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논문] 임태수 교수님 회갑기념 논문: 새 하늘과 새 땅
  박경철 [ 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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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학교 임태수교수님(민중신학연구소 소장, 한국구약학회회장) 회갑기념 논문집에 기고한 본인의 논문입니다.
웹상에서는 히브리어가 깨지거나 거꾸로 쓰여져 나오네요... 쩝,
정확한 것은 한글 파일을 올려놓았으니, 다운 받아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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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HTTP-EQUIV="Content-Type" CONTENT="text/html; charset=euc-kr">제2종교개혁을 지향하며






제2종교개혁을 지향하며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



박경철(신학박사, 전주대 구약학 강사)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사 65:17)











1. 들어가면서







새 천년을 맞이하던 2000년 봄, ‘민중과 신학’ 창간호 창간사에서 본지 발행인인 임태수 교수는, “지금 세계의 기독교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1고 지적 하면서, 이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반민중적인 기독교에서 탈피하여 민중적인 기독교”로의 전환, 다른 하나는, “믿음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탈피하여 행함을 겸비한 기독교”2로의 전환이다. 이 두 지적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루터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사상이 결국 반민중적 기독교로 전락하게 된 그 원인을 제공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행함’의 개혁운동을 위해, “새로이 문을 연 제3천년은 제2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천년이 되어야”3한다는 그의 지적은 민중신학자인 그가 왜 제2의 종교개혁을 외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새 천년을 열며 교회와 신학뿐 아니라, 사회 각 부분에서는 새로운 희망과 미래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새로운 희망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흔히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희망을 함께 견주어 보곤 한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모습일까? 민중적 기독교로의 전환과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한 새 천년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성서를 통해 비추어 볼 수 있을까?



구약성서에서 ‘새 하늘과 새 땅’(השׁדח ץראו םישׁדח םימשׁ)에 대한 언급은 이사야서 65장 17절과 66장 22절4, 단 두 군데 나타난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사야서가 말하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비젼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는 최근 성서해석학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사야서 최종형태에 대하여 구성비평 방법론을 통해, 그것이 이사야서 전체 신학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결론에 가서는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비평 방법론과 이사야서의 ‘새 하늘, 새 땅’의 신학이, 임태수 교수가 위에서 지적한 제2종교개혁을 지향하는 민중신학과 어떤 관련을 맺을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구약성서 대부분의 책들은 각자 매우 복잡한 생성사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역사비평방법론은 이렇게 복잡한 구약성서의 각 문서층들에 대한 연구를 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비평방법론의 모든 연구 작업들은 성서 각 문서층들에 대해 분명하게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5. 성서의 다양한 문서층들이 어떻게 발전되어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는 끊이지 않고 있다6. 그러나 지난 200년간의 역사비평방법론들은 현 최종형태를 지니고 있는 성서 각 책들의 신학적 의도를 묻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7.



구약성서의 현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은 지난 20년간 이사야서 연구에 있어서도 크게 늘어났다. 최근 이사야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어떻게(How) 현재 66장의 이사야서는 그 최종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는가?” 하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연구와 “현재 최종형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이사야서 전체는 무엇(What)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연구방법이다. 최근의 최종형태에 대한 통시적 연구 방법의 관심은 최종 편집자에 대한 이전 편집비평의 질문이 아니라, 오랜 역사 과정에 어떻게 단편들이 최종형태의 이사야서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전(全)역사 과정에 관심하는 편집사 비평작업이다8. 편집사 비평은 편집의 작업이 어느 한 시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편집의 오랜 과정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시적 방법론은 그 시작에서부터 현 최종형태의 모습을 다시 각 문서층들로 찢는 일로부터 시작해야하는 그 방법론상의 문제를 갖고 있으며, 각 문서층들에 대한 구분 역시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한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9. 이에 반해 최종형태에 대한 공시적 연구의 관심은 각 문서층의 발전과정의 전(全)역사를 쫓아가는 일이 아니라 최종형태 본문 자신이 드러내 주고 있는 전체 책의 통일된 주제를 말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때, 전체 책의 통일성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한 저자의 작품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비평 이전까지 이사야서의 저자는 시락 48:24f10에 따라 기원전 8세기 '아모쯔의 아들 이사야'(ץומא־ןב והיעשׁי 사 1:1)라고 여기고 있었다11. 몇몇 보수주의 학자들에게선 여전히 이사야서의 한 저작설에 대한 믿음이 발견되지만12,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이를 수용하지는 않는다. 사 1-39장과 구별하여13 사 40-66장을 ‘제2이사야’(Deutero-Jesaja)라고 처음으로 부른 이는 아이히호른(J.G.Eichhorn, 1780-1783)14과 되덜라인(J.G.Doderlein, 1789)15이다16. 그 후 1892년 둠(B.Duhm)의 이사야서 주석17이 나온 이래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사야서는 1-39장과 함께 40-66장을 다시 둘(40-55장; 56-66장)로 나누어 셋으로 구분되어 연구되어 오고 있다18. 둠의 연구 이래 이사야서 연구의 모든 논의는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거의 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19 아래에서 각 책마다의 저자문제, 연대문제들이 끊임없이 다루어져 왔다20.



1980년대에 이르러 이사야서 연구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21. 이는 무엇보다도 현재 최종형태 이사야서 전체 한 권22의 의미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이었다23. 지금까지의 이사야서 연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한 예언자로부터, 세 권에 대한 연구를 지나, 한 권에 대한 연구”(von die ≫Ein-Prophet-Interpretation≪ uber die ≫Drei-Bucher-Interpretation≪ zur ≫Ein-Buch-Interpretation≪24로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형태에 대한 이사야서 전체 한 권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 방향은 통시적 연구와 공시적 연구 두 방향에서 일어나고 있다25.







3. 전체 이사야서 최종형태의 결론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







1) 이사야서 전체 구성



이사야서 전체 한 권의 현 최종형태의 구성에 대해서 묻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의 순서대로 읽어 가는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첫 부분이 무엇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지를 주의해 읽어야 한다는 점이고, 아울러 마지막이 무엇으로 끝나는가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이는 전체 이사야서의 현 최종형태는 우연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더욱 그렇다26.



이사야서의 첫 단락인 1:2-2:427에서는 ‘제의’, ‘사회정의’, 종말론적 표상인 ‘시온의 회복’과 ‘야훼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 그리고 ‘온 민족들의 시온순례’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사야서는 이와 같은 주제들을 책의 첫 장면에서 이야기 하는 것일까?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모든 주제들은 이사야서 전체에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나온다는 점이다. 이는 이사야서 전체 구성이 서론부에서 밝힌 중요 주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서론부에 나타난 이상의 주제들이 전체 이사야서의 결말부(사 65:17-66:24)28에 가서 모두 함께 다시 나타난다는 점이다29. 또한 서론부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언급된 ‘안식일과 월삭’(1:13)이 전체 이사야서 결론부에 가서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어 나온다30. 이상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사야서 서론부와 결론부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이한 여러 주제들이 결코 개별적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밀접하게 연관된 주제들이며, 이는 전체 이사야서의 구성을 매우 의도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이한 여러 신학적 주제들은 단순히 섞여 있는 게 아니다. 현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의 모습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은 현재 모습의 그 순서에 있다. 즉 이스라엘의 불의와 부정한 모습의 공의와 정의에 의한 정화와  시온/예루살렘의 회복에 이어 온 민족들의 구원인 시온 순례로 이어지는 구도이다. 이사야서의 구도는 철저하게 이 순서를 놓치지 않는다. 시온/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의의 회복과 실현 이후 온 민족들의 구원의 장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서 첫 번째 큰 단락의 결론부(사 11-12장), 열방신탁의 단락들(13-23장), 이사야 묵시록(24-27장)31, 야훼의 종의 노래들(42장, 49장)32과 예언자 소명기사 단락 (61-62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온에 정의가 실현된 다음에야 온 민족들이 그곳으로 몰려온다는 것은, 구원의 전제조건이 이스라엘의 정의의 실현이라는 점이며, 이것이 현 이사야서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순서라는 말이다. 이제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이사야서 결론부를 시작하는 65장 17절과 마지막 66장 22절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의 신학은 전체 이사야서 구성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아보자.







2)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주 야훼에 대한 표상



이사야서 전체에서 ‘하늘과 땅’33을 야훼와 관련시키고 있는 본문들이 전하는 것은 야훼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ארב/השׂע) 분이라는 것이다(37:16; 42:5; 44:24: 45:8.12.18; 51:13.16). 창조주 야훼는 ‘하늘과 땅’에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44:23; 45:8; 48:13; 49:13), ‘하늘과 땅’은 이스라엘의 죄를 입증하는 증언자로 등장하기도 한다(1:2f.). 야훼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 언급되기도 한다(63:15.19b). ‘하늘과 땅’ 두 단어가 쌍을 이루어 전체 이사야서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타난다는 점은(사 1:2; 66:1) 이사야서 전체 구성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사 1장과 66장은 각각 처음에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그 마지막도 동일한 단어와 주제를 갖고 있다: 사 1장에서 시온의 회복 이후, 야훼의 ‘적대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데, 이것이 66장 마지막에 동일하게 나타난다(םיעשׁפ 1:28; 66:24).



그런데 ‘하늘과 땅’이 야훼와 관련되어 새로운 신학적 주제를 보여주는 곳은 이사야서 결론부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이미지로서의 ‘하늘과 땅’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지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 65:17a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루살렘’(V.18f.)과 야훼의 구원을 기뻐하는(참고, 사 62:5; 습 3:17) ‘그 백성’(참고, 사 61:7.10; 습 3:14)이다. 65:17과 18절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



V.17a: השׁדח ץראו םישׁדח םימשׁ ארוב יננה־יכ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V.18b: םלשׁורי־תא ארוב יננה יכ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창조하리니”



이상의 종말론적 표상은 먼 미래의 상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한 현재에 관한 것이다34. 그러나 야훼의 새 창조의 내용이 단순히 도성 예루살렘을 허물고 다시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의 새 창조의 대상이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의 표상은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65:17-19; 66:10-14.20f.). 18절에서는 단어 ‘새로운’(שׁדח)이 예루살렘에는 쓰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새 창조는 ‘기쁨’(שׂושׂמ)이라는 단어와 연관된다(V.18b). 이 ‘기쁨’은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그 다음 장인 66장에까지 이어진다(66:10f.). 이는 제3이사야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야훼의 종들’35과 잘못된 제의를 행하는 자들과의 대조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는 65장과 66장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진다. 이와 같이 야훼의 새 창조가 인간과 관련된다는 65장의 모습은 66장에서 더욱 도드라져서 나타나는데, 야훼의 현존은 어떤 특정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cf. 57:15) 그리고 누구를 위해(cf. 61:1) 함께 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36.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야훼의 새 창조와 사람들과의 관련은 어떤 이유에서이며, 사람들과 관련된 야훼의 새 창조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는 곧 인간 사회에 대한 야훼의 새 창조에 나타난 종말론적 표상의 그 사회적 관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이다.







3) 야훼의 새 창조와 사회정의



비록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말하지만 뒤따르는 본문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하늘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질 않는다. 단지 땅에 대한 보도뿐이다. 즉 새 하늘 창조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제 새롭게 달라질 땅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 65:21과 22절은 야훼의 새 창조의 사회적 배경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V.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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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은 자들이 (거기로)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원을 지은 자들이 (그들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V.2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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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지 아니한 자들은 남이 (지은 집에) 들어가 살지 못하며, 심지 않은 자들이, 남이 (심은 것을) 먹지 못하리라.”




65:22a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에는 착취가 없는 세상임을 그려준다. 이러한 새로운 그림은 동시에 당시의 사회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사회 하층민들의 땀이 착취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은 당시 사회 상류층의 착취계급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사 3:14f.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 3:14f.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37을 착취하고 빼앗은 것으로 자신들의 집을 채우는 사회 지도자들이 야훼의 심판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참고, 사 5:8). 사 3:14f.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 상류층들에 대한 심판선언이라면, 65:21f.는 앞으로는 가난한 자들이 더 이상 착취 받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이들을 위한 구원선포인 것이다. 비록 65:21f.에서 ‘가나한 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포도원을 짓는 자들’(םימרכ ועטנ)이 사회 상류층을 가리킬 수 없음은 확실하다. 사 62:8f.에서도 예루살렘의 구원의 표상은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이 없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들의 것을 빼앗겼던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것을 성전 뜰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전이 곧 해방의 장소요, 더 이상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곳임을 말해준다. 이는 곧 구원의 때는 ‘정의’(הקדצ)가 실현되는 때임을 가리킨다(사 62:1b).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시는 야훼는 ‘공의’(טפשׁמ)를 사랑하고, ‘불의한’(הלוע) ‘착취/빼앗음’(לזג)을 싫어하기 때문이다(61:8). 사 10:1f.은 사회 하층민들에 대한 상류층의 이러한 불의의 행위를 잘 보여준다. 사회 지도층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의 모습을 가리켜 ‘정의’(쩨데카, הקדצ)를 원했지만, ‘울부짖음’(쩨아카, הקעז)만 있다고 사 5:7은 고발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쩨아카(הקעז)’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65:19)38. 그렇기 때문에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은 가진 자들이 자행하던 사회 불의에 대한 심판의 선언임과 동시에 억압받던 당시 사회 민중들에 대해선 구원의 선포가 되는 것이다.







4) 새 하늘과 새 땅에 펼쳐지는 평화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모습은 65장 마지막 절(25)에서 그 절정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사 65:25은 사 11:6-9의 수용이라고 여겨져 왔다39. 사 11:6-8과 65:25에서 나타난 동물들의 평화로운 세계는 강자(이리, 표범, 사자, 곰)와 약자(어린 양, 아기 염소, 송아지, 소, 젖먹이 아이, 젖 뗀 아이)가 함께 사는 모습이다. 그러나 평화의 세계란 약자와 강자가 단지 함께 사는 세상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는 약자가 더 이상 강자의 먹이(희생양)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 전제이다. 이는 약자가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평화는 강자의 폭력이 그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상의 이사야서 두 본문이 보여주는 종말론적 표상은 당시에 불의한 강자들의 폭력이 있었음을 가리켜준다. 특히 본문에서 강자들(이리와 사자)이 약자들(어린 양과 소)을 그들의 먹이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먹이인 풀(식물)을 먹는 다는 강자들의 먹이의 변화를 언급한다. 이는 약자들이 강자들과 함께 사는 평화란 강자들의 약자에 대한 폭력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즉, 이 평화의 세계상에 대한 비유는 인간 사회에서의 강자들의 불의한 폭력과 이 폭력으로부터 약자들의 해방을 빗대고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사 11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세계상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면서 동물들의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 11장의 종말론적 메시아사상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םילד)과 ‘땅의 곤궁에 처한 자들’(ץרא־יונע)을 향하고 있다. 4절은 당시 이러한 사회 약자들을 억압하는 불의한 사회 상류층을 고발한다. 정의 실천의 요구는 무엇보다도 사회 약자들인 가난한 자들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사회 약자들을 위해 정의를 실천할 때에야 올 수 있다(V.5f.)40. 사 32장 역시 평화의 세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실천을 말한다. 평화와 정의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요,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화와 안전”(V.17)이기 때문이다.



사 11장이 보여주는 구성은 이렇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정의 실천의 요구(V.3-4)와 함께 이루어지는 평화의 세계(V.6-9)가 전제된다면, 이제 그곳으로 온 민족들이 몰려올 것(V.10f.)이라는 것이다41. 이러한 구도는 앞서 언급했던 이사야서 전체 구도와 동일하다. 특히 전체 이사야서 결론부인 사 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상은 정의실천의 요구를 그 저변에 깔고 있는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66장에 가서 온 민족들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을 말한다. 특히, 사 11:10과 66:1은 야훼가 계시는 장소에 대해 동일한 단어(ותחגמ/יתחוגמ)를 사용한다. 이곳으로 야훼가 온 민족들이 몰려오게 할 것이며, 그들이 야훼의 ‘영광’(דובכ)을 보게 될 것이다(11:10; 66:18). 그러나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이 장소(예루살렘/시온)는 무엇보다도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와서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곧 거기서 정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62:2). 66:18f.는 민족들 중에 선택된 자들이 다시 야훼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다른 민족들에게로 보내어지고 그럼으로써 다른 민족들이 ‘야훼의 영광’(הוהי דוב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냄을 받았던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을 데리고 시온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야훼는 이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뽑겠다고 말한다. 이런 표상은 전에 없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런 세계를 가리켜 22절은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야훼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65:17ff.가 말하는 착취가 없고, 강자들의 폭력이 사라지는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전제될 때, 그곳으로 온 민족이 몰려올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서 전체의 결말이다. 특히 이상의 이사야서의 결말은 이사야서 처음에 나왔던 주제들의 그 순서와 동일하다. 사 1장은 이스라엘(예루살렘/시온)의 죄악을 고발할 때, 그들의 잘못된 제의(V.11-15)와 함께 사회 불의(V.16-17; 21-23)를 통렬히 비난한다. ’정의‘(הקדצ)와 ’공의‘(טפשׁמ)가 충만했던 그곳이 살인만이 있을 뿐이다(V.21). 그러나 야훼는 죄악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을 ’정의‘(הקדצ)와 ’공의‘(טפשׁמ)로 다시 회복시키신다(V.27). 이러한 시온의 정의의 회복은 곧이어 사 2:2-4에서 온 민족들의 순례로 이어진다. 이는 온 민족들이 그리는 평화의 세계란 모든 전쟁의 무기들이 농기구로 바뀌고 다시는 전쟁의 연습도 없는 세계란(2:4, 참고, 미 4:1-4) 정의의 선행이 있은 후임을 말하는 구도인 것이다. 이러한 구상이 이사야서 서론부와 결론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전체 이사야서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신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까지만 본다면,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 구성은 온 민족(66:23: ‘온 생명체’ רשׂב־לכ)의 구원이라는 것으로 결말지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 이사야서의 마지막 말(66:24)은 ‘온 생명체’(V.23. רשׂב־לכ)가 야훼의 ‘적대자들’(V.24. םיעשׁפה)‘에게 임하는 심판을 볼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구원과 심판은 어떤 의미인가?







5)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구원과 심판



오늘날 예언서 연구 방향은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의 말’에 대한 연구로부터 ‘예언서’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42. 궁켈의 예언서에 대한 양식비평 연구 이래43 예언서 연구는 예언 선포의 내용44에 대한 그 목적과 의도에 대한 논의들이 주를 이루어왔다45. 이런 논의에서는 종종 예언자 선포의 내용에 따라, ‘심판 예언자’는 포로기 이전으로, 그리고 ‘구원 선포 예언자’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라는 식으로 구분되기도 했다46. 그러나 각 예언서 그 최종형태가 보여주는 것에 따르면, 이상의 구분이 결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 과 ‘심판’의 주제는 포로기 이전, 포로기, 그리고 포로기 이후 모든 예언서마다 공통의 주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47. ‘구원’과 ‘심판’의 주제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두 주제는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 구성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특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사야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사야서 전체 결말부인 사 65장과 66장은 ‘야훼의 종들’과 ‘야훼의 적대자들’간의 대조적인 모습을 반복적으로 이어간다. 물론 ‘야훼의 종들’에게는 ‘구원’이 그리고 ‘야훼의 적대자들’에게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48. 그런데 이런 구원과 심판의 모습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 65:25 동물들의 평화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앞에서 사 65:25과 11:6-8을 비교하면서 보았듯이, 사 11장 역시 가난한 자들과 땅의 곤궁한 자들이 정의로 구원을 받는 반면에, 폭력을 일삼는 불경한 자들에게는 죽음(심판)이 따른다(V.4). 그런데 동물들의 평화로운 세계상을 보여주는 두 본문(11:6-8; 65:25)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들어있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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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고, 젖땐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65:25a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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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뱀은 흙을 그의 먹이(로 삼을 것이라)”




이상의 두 본문은 미래에 펼쳐질 평화의 세계상을 보여준다는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 65:25의 “뱀이 흙을 먹을 것이다‘라는 말도 역시 평화의 세계상을 보여주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사 65:25에서는 11:6-8과는 다른 ’뱀‘49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65:25에서 뱀에 대한 모티브는 다른 동물들의 모티브와는 사실 다르다. 무엇보다도 다른 동물들은 서로 상대역(강자와 약자)을 갖고 있지만, 뱀 만큼은 단독으로 쓰이고 있다(뱀과 흙이 강자와 약자인 식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 11:8에서는 뱀 역시 자기 상대역(젖먹이 아이, 젖땐 아이)을 갖고 있으며, 다른 동물들의 표상과 마찬가지로 강자와 약자간의 평화의 이미지로 쓰였다. 그렇다면 사 65:25의 뱀에 대한 표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하는 야훼의 새 창조신학과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구약성서에서 사 65:25와 같이 ‘뱀’(שׁחג)과 ‘흙’(רפע) 두 단어가 함께 쓰인 곳은 창 3:14(동사:'먹다‘ לכא)과 미 7:17(동사: ’핥다‘ ךחל)이다. 그런데 우선 미 7:17에서 동사 ’핥다‘(ךחל)의 주체는 ’뱀‘이 아니라, 민족들(םיוג)이다(V.16. 피엘형 3인칭 남성 복수 וכחלי). 즉, 민족들이 마치 뱀처럼 흙을 핥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그들의 권력이 땅에 떨어져 야훼를 두려워 할 것이라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 7:17은 뱀 자신에 대한 저주의 말이 아니다. 여기서 뱀은 단지 땅에 기는 동물로서의 상징적 기능을 담당하여 민족들의 권력이 결국 뱀처럼 땅을 기게 될 것임을 말할 뿐이다. 이런 표현은 시 72:9f.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흙을 핥는다‘(V.9 ךחל רפע)는 것은 곧 ’엎드리다/굴복하다‘(V.11 히트파엘형 החשׁ)는 것을 의미한다. 사 49:23 역시 ’흙을 핥는 것‘(וכחלי ךילגר רפע)은 ’땅에 (엎드려) 얼굴을 대는 것‘(ווחתשׁי ץרא םיפא)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표상은 사 65:25 ’뱀‘에 대한 표상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창 3:14 뱀에 대한 저주의 표현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50 두 본문의 차이는 창 3:14에서는 ’먹다‘(לכא) 동사가 쓰였고, 사 65:25에서는 명사 ’빵/음식‘(םחל)이 쓰인 점이다. 창 3:14은 뱀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저주(רורא)받은51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바로 이 점이 사 65:25이 창 3:14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 65:25에서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이 되는 존재로서의 ’뱀‘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 평행본문인 사 11:6-8과는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했고, 그 내용도 다르게 적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의 세계이지만, 야훼의 적대자들에게는 심판이 분명히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서 처음과 마지막을 보면 분명해 진다. 사 1장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고발/비판하고 시온/예루살렘이 다시 정의와 공의로 회복될 것임을 말한다고 이미 지적했다. 그런데 이사야서 1장 마지막에 가서(V.28-31) 야훼의 적대자들(םיעשׁפ)에게는 꺼지지 않는 불(הבכמ ןיא)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사야서 마지막장에서도 동일하게 나온다: 야훼의 종들에게는 구원이 선포되지만 그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이 있다(V.14b). 왜냐하면 야훼가 온 세상, 온 육체(רשׂב־לכ)를 불로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V.16). ’온 육체‘(רשׂב־לכ)가 야훼의 새 창조(새 하늘과 새 땅)로 인해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V.22), 이들은 야훼의 적대자들이 꺼지지 않는 불(הבכת אל םשׁא)에 타는 야훼의 심판을 보게 될 것이다(V.24).



이사야서의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것은 구원과 심판이 이토록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사야서의 마지막이 야훼의 종들과 적대자들을 구원과 심판으로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점은 히브리성서 제2부 ‘느비임’(예언서)의 마지막인 말라기서의 결론(말 3:17-21: 국역: 말 3:17-4:3)과도 일치한다. 즉,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이다. 이는 또한 히브리성서 제3부 ‘케투빔’(성문서) 첫 번째 책인 시편의 가장 앞부분인 시편 1편의 내용과도 동일하다52.



이상을 정리해 보면, 정의와 공의의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시온의 회복은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다음 그 평화의 장소로 온 민족이 몰려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야훼의 적대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 바로 이것이 현 이사야서 전체 그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야훼의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의 신학이다.







4. 나가면서







한국 민중신학의 뿌리가 한국의 7.80년대 독재 정치하의 불의와 부정, 폭력의 시대였고, 무엇보다도 그런 불의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민중에 대한 새로운 ‘눈 뜨임’으로부터 이었다고들 말한다. 이 새로운 ‘눈 뜨임’이란 기존 기독교 신앙의 원조였던 서구 신학에 감(기우)고 살았던 우리네 눈을 다시 뜨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인식이 지금도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지난 20년간 한국 민중신학은 여러모로 변화했고 심지어 그 힘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많다. 필자는 여기서 민중신학의 변천의 모습이나, 현 민중신학내의 여러 쟁점들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본고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임태수 교수의 두 가지 지적, ‘반민중적인 기독교에서 민중적인 기독교로의 전환’과 ‘믿음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탈피하여 행함을 겸비한 기독교로의 전환’을 위해 다시 한 번 성서를 통한 새로운 ‘눈 뜨임’을 말하고자 한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의 근원이 성서에 대한 ‘눈 뜨임’을 말했다면, 제2의 종교개혁을 지향하는 민중신학에서의 새로운 성서해석의 ‘눈 뜨임’을 위한 한 가지 제언이 될 것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이사야서 전체 최종형태 구성 하에서 야훼의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이 갖고 있는 이사야서 전체 신학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민중신학의 근저에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서있다. 그것은 민중이 이 땅에서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저 하늘에 평안의 소망을 두라고 강조했던 반민중적 기독교 신학에 대한 반기였고 혁명이었다. 이사야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신학은 민중이 저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주인 되는 세상을 말한다. 강자, 지배자, 기득권 세력들의 폭력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라는 요구와 그 뒤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정의와 평화의 순차문제,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온 민족들의 구원의 표상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다. 메시야의 도래를 꿈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 앞에 그 모습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이사야서는 보여준다. 메시야 도래만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정의와 공의의 실천이다. 이 실천의 모습은 이 땅의 가난한 자들, 곤궁한 민중들에 대한 모든 억압의 굴레를 벗기는 것이다. 시온의 진정한 평화는 시온에 정의가 이루어진 다음이라는 것을 이사야서의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구도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한 평화의 모습은 온 민족이 그곳으로 몰려드는 세상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야훼의 뜻을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 이 내용이 이사야서 처음과 마지막이다. 시작과 끝이 같다는 말은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사야서 전체 내용 역시 이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민중신학이 반민중적 하늘의 신앙/학을 거부하고 땅의 신앙/학을 추구했다면, 이는 이사야서가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신학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 본 이사야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이사야서 최종형태 구성비평방법론에 기인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의 이러한 성서비평작업의 강조가 제2의 종교개혁을 지향하는 민중신학에 있어서 왜 중요한지를 끝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필자가 본고에서 중요하게 진행시켰던 성서해석학적 방법론은 최근 서구에서 일고 있는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비평 방법론이다. 물론 이 방법론은 민중신학이 그토록 비판적으로 몰아붙였던 서구신학의 또 다른 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모든 서구신학 방법론을 다 부정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중신학의 성서해석학의 기초는 서구의 역사비평방법론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서의 비평방법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했었는지가 문제다. 민중의 성서읽기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성서 본문의 역사비평적 전(前/全)이해에 있지 않다. 현재 성서 그 최종형태를 그대로 읽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성서해석의 ‘눈 뜨임’이란 민중의 성서 읽기를 위한 새로운 비평작업이며, 앞으로 민중신학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성서해석방법론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민중신학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민중신학이 성서를 너무 일방적인 한편으로만 읽어왔다는 것이다. 맞다. 민중신학이 바라보는 것은 한쪽 편에서의 성서 읽기였다. 보편성이 아니라 당파성으로 보는 성서였다. 그러나 굳이 민중신학적 주제들만을 골라 봄으로써 괜한 시비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성서 전체를 지금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해도 민중신학이 주장하고자 하는 당파성이란 너무도 분명하게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사야서 전체 그 최종형태 구성 방법론으로 살펴보았던 본고의 내용은 민중신학의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민중들을 위한 정의의 실천과 이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의 선포가 온 민족들의 종말론적 구원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 이사야서 전체 구성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민중신학이 새로이 정립해야 하는 새로운 성서해석학적 과제의 무게를 사회학의 연구결과에만 무리하게 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민중신학이 그 힘을 잃어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민중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성서를 읽고 있다. 믿음만을 강조해서 값싼 은혜로 전락했던 반민중적 기독교의 성서읽기가 성서 어느 한 본문만을 강조했던 것이었음을 비판했다면, 성서 각 책의 그 최종형태 구성을 보지 않고 민중신학적 주제들만을 골라내서 신학화 했던 지난날의 민중신학의 성서읽기 역시 바꾸어져야 한다.



제2의 종교개혁을 지향하는 민중신학이 꿈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이사야서 현 최종형태가 보여주는 구성과 다름이 없다!









1 임태수, “제2종교개혁을 지향하며”, in: 민중과 신학, 2000, 천안:민중신학연구소, 1-3, 1.




2 Ibid, 3.




3 Ibid.




4 사 65:17에서는 관사가 없이 나오고, 66:22에서는 관사를 붙여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으로 나온다. 이는 66:22이 앞에 나온 65:17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의 관련에 대해선 본 논고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5 예언서 연구에 있어서 이상의 방법론들의 시초는 B. Duhm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예언서들 안에 들어 있는 각 양식들의 리듬들을 발견하고 이로부터 무엇이 본래적(ursprunglich)이고 무엇이 이차 첨가구(sekundar)인지를 가려내었다. 그런 구분의 목적은 본문에서 무엇이 더 권위적(authentic)이며 덜 권위적(inauthentic)인 것인가를 구분해 내는 일이었다(B.Duhm, Die Theologie der Propheten, Bonn, 1875). 이상의 방법론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R.E.Clements, One Hundred Years of Old Testament Interpretation, Philadelphia, 1976, 51-57 과 H.G.Reventlow, “Die Prophetie im Urteil Bernhard Duhms”, in: ZThK 85, 1988, 259-274를 참고하라.




6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O.H.Steck, Die Prophetenbucher und ihr theologisches Zeugnis, Tubingen, 1996, V,를 참고하라.




7 이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하여는 특히 R.F.Melugin, “Prophetic Books and the Problem of Historical Reconstruction”, in: Stephen Breck Reid(Hg.), Prophets and Paradigms, Essays in Honor of Gene M. Tucker, JSOT.S 229, Sheffield, 1996, 63-78 과 B.S.Childs, “Die theologische Bedeutung der Endform eines Textes”, in: ThQ 167, 1987, 242-251를 참고하라. R.Rendtorff는 그의 이사야서 연구에서 이사야서 전체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조를 단순히 여러 문서층들로 떼어놓고 무엇이 더 근원적인 것이었고, 무엇이 편집층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그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Rendtorff, “Jesaja 56,1 als Schlussel fur die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in: idem,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 1991, 172-179, 172f.) 최근 성서해석학에 대한 통시적 방법론과 공시적 방법론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특히 Johannes C.De Moor, Synchronic or Diachronic? A Debate on Method in Old Testament Exegesis, OTS XXXIV, Kampen, 1994를 참고하라.




8 이 방법의 대표적인 학자가 O.H.Steck이다 (참고 Steck, ibid.).




9 Crusemann은 그의 토라 연구를 통해 문서비평의 결과들로 인해 본문이 각각 파편 (Geroll)으로 해체 되었다면 이제 그 방법을 바꾸어야 할 단계에 왔다고 지적한다. F.Crusemann, Die Tora. Theologie und Sozialgeschichte des alttestamentlichen Gesetzes, Munchen, 1992, 42.




10 이사야서 저자와 시락서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J.Schildenberger, “Die Bedeutung von Sir 48,24f. die Verfasserfrage von Is 40-66”, in: H.Junker und G.J.Botterwecker(Hg.), Alttestamentliche Studien, FS Friedrich Notscher, BBB 1,, Bonn, 1950, 188-204; P.C.Beentjes, “Relations between Ben Sira and the Book of Isaiah. Some Methodical Observations”, in: J.Vermeylen(Hg.), The Book of Isaiah - Le livre d'Isaie, BEThL 81 ,Leuven, 1989, 155-159을 참고하라.




11 이사야서의 전체 통일성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 했던 이는 Abraham Ibn Ezra (†1167) 이다. 이에 대해서는 M.Friedlaender, The commentary of [Abraham ben Meir] Ibn Ezra on Isaiah, London, 1873, 특히 170ff. 와 Jean M.Vincent, Studien zur literarischen Eigenart und zur geistlichen Heimat von Jesaja, Kap. 40-55, BET 5, Frankfurt a.M. u.a., 1977, 특히 15ff.를 참고하라.




12 여기에 속하는 이들로는 O.T.Allis, The Unity of Isaiah, Philadelphia, 1950; E.J.Young, Studies in Isaiah, London, 1954; idem., The book of Isaiah. Bd.1 Chapters 1 to 18, 1965, Nachdruck 1985, Bd.2 Chapters 19 to 39, 1969, Nachdruck 1992, Bd.3 Chapters 40 through 66, 1972, Nachdruck 1992; J.A.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Leicester, 1993; J.N.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 1-39, Grand Rapids, 1986 등이 있다.




13 사 1-39장과 40-66장의 전통적인 구분의 이유들에 대해서는 J.Werlitz, Redaktion und Komposition. Zur Ruckfrage hinter die Endgestalt von Jesaja 40-55, BBB 122, Bonn, 1999, 특히 95 참고하라.




14 그는 40-66장은 결코 1-39장의 8세기 예언자 이사야와 동시대일 수가 없으며, 40-52장은 포로기때의 것이며, 40-66장 전체는 포로기 이후에 가서 비로소 이사야서 안으로 들어 온 것이라고 보았다(J.G.Eichhorn,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Leipzig, 1780-1783, Gottingen, 41823/25, 83-97).




15 J.Chr.Doderlein, Esaias. Ex recensione textus hebraei ad fidem codd. quorundam mss. et versionum antiquarum latine verti notasque varii argumenti subiecit,, Altdorf, 1775, Nurnberg u. Altdorf, 31789, XII-XV.




16 두 사람 중 누가 먼저였는지의 논의는 K.Pauritsch, Die neue Gemeinde: Gott sammelt Ausgestoßene und Arme (Jesaja 56-66), Analecta Biblica 47, Rom, 1971, 4 주1, 과 Vincent의 위의 책, 17ff.를 참고하라.




17 B.Duhm, Das Buch Jesaia, Gottingen, 51968.




18 둠은 40-55장의 연대를 기원전 540년으로, 13:2-22; 14:4b-21.22f. 와 21:1-5은 제2이사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익명의 작품이며, 이른바 ‘종의 노래’라 불리는 42:1-4; 49:1-6; 50:4-9; 52:13-53:12는 포로기이후 익명의 작품이고, 56-66장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한 사람 제3이사야의 것으로 보았다. 또한 56-66장안에서 에스라와 사마리아 사람들간의 신정론에 대한 사상의 차이가 나타나고, 전체 이사야서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70년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연대가설은 1947년 쿰란에서 발견된 기원전 2세기경으로 밝혀진 이사야 대(大)두루마리(1QIsa)로 인해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9 이사야서의 세 구분에 대한 반대하는 논의들에 대해서는 Chr.R.Seitz, Zion's Final Destiny. The Development of the Book of Isaiah, Minneapolis, 1991, 특히 그의 참고문헌을 보라.




20 이사야서 각 세 책들에 대한 연구사에 대해서는 사 1-39장: H.Wildberger, Jesaja. 3. Teilband Jesaja 28-39, BK X/3, Neukirchen-Vluyn, 1982, 1529-1547; C.Hardmeier, “Jesajaforschung im Umbruch”, in: VF 31, 1986, 3-31; U.Becker, “Jesajaforschung (Jes 1-39)”, in: ThR 64, 1999, 1-37; 117-152; M.A.Sweeney, “Reevaluating Isaiah 1-39 in Recent Critical Research”, in: Currents in Research, Biblical Studies 4, Sheffield, 1996, 79-113; 사 40-55장과 56-66장에 대해서는 C.H.Cornill, “Die neueste Literatur uber Jes. 40-66”, in: ThR 3, 1900, 409-420; J.Nikel, “Die Die neuere Literatur uber Jes 40-66, insbesondere uber die Weissagungen vom Gottesknechts”, in: ThRv 1, 1902, 73-77; 105-111; G.Dahl, “Some Recent Interpretations of Second Isaiah”, in: JBL 48, 1929, 362-377; S.Mowinckel, “Neuere Forschungen zu Deuterojesaja, Tritojesaja und dem Abad-Jahwa Problem”, in: AcOr 16, Leiden 1938, 1-40; G.Fohrer, “Neue Literatur zur alttestamentlichen Prophetie (1961-1970)”, in: ThR 45, 1980, 1-39; A.G.Auld, “Poetry, Prophecy, Hermeneutic: Recent Studies in Isaiah”, in: SJTh 33, 1980, 567-581; A.Richter, “Hauptlinien der Deuterojesaja - Forschung von 1964-1979”, in: C.Westermann, Sprache und Struktur der Prophetie Deuterojesajas, Stuttgart, 1981, 89-131; H.-J.Hermisson, “Deuterojesaja-Probleme. Ein kritischer Literaturbericht”, in: VF 31, 1986, 53-84; H.Leene, “Auf der Suche nach einem redationskritischen Modell fur Jesaja 40-55”, in: ThLZ 121, 1996, 803-818; J.Goldingay, “Isaiah 40-55 in the 1990s: among other things, deconstructing, mystifying, intertextual, socio-critical, and hearer-involving”, in: BI 5, 1997, 225-246.




21 새로운 이사야서 연구의 방법론적 전환의 논의들에 대해서는 M.A.Sweeney, “The Book of Isaiah in Recent Research”, in: Currents in Research Biblical Studies 1, Sheffield, 1993, 141-162; H.G.M.Williamson, “Synchronic and Diachronic in Isaian Perspektive”, in: Johannes C. de Moor(Hg.), Synchronic or Diachronic? A debate on method in Old Testament exegesis, OTS 34, Leiden u.a., 1995, 211-226; M.Tate, “The Book of Isaiah in Recent Study”, in: J.W. Watts u. P.R. House(Hg.), Forming prophetic literature: essays on Isaiah and the Twelve, in honor of John D.W. Watts, JSOT.S 235, Sheffield, 1996, 22-56 등을 참고하라.




22 렌토르프(R.Remdtorff)는 이런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관심을 내 비취면서 “현 최종형태 이사야서 전체에 대한 구성을 묻는 일은 그 동안 구약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진 주제가 아니었다” 고 말한다. R.Rendtorff,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in: VT XXXIV, 3 1984, 295-320, 295.(= idem.,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 1991, 141-161).




23 이사야서 연구에 있어서 이런 관심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 것은 챠일즈의 구약정경개론 이사야서에서이다. B.S.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1979.




24 참고, U.Berges, Das Buch Jesaja, Komposition und Endgestalt, HBS 16, Freiburg u.a. 1998, 15; Tate, Recent Study, 45.




25 참고, Williamson, Synchronic and Diachronic; R.Rendtorff, “The Book of Isaiah: A Complex Unity. Synchronic and Diachronic Reading”, in: R.F. Melugin und M.A. Sweeney(Hg.), New Visions of Isaiah, JSOT.S 214, Sheffield, 1996, 32-49.




26 필자는 이를 구성이 잘 짜여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비교하곤 한다. 영화 필름은 수많은 장면들을 하나로 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단순히 찍은 순서대로 이어놓은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대로 편집해서 이어놓은 것이다. 또한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각 장면들을 찍었던 순서를 논하지 않는다. 완성된 영화의 순서대로 본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흔히 영화의 첫 장면을 놓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때론 첫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지만 마지막 까지 영화를 본 사람들은 첫 장면이 비로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구성이 잘 짜여진 영화일수록 영화 전편에 걸친 복선과 그에 대한 해답들을 영화가 전개되면서 알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의 현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성서해석학 방법론은 바로 이와 같은 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 이사야서의 첫 단락에 대한 논의는 J.T.Willis, “The First Pericope in the Book of Isaiah”, in: VT 34, 1984, 63-77를 참고하라.




28 1950년대 이미 Liebreich가 사1장과 65-66장과의 연관성을 지적한 이래(L.Liebreich, "The Compliation of the Book of Isaiah", in: JQR 46(Teil I), 1955-56, 259-277; JQR 47 (Teil II), 1956-57, 114-138), 최근 이사야서 전체를 보려는 연구에서는 사 65-66장과 사 1장간의 연관성으로 인해, 전체 이사야서의 결론부를 사 65-66장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Carr, Reading Isaiah; idem., "Reaching for Unity in Isaiah", in: JSOT 57, 1993, 61-80, 특히 73; M.A.Sweeney, "Prophetic Exegesis in Isaiah 65-66", in: Craig C.Broyles/Craig A.Evans(Hg.),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VT.S 70/1, Brill u.a. 1997, 455-474; W.A.M.Beuken, "Isaiah Chapter LXV-LXVI: Trito-Isaiah and the closure of the book of Isaiah", in: J.A.Emerton(Hg.), VT.S 43, Congress Volume, Leuven 1989, 204-221; O.H.Steck, "Beobachtungen zur Anlage von Jes 65-66“, in: BN 38/39, 1987,  103-116(=idem, Studien zu Tritojesaja, BZAW 203, Berlin/New York 1991, 217-228); idem., "Zu jungsten Untersuchungen von Jes 56,1-8; 63,7-66,24“, in: ibid., 229-265 등을 참고하라. Beuken은 사 65-66장안에 3가지 에필로그가 있는데, 65:1-66:14는 제3이사야서의 결론, 66:15-20a(20b-21)은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의 결론, 그리고 66:22-23(24)는 전체 이사야서의 결론이라고 본다. Steck는 65-66장은 63:7-64:11의 탄원에 대한 대답으로 보며 이 둘의 관련을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 Sweeney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 1장과 65-66장과의 연관성만을 언급하고 2장과의 연관성을 간과한 것에 대해, Tomasino는 사 1-2:4과 사 63-66과의 관련을 주장한다(A.J.Tomasino, "Isaiah 1,1-2,4 and 63-66, and the Composition of the Isaiahnic Corpus", in: JSOT 57, 81-98). 그러나 필자는 이사야서 전체 결론부는 사 65장서 부터로 보기보다는 65장 17절부터 보기를 주장한다. 그 이유로, 일반적으로 어느 한 책의 결론이란 그 앞에 있던 내용들을 요약하는 기능과 함께 새로운 결론의 단락을 이끈다는 의미에 있다. 이런 점에서 65장 17절에 언급된, “새 하늘 새 땅”은 그 앞 단락과 구분이 되는 새로운 단락을 이끌며, 이는 마지막 66장 22절에 다시 언급됨으로써 이사야서 전체 결론부를 감싸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또한 65:1-16에 나타나는, ‘이방제의’, ‘심판선포’와 야훼의 대적들과 야훼의 종들과의 구별이라는 주제들 모두가 사 66장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65장 처음부터를 이사야서 전체 결론부로 취급할 시에는 결론부 안에 두 번씩 반복된다는 점이다.




29 이에 대해서는 Tomasino, "Isaiah 1,1-2,4 and 63-66, and the Composition of the Isaiahnic Corpus"; Sweeney, “Prophetic Exegesis in Isaiah 65-66”; Carr, “Reading Isaiah from Beginning (Isaiah 1) to End (Isaiah 65-66)”등을 참고하라.




30 이사야서 전체에서 ‘안식일’이 언급된 곳은 서론부와 결론부외에 사 56장과 58장이다. 단 사 56장과 58장에서는 안식일과 함께 쓰인 ‘월삭’이라는 단어는 빠져있다. 특히 사 56장과 58장안에는 또한 서론부와 결론부에 나오는 이상의 모든 주제들이 하나의 의도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함께 언급된다. 물론 사 56장과 58장의 주제들 역시 전체 이사야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안식일이라는 주제가 이사야서 전체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사야서의 결론부를 다루는 것이어서 사56장과 58장에 대해서는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31 이사야 24-27장에 대한 연구 논의들은 일반적으로 a) 통일성의 문제, b) 이사야서와의 관련성, c) 연대 문제, d) 묵시문학과의 관련 등으로 나누어지지만, 이와 관련된 논의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을 참고하라. W.Rudolph, Jesaja 24-27, BWANT 62, Stuttgart 1933; G.Fohrer, 'Der Aufbau der Apokalypse des Jesajabuchs (Is 24-27)", in: CBQ 25, 1963, 34-45 (= BZAW 99, 1967, 170-181); B.Otzen, 'Traditions and structures of Isaiah XXIV-XXVII", in: VT 24, 1974, 196-206; G.N.M.Habets, Die Groe Jesaja-Apokalypse (Jes 24-27). Ein Beitrag zur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Bonn 1974; W.R.Millar, Isaiah 24-27 and the origin of apocalyptic, HSM 11, Cambridge 1976; J.F.A.Sawyer, From Moses to Patmos. New perspectives in Old Testament study, London 1977(특히 이사야서 전체와의 관련성에 대해 다룬 112-118을 참고); R.Coggins, "The Problem of Isaiah 24-27", in: ET 90, 1978/9, 328-333; H.Wildberger, Jesaja. 2. Teilband Jesaja 13-27, BK X/2, Neukirchen-Vluyn 1978, 885ff.(Lit.); M.A.Sweeney, "Textual citations in Isaiah 24-27. Toward an understanding of the redactional function of chapters 24-27 in the book of Isaiah", in: JBL 107, 1988, 39-52. ‘이사야 묵시록’ 테제에 반대하는 것으로는, 특히 K.Koch, Ratlos vor der Apokalyptik. Eine Streitschrift uber ein vernachlssigtes Gebiet der Bibelwissenschaft und die schdlichen Auswirkungen auf Theologie und Philosophie, Gtersloh 1970를 참고하라.




32 일반적으로 ‘종의 노래’에 속하는 본문은 42:1-4; 49:1-6; 50:4-9; 52:13-53,12 이라고 본다.  그러나 J.Werlitz는 ‘종의 노래’라는 분류의 근거가 그 ‘양식개념’(Gattungsbegriff)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모아놓은 ‘수집개념’(Sammelbegriff)이라고 말한다. J.Werlitz, “Vom Knecht der Lieder zum Knecht des Buches. Ein Versuch uber die Erganzung zu den Gottesknechtstexten des Deuterojesajabuches”, in: ZAW 109, 1997, 30-43, 30 Anm. 1. ‘노래’ 문제의 논의에 대해서는 idem., Redaktion und Komposition. Zur Ruckfrage hinter die Endgestalt von Jesaja 40-55, BBB 122, 1999, 특히 26 Anm. 50을 참고하라.




33 Rendtorff는 구약성서에서 ‘하늘과 땅’ 두 단어가 함께 쓰일 경우, 이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Schoffungshandeln)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Wirksamkeit Gottes)의 영역으로서의 전 세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참고, 신 3:24; 4:39; 왕상 8:23; 사 1:2; 49:13; 66:1; 렘 23:24; 시 96:11; 113:6; 대상 29:11). R.Rendtorff,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Ein kanonischer Entwurf. Bd.1: Kanonischer Grundlegung, Neukirchen-Vluyn 1999, 12.




34 두 번에 걸쳐 쓰인 יננה “보라!”는 지금 현재의 일을 가르치는 단어다.




35 이에 대해서는 특히 W.A.M.Beuken, "The main theme of Trito-Isaiah, 'The servants of YHWH'", in: JSOT 47, 1990, 67-87; J.Blenkinsopp, "The Servant and the Servants in Isaiah and the Formation of the Book", in: Craig C.Broyles/Craig A.Evans(Hg.),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VT.S 70/1, Brill u.a. 1997, 155-176을 참고하라.




36 야훼의 새 창조에 대한 모습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사야서의 결론부(65:17-66:24)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36 야훼의 새 창조에 대한 모습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사야서의 결론부(65:17-66:24)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65:17: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65:17: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V.18: 야훼가 예루살렘기쁨의 도성으로, 그 백성(주민)이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하신다.


   V.18: 야훼가 예루살렘기쁨의 도성으로, 그 백성(주민)이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하신다.


  66:10: 예루살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


  66:10: 예루살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


   V.20: 야훼께서 모든 백성을 그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할 것이다


   V.20: 야훼께서 모든 백성을 그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할 것이다


   V.21: 야훼가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뽑을 것이다.


   V.21: 야훼가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뽑을 것이다.


   V.22: 왜냐하면, 야훼가 만드시는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


   V.22: 왜냐하면, 야훼가 만드시는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


   V.23: 모든 육체들이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마다 야훼를 경배하러 올 것이다.




37 이사야서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특히, U.Berges, "Die Armen im Buch Jesaja. Ein Beitrag zur Literaturgeschichte des AT", in: Bib 80, 1999, 153-177을 참고하라.




38 사 5:7이 비슷한 발음을 가진 두 단어(‘쩨데카’-정의/ ‘쩨아카’-울부짖음)를 사용하여 사회를 고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65:19에서의 ‘쩨아카’(울부짖음)가 없는 세상은 다시 말하면 ‘쩨데카’(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9 이에 대해서는 O.H.Steck, "Beobachtungen zur rezeption von Gen 1-3 in Jes 65,16b-25“, in: J. van Ruiten u. M.Vervenne(Hg.), Studies in the book of Isaiah, Leuven 1997, 349-365; idem., "...ein kleiner Kanbe kann sie leiten. Beobachtungen zum Tierfrieden in Jesaja 11,6-8 und 65,25", in: J.Hausmann u. H.-J.Zobel(Hg.), Alttestamentlicher Glaube und Biblische Theologie, FS. H.D.Preuss, Stuttgart 1992, 104-113; T.A.G.M.Ruiten, "The intertextual relationship between Isaiah 65,25 and Isaiah 11,6-9", in: F.Garcia Martinez u.a.(Hg.), The Scriptures and the scrolls: Studies in honour of A.S. van der Woude on the occasion of his 65th birthday, VT.S 49, Brill 1992, 31-42 와, 특히 사 11:1-16과 제3이사야서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B.D.Sommer, "Allusions and Illusions: The Unity of the Book of Isaiah in Light of Deutero-Isaiah's Use of Prophetic Tradition", in: R.F.Melugin und M.A.Sweeney(Hg.), New Visions of Isaiah, JSOT.S 214, Sheffield 1996, 459-470을 참고하라.




40 가난한 자들을 향한 메시아 기대는 사 61:1-3에서 다시 나타난다. 사 11:2에서 ‘야훼의 영’(הוהי חור)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위에 내렸다면, 사 61:1에서는 '야훼의 영'(הוהי חור)이 그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에게 내린다. 사 61장에서 예언자 소명기사의 중심은 그 목적이 사회 약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41 사 11장 1절과 10절은 모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 나옴’을 동일하게 씀으로써 그 이하의 주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2 이런 움직임은 이미 70년대 말 찜멀리(W.Zimmerli, "Vom Prophetenwort zum Prophetenbuch", in: ThLZ 104, 1979, 481-496)에게서부터 나타났었다.




43 참고, H.Gunkel, "Einleitungen, 3., Die Propheten als Schriftsteller und Dichter“, in: H.Schmidt, Die grossen Propheten: Die Schriften des Alten Testaments Band II, Gottingen 1915, XXXIV-LXX.




44 이에 대해서는 특히 C.Westermann, Grundformen prophetischer Rede, BevTh 31, Munchen 1978.




45 이 부분의 연구사에 대해서는 J.Schabert, "Die Prophetische Literatur: Der Stand der Forschung", in: De Mari a Qumran: I'Ancien Testament; son milieu; ses Ecrits; ses relectures juives. FS. J.Coppens, Gembloux, Paris 1969, 58-118; J.M.Schmidt, "Probleme der Prophetenforschung", in: VF 17, 1972, 39-81; J.Limburg, "The Prophets in Recent Study: 1967-1977", in: Interp. 32, 1978, 56-68; J.Jeremias, "Grundtendenzen gegenwartiger Prophetenforschung“, in: EvErz 36, 1984, 6-22; G.M.Tucker, "Propecy and the Prophetic Literature", in: D.A.Knight/G.M.Tucker(ed.), The Hebrew Bible and Its Interpreters, Philadelphia 1985, 325-368; H.M.Barstad, "No Prophets? Recent Developments in Biblical Prophetic Research and Ancient Near Eastern Prophecy", in: JSOT 57, 1993, 39-60 등을 참고하라.




46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따른 예언서 구분에 대해서는 H.D.Preuß,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Israels Weg mit JHWH, Bd.2, Stuttgart u.a. 1992를 참고하라.




47 그 한 예로 미가서의 경우, ‘구원’과 ‘심판’의 주제는 미가서 전체 구성을 의도한 중요 주제로 서로 분리되어지지 않는다: 1:2-3:12(심판) - 4:1-5:14(구원) - 6:1-7:7(심판) - 7:8-20(구원). 이에 대해서는 E.Zenger,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s, Stutgart 19983을 참고하라.




48 레 26:6f. 역시 야훼의 평화의 약속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도 사나운 짐승들이 사라질 것을 말한다. 이런 표상은 야훼의 백성들에게는 평화의 약속(구원)임과 동시에(V.6b), 이 백성의 대적들에게는 심판이 있음을 말한다(V.7).




49 뱀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 역시 다르다: 사 11:8에서는 독사(ןתפ), 살모사(ינועפצ); 65:25에서는 뱀(שׁחנ)으로 쓰고 있다.




50 이에 대해서는 특히, O.H.Steck, "Beobachtungen zur Rezeption von Gen 1-3 in Jes 65,16b-25“, in: J. van Ruiten u. M.Vervenne(Hg.), Studies in the book of Isaiah, Leuven 1997, 349-365; K.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im Tritojesajabuch, WMANT 62, 1990, 172f.; W.Law, Schriftgelehrte Prophetie in Jes 56-66. Eine Untersuchung zu den literalischen Bezugen in den letzten elf Kapiteln des Jesajabuches, BZAW 225, Berlin u.a. 1994, 140 등을 참고하라.




51 뱀에 대한 말이 ‘저주의 말’(Fluchspruch)인지 아니면 하나의 ‘형벌의 말’(Strafspruch)인지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J.Schabert, "Fluchen und Segen im AT", in: Bib 39, 1958, 1-25; C.Westermann, “Fluch- und Segensspruche”, in: BHH I, 489-490을 참고하라.




52 이는 히브리성서의 정경적 구성의 의도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성서 제3부 성문서 시작인 시편 1편은 제2부 예언서의 결말과의 연결뿐 아니라, 예언서의 가장 앞부분인 여호수아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cf. 수 1:8/시 1:2: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다”).





2002-10-27 15: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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