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강좌] 창조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갈릴리 성서아카데미 성서강좌)
  박경철 [ E-mail ]
  

갈릴리 성서 아카데미 제1기 성서강좌

제 3 주: 창조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창 1-3장; 9장; 사 65-66장)
강사: 신학박사 박경철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구약,신약)의 가장 처음이 창세기이다.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는 “베레쉬트”(처음에, 태초에)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창세기를 이 첫 단어인 “베레쉬트”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성경의 첫 번째 책으로써의 창세기는 성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이는 성서 전체에 대한 이해는 성서 첫 번째 책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성서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성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됐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현 정경으로 굳어진 한 권 성서로써의 의미에서 창세기가 가장 먼저 나온다는 점은 창세기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의 무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창세기는 우주와 인간 및 자연의 창조이야기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우주와 인간, 자연의 창조이야기는 물론 누군가 창조시(태초)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조국가를 이룬 뒤에 나온 그들의 신앙고백의 창조물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경험 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계약체결을 통해 독특한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주변 고대 근동국가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던 창조 신화들의 영향 가운데에서 야훼신앙의 바탕 가운데 그들만의 독특한 창조신앙을 이루어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신앙이다. 그리고 후대에 자신들의 오경이 하나의 경전으로 완성될 때(주전 450년경), 창세기를 가장 앞자리에 갖다 놓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신앙의 근본은 바로 창조신앙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는 현 정경으로서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이 말해주는 것처럼, 창세기의 창조신앙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가장 근본이 될 수 있겠는가를 살펴보자.

두 가지 창조 이야기

우선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창조신앙고백이라고 말하는 데에 있어서 전제 되어야 할 것이 있다. 이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오늘날 과학이 말하는 우주 생성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거나, 또는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신화적 세계관에서 나온 신앙고백을 현대인의 과학적 사고로 이해하려는 것은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현대인이 그토록 신봉하는 과학적 사고에 성서가 답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한낱 허구로 그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기대에 성서를 꿰어 맞추는 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고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창 1장과 2장에서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서로 다른 창조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서부터 두 번째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읽기: 창 1:1-2:3과 2장 4절 이하
위 두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비교해 보자.
1) 창조 이전의 모습:
2) 창조 순서:
3) 창조의 방법:
4) 창조자의 이름:
물음: 창조에 대한 두 이야기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두 본문을 통해서 창조 이야기의 중심은 무엇일까?

지난날 창조 이야기의 중심(강조)되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인간과 자연의 관계
창 1: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간의 땅 “정복”(카바쉬), “다스림”(부리다, 라다)은 무엇을 의미?
구약성서에서 이는 왕권(하나님의 대리자)의 조화로운 통치의 의미-보호자의 의무 수행(왕상 5:4; 시 72:8; 110:2; 겔 34:4)
모든 창조이야기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존해야 하는 대리자로서의 인간의 의무

2)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22-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 하나님의 형상?
* 돕는(에쩨르-도움/구원) 배필(케넥그도-네게드/ 동등한 파트너)?
* 갈비뼈(쩰라-심장을 감싸는)
* 뼈중의 뼈, 살 중의 살?(여럿 중의 하나?)
* 흙(아다마)으로 빚은 사람(아담)?

3)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안식의 의미
고대근동의 창조신화와 창세기의 창조신앙을 서로 비교해 봅시다.

참고: 고대근동의 창조신화
에뉴마엘리쉬(Enuma Elish, BC 1900-1700): 바벨론의 창조신화-세상창조의 과정을 신들의 싸움으로 묘사
바다의 여신인 티아맛(Tiamat)과 그녀의 남편 강물의 신인 압수(Apsu)는 고요를 방해하는 그들의 자녀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을 알아낸 현명한 신 이아(Ea)는 주문을 외워 압수를 죽인다. 티아맛은 새 남편인 킹구(Kingu)와 함께 전쟁에 나서는데, 이때 이아의 아들인 태풍의 신 마르둑(Marduk)이 나서서 티아맛을 죽인다. 마르둑은 바다의 신 티아맛의 시체를 둘로 갈라 하늘 위의 물과 땅 밑의 물로 갈라놓는다. 또한 마르둑은 해, 달, 별등을 만들어 시간과 계절을 구분하여 만든다. 끝으로 그는 티아맛의 새 남편인 킹구를 붙잡아 살해한 후, 그의 피를 진흙과 섞어 인간을 만든다. 그는 인간을 그의 신전에서 일을 하는 신들의 노예로 만든다. 신들은 마르둑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인간이 하게 함으로써 쉬게 되어 마르둑을 찬양한다.
아트라하시스(Atrahasis, BC 1700-1600), 고대 바벨론과 앗시리아의 창조서사시
신들은 두 가지 계급으로 나뉜다. 높은 계급의 신들은 놀고, 낮은 계급의 신들이 일을 하게 됨으로 이들이 불만을 갖고 반란을 일으키자, 높은 계급의 신들이 이 반란을 무마하고자 인간을 만들어 낮은 계급의 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인간들이 하게 한다. 이로써 신들이 휴식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새 창조

창세기는 하나님이 이루신(“보시기에 좋았다”) 창조세계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 낙원으로부터의 추방과 함께 인류 최초의 살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의 범죄는 곧 인간과 자연의 조화의 파기를 불러왔고, 인간에 의해 온 땅과 온 생명들이 악해졌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심판의 이야기(홍수)와 심판에서 구원 받은 노아를 통해 새로운 창조 세계의 계약을 맺으시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홍수 심판이후 다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이야기에서 나타난 창조신앙의 의미와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메시지를 통해 오늘 그리스도인의 창조신앙의 의미를 살펴보자.

1) 창 9장: 노아계약
홍수 심판이후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모습은 무엇인가?
피 흘림의 금지 조약-피는 생명-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영원한 계약-인간뿐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의 계약
2) 사 65:17-66:24: 하나님의 새 창조-새 하늘과 새 땅에 나타난 정의-평화사상

히브리어 ‘베리트’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계약’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베리트’라는 용어를 ‘계약’ 이라고 번역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이 개념이 마치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협약과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라는 이해를 구약성서 내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련으로 설명하는 것은 구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베리트’ 개념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베리트’는 쌍방간의 계약이 아니라 당사자의 ‘일방적인 의지표명’이라는 말이 적당하다. 이런 의미에서 ‘베리트’에 대한 적당한 번역으로 ‘계약’이라는 말 대신에, ‘의무’, ‘규정’이라는 말이 적당하다. 이는 자기 자신이 지우는 스스로의 의무라는 의미가 인간의 측면에선 ‘서약’(수 9,15; 시 89,4; 겔 16,8), ‘맹세’(시 105,8-11; 신 4,31; 7,12; 8,18), ‘법’등의 의미를 지니고, 하나님의 입장에선 하나의 ‘약속’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구약성서의 ‘베리트’는 야훼 스스로의 의무와 그 상대역으로서 인간의 의무는 서로 조건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야훼 스스로의 의무와 함께 인간의 의무가 병행되어 나오는 중요한 제사문헌의 두 본문이 창 15장; 17장(아브라함 계약)과 창 9장(노아계약)이다.
창 9,1-17의 이른바 노아계약은 9-17절의 야훼 자신의 스스로의 의무조항과 함께 4-6절에서는 인간의 의무조항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역시 쌍방간의 계약개념으로 ‘베리트’는 쓰이고 있지 않다. 창 9장에서 ‘베리트’는 오직 야훼에게만 쓰이고 있고, 창조행위가 야훼에게 전적으로 속한 것이라면, 영원한 언약(계약)의 표시로써의 ‘무지개’를 야훼가 손수 하늘에 두셨다는 것은 이 언약의 표시 역시 야훼에게 속한 것임을 보여준다. 야훼는 무지개를 보고 당신의 언약, 즉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언약(의무조항)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15.16절). 이것이 노아계약에 나타난 야훼 스스로의 의무이다.
히브리성서 안에 야훼의 ‘베리트’가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 없이 온 인류, 나아가 모든 생명체(콜 바사르, 11.15.16.17절)와 관련이 되어 나타나는 곳은 오직 이곳 밖에 없다. 현 정경의 최종형태의 모습 속에서 보면 노아계약에서 처음으로 ‘베리트’ 개념이 나오는 것인데, 이는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관련된 모든 계약의 개념들보다 선행되는 개념으로 쓰임으로써, 이 노아계약에 따라 그 이후 모든 계약들이 이루어 진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창 9장에 나오는 모든 생명체와 맺으신 하나님의 ‘베리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이것은 이사야서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노아계약 안에 나타난 ‘베리트’ 개념은 그 어디도 하나님 스스로의 의무와 인간이 지켜야할 계명들간 쌍방간의 계약개념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들(창 9,4-6)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이 스스로 지는 의무조항(9-17절),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언약이 파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행해야 할 계명들과 야훼의 의무행위 이 둘 모두 온 인류, 나아가 온 생명체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함께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이행해야 할 계명들이란 바로 야훼가 금지시킨 조항들로 생명체의 피를 땅에 붓지 말라는 것(4절)과 6절의 살인금지 행위이다(참고, 레 17,10이하). 야훼의 ‘베리트’, 그가 지켜야 할 것은 홍수로부터 온 생명체를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일이다. 한마디로 노아계약이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론 인간들이 지킬 계명들과 다른 한편으론 야훼가 이행해야할 의무조항이 모두 온 생명체를 보존할 것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주제와 이사야서와의 관련은 어떤가?
성서는 홍수심판의 이유가 ‘온 생명체’(콜 바사르)들의 ‘폭력’(하마스)과 동물들과 인간들 간의 불화에 있었다고 말한다(창 6,13). 심판 이전의 폭력을 금지하는 것, 노아계약을 통해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모든 죽임의 행위들의 금지(9,5)가 이제 온 생명체와 맺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평화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온 생명체’에 대한 폭력으로 인해 홍수 심판이 왔다면, 이제 그런 폭력을 근절하고 ‘온 생명체’를 보존함으로써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베리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의 규정이다(9,10-17).
노아계약에 나타난 창조세계 보존은 무언가 새로운 것임을 말한다(참고 창 1,28/9,1.7; 1,29-30/9,3-4). 홍수 이후 새로운 창조세계 보존은 이제 더 이상 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시작되고, 이 시작은 바로 야훼 계약의 시작임을 현 정경의 모습이 전하는 의미이다. 이 계약의 시작은 곧 이스라엘과 하나님간의 관계를 이어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임을 말하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의 주체는 오직 야훼에게 달려 있다. 야훼의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사의 모습은 언제나 노아계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스스로 지게 된 자신의 신실한 언약의 의무조항에 의해 죄지은 자기백성을 영원히 심판한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함으로써 그의 구원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근본 주제이며,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출 32-34장에 나타난 ‘죄와 용서’가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금송아지 사건’과 ‘새로운 돌판’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노아계약에서 인간들이 이행해야 하는 계명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 보존의 근본주제와 동일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 보존의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라고 보여준다. 비록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신 언약의 의무이행을 통해 그의 구원사를 계속 이어나가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 보존의 구원사역의 동역자임을 강조한다. 이 창조세계 보존의 동역은 바로 이 땅에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하는 폭력의 근절과 살인의 금지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은 온전히 하나님 혼자 일하시는 모습으로써의 두 번째 하늘과 두 번째 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에 있는 이 땅 위에서 피 흘림이 없는 인간의 행위가 반드시 관련되어야 하는 세계의 시작을 가리킨다. 그런데 노아계약에 나타난 이러한 평화의 새 세계 사상은 이사야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사야서 전체를 감싸 안고 있는 첫 부분과 끝부분인 사 2,2-5과 66,22-23에 나오는 종말론적 표상인 온 민족들 나아가 온 생명체(콜 바사르)의 순례를 그리고 있는 점이다. 사 2,2-4은 모든 민족들 간의 전쟁의 종식과 함께, 나아가 아예 모든 전쟁 무기들과 전쟁연습까지도 종식되는, 온 땅에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말한다. 이러한 세상이 실현되는 장소인 시온이 바로 온 민족들의 순례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민족순례의 전제는 바로 시온의 정의와 평화이다(참고, 사 1,26-27). 이런 모습은 야훼의 거룩한 산 위에 모든 동물들이 함께 평화를 이루고 살 것이라고 말하는 사 65,25과 그 평행본문인 사 11,6-9 과도 동일하다. 사 65,25의 평화사상은 사 65,17이하의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묶여 있다. 그리고 이 새 하늘 새 땅의 주제는 그 다음 장인 이사야서 가장 끝에서 민족들의 시온 순례와 함께 다시 나타난다(사 66,22). 한 마디로 말해서 ‘새 창조, 종말론적인 평화사상, 사회정의의 실현 그리고 민족 순례’의 주제들은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주제라는 것이다.
노아계약에서의 피 흘림의 금지 사상은 이사야서 곳곳에서 무고한자들의 억울한 피 흘림로 인한 불의의 문제와 함께 나타난다. 사 1,15이하의 “너희들의 손에 가득한 피”는 사회 하층민들에 대한 사회 불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전엔 공의와 정의가 넘쳐나던 시온이 이젠 창녀의 도시로, 그 안에 살인자들이 가득하다고 고발한다(21절).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시온을 공의와 정의로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27절). 사 59,3 역시 공의도 정의도 사라진 모습을 두고 ‘너희들의 손에 가득한 피’라고 고발한다. 시온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그의 피 흘림의 죄악이 씻어짐을 통해서 가능하다(사 4,4). 불의한 피 흘림이 그침으로써 비로소 평화가 찾아들 것이며, 피 묻은 옷이 불태워진 다음, 평화의 왕권이 공의와 정의의 실현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사 9,4-6). 야훼는 결코 억울한 피 흘림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야훼의 심판의 날에 땅이 그 속에 스며든 피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며 억울하게 살해당한 자들의 누명이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26,21). 정의는 결코 피흘림의 살인과 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 정의롭게 사는 자는 살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에 그렇다(사 33,15).
아울러 노아 홍수 이야기 안에 들어있는 ‘온 세상을 흔들어 뒤엎으신다’는 심판의 모티브는 온 땅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 24장에서 특히 ‘베리트’ 개념과 함께 나온다.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 60,8에는 무엇보다도 노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 8,8-11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 60,8 하반절에서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드는 모습을 비둘기가 창문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창 8,8-11 홍수가 멈추고 방주의 창문 안으로 다시 돌아온 비둘기 모습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이사야서 곳곳에 나오는 불의한 피 흘림에 대한 고발과 비난의 말씀이 노아계약에서의 피흘림 금지조항과 서로 연관이 있다는 점을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는 본문은 사 54,10이다. 이는 야훼의 ‘평화의 계약’(베리트 샬롬)은 노아와 맺은 언약을 새로이 회복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노아계약과 이사야서의 관련은 첫째, 종말론적인 평화사상이다. 노아계약에 나타난 야훼의 창조세계 보존 주제는 이사야서에서는 ‘사회정의, 종말론적 평화의 모습과 이에 따른 민족들의 순례’와 이어지는 “새 창조” 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노아계약 안에 있는 인간들의 의무조항인 피 흘림 금지 계명들은 이사야서 안에서 무고한 자들의 억울한 피 흘림에 대한 사회 불의의 고발과 비난으로 나타난다.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인 ‘콜 바사르’의 관련 또한 노아계약과 이사야서와의 관련을 설명해 준다. 창 9장 노아계약에서 야훼가 ‘온 생명체’(콜 바사르)와 그의 계약(베리트)을 맺었다면, 이사야서에서는 민족들의 시온 순례가 전체 이사야서 안에 매우 중요한 근본 주제로 나오는데, 이사야서 가장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민족들’ 대신에 ‘온 생명체’(콜 바사르)가 시온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쓰고 있다는 점이다.



나오면서

기독교 경전으로서 성서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보여주는 창조신앙은 단지 야훼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임만을 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과 쉬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 복판에서 일구어 낸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사이의 조화와 공존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자연)에 대한 파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온 생명들과의 새로운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세계의 보존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에 인간은 동역자로서의 의무를 지니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이루어 나가는 새로운 창조세계의 보존은, 폭력, 살인과 전쟁이 그치고 온 생명이 함께 정의롭게 공생하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라는 것이 성서의 창조신앙이다.
지난날 창조신앙은 자연을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오용되어왔다. 이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인간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신들을 위해 성서를 오용하고 거기에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앞세워 자연과 인간을 지배의 목적으로 사용하여왔다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물질문명은 곧 신의 축복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구의 환경위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함께 동반자로서 서로 돕는 짝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 후 이루어진 살인의 세계가 아닌가? 흙(아다마)으로부터 온 사람(아담)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우리의 땅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제 우리가 새로이 고백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그리스도인 실천적 신앙의 모습은 정의와 평화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루어 나가는 공생과 상생의 창조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04-03-12 17: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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