이스라엘, 정의, 토라

   V.8b: ~yrwd rwdl yt[wvyw hyht ~lw[l ytqdcw         종말론, 정의, 구원


77) 이에 대해서는 박경철, 『한 권으로 읽는 구약성서』, 특히 128-130을 참고하라.


78) 여러 학자들은 여기서 56장이 스 9:1-4과 느 13:1-3보다도 왕상 8:41-43과 더욱 관련성이 있다고 본다.  Berges, Jesaja, 512. 그러나 고자들이 야훼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보도는 구약성서 다른 곳에는 전혀언급되지 않는다. 참고: Donner, "Abrogationsfall", 88; Sehmsdorf, Redaktionsgeschichte, 554-557;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3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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