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강좌] 구약성서의 하나님(갈릴리 성서아카데미 성서강좌)
  박경철 [ E-mail ]
  

갈릴리 성서 아카데미 제1기 성서강좌

제 2 주: 구약성서의 하나님(유일신 하나님의 의미)
강사: 신학박사 박경철

신앙고백으로 읽는 하나님의 말씀
성서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에 대한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말이라고 할 때, 이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꾸며낸) 하나님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여기는 인간의 하나님 경험, 즉 인간이 그들의 역사 한 가운데서 경험한 신(하나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한 몽상가에 의해 만들어진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이야기이며, 그것이 한 인간의 경험과 이야기가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해 열려있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인간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경험이라고 했을 때, 이는 단순한 과거사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그들의 신앙의 경험이며, 고백이다. 성서가 정경으로써 신적 권위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조들의 신앙고백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졌으며, 그때마다 옛 선조들의 신앙고백은 각 시대마다 동일한 경험과 고백으로 이어졌으며, 그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구약성서는 이상과 같은 경험과 고백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며,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서 오늘도 동일한 경험과 고백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동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신학(Theology)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신/하나님을 가리키는 ‘테오스’와 말/논리를 뜻하는 ‘로고스’가 합해져 만들어진 말이다. 즉, 신학이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이해한다면, 신에 대한 말/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신학이란 구약성서 전체 내용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또한 그 전체 내용이란 바로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성서 자신이 말하는 그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갈릴릴 성서 아카데미 성서강좌의 시작은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새롭게 인식해야 할 문제는, 바로 성서 자체로부터 이를 찾는 일이다. 성서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는 또한 하나님을 경험한 많은 신앙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신앙고백들로부터 하나님의 상(像)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서에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출 20:2 십계명 서문의 첫 문장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의 첫 문장으로, 출애굽이후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하나님 자신의 소개이다:
"나는 야훼(하나님 이름 거론), 너의 하나님,
너를 종살이하던 에집트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얘기한다. 과거사건인 출애굽을 얘기하는 것은 그 다음 하나님의 법인 계명들을 거론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 본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 정의이다. 이 본문은 구약성서 곳곳에서 그와 유사하게 계속 발견된다(예언서에서와 법조항들을 다루는 곳곳에서).
이 본문이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그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십계명 처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장소는 시내산, 곧 하나님 자신이 계시는 곳이다. 그 장소에서 자신 스스로 바로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것이다.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오경의 법들로 들어가는 그 바로 가장 앞에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신 5장에 다시 반복(시내산, 호렙)됨으로 십계명이 오경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을 보여준다. 출애굽 주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다루는 주제로, 이스라엘의 근본 신앙고백의 전승으로 구약 전체에서 매우 특이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 바로 근본 표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바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다. 많은 고대종교들에서 보이는 원역사와 창조와 관련된 그런 신의 모습이 아닌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안에, 역사 사건과 관련된 하나님으로서 그 특이성을 보인다. 특히 왕의 하나님, 파라오의 하나님, 강한 자의 하나님 상(像)이 아니라, 그로부터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라는 상(像)은 종교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여기서 "너의 하나님" 즉, "나의"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은 우선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그 다음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이는 바로 "그렇기 때문"인 그 근거로 제시된다. 자유, 해방이 근거이다. 그래서 "너의 하나님"이 되며, 그로부터 자유와 해방의 계명들이 십계명 근본 내용을 차지하고, 오경 전체가 또한 그렇다. 십계명 전체 계명은 이 주제와 연관되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안식일 계명이 자유의 날로써의 그 의미가 그렇고, 살인금지 명령은 단순히 하나의 (일반적인) 요구 명령만이 아니라, 바로 네 이웃, 그러한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이웃에 대한 계명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
출 20:2에 대한 랍비문헌 (미드라쉬 메히타)에 의하면, 십계명이 왜 토라 그 처음에 주어지지 않았을까 에 대해, 즉, 왜 창조 그 앞이 아닌가의 문제를 설명한다. 이는 계명은 바로 창조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경험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말한다. 전체 계명에 대한 이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진실이다.
미드라쉬 메히타 본문 설명에 따르면,
".........한 사람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왕이 되련다" 주민들이 묻기를, "네가 우리의 왕이 되기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했던가? 왕은 성벽을 세우고, 수로를 놓아주나?" 다시 그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부터 그렇게 너희들의 왕이 되련다" 그러자 주민들이 "예" 라고 대답한다. 이스라엘을 에집트로부터 이끌어 내고 홍해바다를 건너고 광야에서 구원해 주고, 시나이에 와서 "내가 너희의 왕이 되련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대답하기를 "예".........."
십계명이 핵심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중요 사항들을 언급한다면, 우선 본문은 계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 계명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해방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아니다. "너의 하나님" "너" 단수로 나오는 개인은 십계명 전체가 바로 "너"를 향하고 있음과 같다. 이것이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된다.
하나님-이스라엘-자유(해방)의 세 주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이는 어느 하나로 줄일 수 없다. 성서 곳곳에 이 상관관계는 나타난다. 예를 들어, 누가 참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본문들에도 이 세 주제는 항상 관련된다. 하나님(이름)-이스라엘-자유에서 이 자유(해방)는 한 이론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경험과 관련한다. 성서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묻는 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유" 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 주제는 근본적인 요소다. "자유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고, 자유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다." 성서 본문에서 누가 하나님인가 하는 주제들은 바로 이 정의(定意)하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해방의 사건, 자유가 있는 곳, 거기 하나님이 관계하셨는가에 대한 물음과 확인이 가장 근본적인 작업이다. 그 동안의 여러 구약신학들의 문제는 바로 이 근본 테마를 도외신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유'라는 개념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구약성서 개념이 아니다. 출애굽과 광야유랑에서 본문이 말하는 것은 에집트로부터 이끌어 내셨다는 역사적 경험과 관련한다. 구약성서 전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의 그 근본을 이루고 있는 본문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후기 왕조시대의 신학적 산물이다.
출애굽이야기와 함께 나오는 드보라의 구원의 노래는 출애굽사건과 관련이 없는 구원에 대한 유사 주제가 함께 연관된 것이다. 출애굽 주제는 여러 시대를 거쳐 매우 다양하게 펼쳐지는데, 중요한 것을 든다면,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를 역사적 사건과 관련지으면 절대 권력자였던 솔로몬시대의 강제노역과 관계한다. 솔로몬 사후 강제노역으로부터 해방의 모티브가 바로 출애굽 주제를 가진다. 이로부터 자유의 나라 북왕국 이스라엘 건국에 기인한다. 또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는 포로기이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 모티브를 바로 새로운 출애굽과 관련지었다. 출애굽 주제를 발전시킨 중요한 본문으론 사 43장 14절 이하에 나타난다. 16절에 옛 출애굽 사건을 끌어들이고, 18절 이하에 이제 새로운 것을 말한다. "신(新) 엑소더서(출애굽) Neuer Exodus"이다. 포로기 예언자들인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제2이사야에게서 새 출애굽, 해방의 사건은 먼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이 아니라 이미 선포되고 시작된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나 자유와 해방에 대한 새로운 출애굽 개념은 옛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으로 강조된다(사 43,18f.:"..지난 일을 생각지 말라...옛일을 기억지 말라... 보라 새 일을 행하리니...).
개인 "너" 에 대한 것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을 맺는 것은 유대교의 전통에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 유대교 '파사 하가다'에 따르면, 유월절 축제 의례시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현재 지금 살고 있는 자신들과 관련시킨다.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한 것이 강조된다. 성서 본문 자체에서 보면, 개인 탄원 시편들에서도 탄원자 자신을 출애굽 구원 주제와 관련시킨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문제.
십계명 서문 처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는 것은 그 다음에 따르는 출애굽과의 관련 속에서 이는 마치 사람들끼리도 제일 먼저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을 밝히 듯, 이름은 한 인격에 대한 첫 표현을 담고 있으며, 이는 모든 것이 바로 그 이름과 관련된다는 말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 인간과의 관련에서 그 정체성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야훼 이름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름을 갖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의 하나님이란 다른 일반 종교에서도 통용되는 신에 대한 표상일 뿐이다.
이름 자체에 대한 문제에서 첫째로, 4 자음 글자 YHWH(הוהי)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이미 이는 공식적으로 발음할 수 없다는 전통이 있었다(회당등에서..). 이는 특별한 독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케레 푸티품(쓰여 있는 것과 달리 발음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 내에는 많은 야훼 이름이 포함되어 (이사야후, 예레미야후, 야후...) 나타나는데, 그 본래의 발음에 대한 학계의 재구성의 시도들은 각자의 가설들에 불과하다.
구약성서에 이는 약 7천번 이상 쓰인 단어다. 이는 전형적인 히브리어 이름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문장형 이름이다. 3인칭 남성형, 하야(be동사) היה 형으로, 옛 형태 하와 הוה 에서 온 것이다. 이를 문법상 히필형(사역형)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칼형(일반 능동형)으로 볼 지에 대한 논의들 모두 가설들이다. 대체로 학계에선 하야 동사가 사역형이 없기 때문에 이를 칼형으로 본다. 여기서의 'be'동사는 그리스식의 어떤 무시간적 한 존재를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형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 속에서 그는 어떤 일을 일으키는(생기게 하는) 이로써 나타내어진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시는지 성서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출 3장 과 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아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 자신의 이름 계시한다. 이 두 본문은 모두 출애굽,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해방사건을 처음 시작하는 그 시점과 관련된다.
출 3장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하나님 자신의 말로 시작(4절), 이전 족장 역사 서술 (6절), 해방과 자유를 위한 출애굽 관련 (7절), "함께 하는 자" (11절), 하나님 이름에 대한 질문 (13절)과 그에 대한 대답 (14절):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나는 나다). 그의 이름을 묻는 3인칭 문장형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1인칭으로 나온다. 앞 절에서 "함께 있는 자"로 표현된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강조된 의미로서의 대답이다. 15절에서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는 이름은 테트라그람-거룩한 자음 4자- 족장들과의 관련, 그리고 "영원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는 이 본문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외 다른 내용이란 없다. "함께 하는 이"의 자기 계시는 그의 약속이며, 이는 바로 이스라엘과의 관련이다.
하나님 이름의 오용에 대한 금지와 관련하여, 무엇 때문에 마소라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이 불릴 수 없게 한 것인가? 특히 발음상의 그 어려움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가? 본래의 발음은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종교사적 연구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과 관계를 맺는다. 이는 단지 한 하나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다신 세계에서 신들은 인간들과 같이 각자의 이름들을 갖고 있다. 각자의 이름을 통해 그를 부를 수 있고, 다른 신들과 구분을 지을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인격으로써 자기 정체성과 관련한다. 특히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계명은 그 이름이 그로 인해 상해를 입는 것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곧 인간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남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것에 대한 금지인 것이다. 이는 바로 십계명의 거짓증거 금지 계명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한 금지와 그에 대한 대체 발음의 과정들을 보면, 주전 3세기경, 모세오경인 토라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퀴리오스'(주)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고, 실상 이는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문제를 갖고 있었다. 주전 2세기경의 쿰란에서 나온 문서들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이름은 더 이상 발음될 수 없는 것으로 나온다. 주후 70년 이후 성전이 무너진 이후로는 더 이상 회당에서도 야훼의 이름은 더 이상 불리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신비로움"과 관련을 맺는다. 유대교에선 그 신비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대신에 그에 대한 대용으로 자주 사용한 것이 바로 퀴리오스, 주(主)라는 뜻인 "아도나이" 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일반적인 주인을 가리키는 한 칭호로서가 아니라 단지 발음상의 문제로 인한 하나의 특별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독일어 루터 성경 등에 고유한 한 칭호처럼 대문자를 사용하여 "Herr" 주(主) 라고 쓰는 것은 본래의 의미와는 잘못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로 "이름"을 뜻하는 "쉠"앞에 정관사를 써서 "그 이름" "핫쉠" 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대신에 그 이름을 불러야 하는 곳에서 "핫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아람어 "이름" 을 뜻하는 "쉐마"에서 온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과 기독교의 관련은 무엇인가? 매 예배시 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한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기독교에선 하나님의 그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즉 하나님이 자기 이름과 함께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한다는 것에 대해 기독교는 알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이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첫 번째 문제는 무엇보다도 번역상의 어려움과 다음으로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다. 구약성서 수많은 본문들에서 하나님에 대해 여러 모습으로 타내는데, 항상 그의 이름은 특별한 역할을 한다. 만약 이를 단순히 "하나님"으로 일괄적으로 번역할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한 본문을 예로 든다면 잘 알고 있는 창 22장의 아브라함의 이삭 희생제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본문에서 특히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곳들에서 주의하여 번역해야 한다. 1절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이는 엘로힘이다. 1절로부터 10절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이는 엘로힘이다. 11절에서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정면에서 바로 야훼 이름이 등장한다(14절 여호와 이레). 본문은 종교사적으로 당시 어린이 희생제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곤 한다. 당시 이방신들 내에서 신들의 명령에 부모가 이를 순종한다는 내용들이지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시킨 것을 스스로 막으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발음과 사용에 있어서 오늘날 흔히 외래어를 그대로 수용해서 발음하는 것과 같이, 유대교에서도 사용하는 "아도나이" 라는 대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와 함께 이의 오용금지에 나타나는 신비로움의 감춤이 동시에 작용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어떤 절대자로서의 개념을 지니지 않고, 언제나 한 백성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이는 해방과 자유와 관계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누가 참 하나님(유일신앙)인가?
자유와 부자유의 차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성서 본문들이 밝히는 것은, 한 하나님, 유일신 문제에서 누가 참 하나님이고 거짓 하나님인가 하는 구분은 잘못이고, 바로 누가 자유의 하나님이고 그렇지 않은가의 구분이어야 한다.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에 대한 논의들은 종교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그것이 우선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는 자유와 억압의 문제하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이제 특별히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문제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인 유일신 신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본문인 시편 82편을 다루어 본다.
시편 82편:
1 하나님(엘로힘)이 신들(엘)의 모임 가운데 서서 재판하시니
2 언제까지 너희가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며 악인의 얼굴을 드러내려느냐(셀라)
3 굶주린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결을 내리며 가련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라
4 굶주린 자와 빈궁한 자를 악인들의 손(폭력)에서 구해내거라
5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어 어둠속에서 돌아다닌다.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린다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모두 가장 높은자(엘르욘)의 아들들이다
7 그러나 사람(아담)처럼 너희는 죽을 것이다. 군주(사림) 같이 너희는 쓰러질 것이다
8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엘로힘), 세상(땅)을 판결해 주십시요 모든 민족이 열방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본문의 전체 구조를 잠시 살펴보면, 첫 절에 하나의 신들의 모임이 나타나고, 엘로힘이 바로 그 신들(엘) 모임의 그 가운데 위치한다. 이 신들의 모임은 법정재판을 위한 것이다. 그 다음 여기 모인 신들에게 2절에서 4절까지는 약자들을 위한 바른 판결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장면이고, 5절은 그러나 이 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온 세상의 혼돈(카오스)의 상황이 되었고, 결국 6-7절에서 1인칭으로 나오는 "나"는 그들에게 불의를 행했기 때문에 사형판결을 내린다. 끝으로 다시 하나님 자신의 온 땅을 판결할 것에 대한 묘사로 맺는다.
본문에 대한 종교사적 연구들이 많이 있지만, 짧게나마 이를 제시한다면, 본문은 그 유형과 내용으로 하나의 예언자 시편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신들의 모임에 대한 구약성서의 다른 예문들이라면 우선 하늘의 신들의 모임의 표상을 지니고 있는 욥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종교사적 연구에 따르면 우가릿의 만신전(판테온)에서 엘은 신들 중에 최고의 신으로 나타나고, 이스라엘 이전 이미 가나안엔 엘 신이 절대 권력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매우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선 본문은 법정 재판과정의 요소들을 담고 있는데, 엘로힘(단수로서)은 엘 신들의 모임 그 가운데에 서서 저들에게 선과 악을 제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따른 사형판결을 내린다.
본문에 제시된 사람들은(달, 야톰, 아니, 에비욘) 사회 약자들로 이들은 구약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 보호대상자들로 언급되는 이들이다. 특히 이들은 악인들과 본문의 재판과정에 상대적으로 등장한다. 재판에 있어서 불의와 정의문제가 사회 직접당사자들을 다루고 있다. 신들의 의무는 바로 이들을 위한 정의를 행사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의를 행하면 신들은 살아 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고대 근동의 다신 세계에서 각 신들은 저마다의 기능과 임무들을 지녔다. 예를 들어 에집트의 파라오는 국가신으로, 또는 바알은 풍요를 관장하여 비를 내린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여주는 신들에 대한 그 척도(그가 신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는 바로 정의를 행사하느냐가 그 중심 잣대로 적용된다. 본문은 바로 다신교로부터 유일신교로 가는 그 과정을 보여준다.
시편 82편은 바로 구약신학의 근본 주제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한 하나님 - 여러 신들" 주제는 "정의"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정의는 신에 대한 그 척도가 된다. 종말론 주제와 관련하여 보면, 온 땅(세상)은 이제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상의 주제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와 관련된다.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 신앙은 바로 이 하나님이 정의를 행사할 수 있는가, 나아가 그가 정의를 행하고 있는가, 정의를 실현하기를 바라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다신 세계에서의 유일신 하나님 신앙의 척도인 정의, 그리고 그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대망, 그와 함께 이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신학의 주제들이다. 가난과 착취의 문제는 이스라엘 안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이는 전 세계의 문제이다.
2004-03-12 1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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