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논문] 박경철, "금식, 해야만 하는가? 무엇을?", 스네-창간호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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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구약학회 창립을 기념하며 첫 출발하는 한신구약학회 전문 학술지 [스네] 창간호(2007년 4월)에 실린 논문입니다. 히브리어 폰트(Bible Works)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면, 깨져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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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해야만 하는가, 무엇을?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금식제의논쟁’의 문제에 대해서-

박경철(한신대 교수, 구약학)


1. 들어가면서

사순절 기간이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교회마다 사순절 특별 프로그램들이 등장한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가 그렇고, 성 금요일 만큼은 하루, 아니 한 끼라도 금식하는 일이 대표적 행사다. 중대한 일이 있을 땐 예수의 40일 금식을 따라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기독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단순한 다이어트가 아니라, 하나의 제의(종교)행위다. 그래서 ‘금식기도’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상징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으로 체험하는 행위다. 금식기간에 따라 고난의 의미를 담는 강도가 다를 것이다. 본인에게도 그렇고 그를 지켜보는 이에게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일에 기독인라면 누구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는 이들이 금식을 시작했다. 사회적 이슈들이 다급할수록 많은 이들이 금식을 해왔다.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개발현장에 반대하는 이들이 금식하였고, 군사독재에 온 몸으로 막아설 때도 금식을 했었고, 노동현장에서, 민주화 투쟁의 길목마다 힘없는 이들이 모든 권력과 폭력에 맞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금식이었다.

그런데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다만 금식하는 이들을 향해 “그것이 무슨 금식이냐?”고 비난하는 예언자가 있어서 그렇다. 또 “금식을 계속 해야 하는가?”고 묻는 이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위해 금식했느냐?”고 다그치는 예언자가 있어서 그렇다. 앞은 “금식을 그치라”는 말이고, 뒤는 “금식을 왜 했는가”하는 말이다. 앞은 이사야고, 뒤는 스가랴다. 무엇이 진정한 금식이며, 무엇 때문에 금식해야 했었는지를 강변하는 두 예언자를 통해서 성서가 말하는 금식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려는 것이다. 금식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 모두를 찾아서 ‘금식’에 대한 성서의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1) 위의 두 예언자(서)를 통해 제기되었던 ‘금식논쟁’에 들어있는 당시의 상황을 밝혀서, 위에서 물었던 질문에 혹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2. 무엇 때문에 금식했는가?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용서를 구할 때, 금식 하는 일이 잦았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금식에 대한 첫 보도는 삿 20장이다. 사사시대 기브아에서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를 대항해 전쟁을 치른 후, 미스바에 모여 야훼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금식을 했다(참고 삼상 7:6). 나라/민족의 큰 슬픔을 당했을 때에도 금식을 했고(참고, 더 4:1-3), 특히 신분이 높은 이를 장사지낸 후 온 백성들이 금식을 하곤 했다. 사울과 요나단을 장사 지낸 후가 그랬다(삼상 31:13; 삼하 1:12). 때론 왕이 전국에 금식을 선포하기도 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기 위해 거짓 반역죄를 씌워서 금식을 선포한 일도 있었다(왕상 21:12). 심지어 이방 니느웨의 왕은 전국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방도로 금식을 선포하기도 했다(욘 3:5-7). 특정일을 금식일로 정하기도 했다(렘 36:6; 욜 1:14; 2:15). 무엇보다도 공식적이고 정기적으로 온 백성들이 지키는 ‘금식제의’는 587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루살렘성전 파괴를 기념하여 정해진 것으로 학계는 본다.2) 이에 대한 ‘금식제의논쟁’을 보여주는 성서가 바로 스가랴서이다.

슥 7:1-13에는 제5월에3) 행해지는 ‘금식제의’4)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그 뒤를 이어 4-14절에서는 이른바 스가랴의 ‘금식설교’5)라 불리는 예언자 스가랴가 질문에 대답6)하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5월에 행해지는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를 기념하는 탄식과 금식제의를 계속 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3절 하반절에 나오는 이 ‘금식제의’에 관한 물음은 이렇다: 지난 여러 해 동안(~ynv V.3b)7) 진행되어 온 ‘금식제의’를 1절에 언급된 연대표기8)에 따르면,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있는9) 마당에도 계속 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곧 지난 세기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기념하여 ‘금식제의’를 행해왔다면, 이제 다시 성전을 세우는 시대가 왔으니, 이전의 ‘금식제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입장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금식제의’ 문제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재건으로 보는 이들의 질문에 대해 스가랴의 대답은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스가랴는 지난날의 ‘금식제의’가 시작된 근본원인을 성전 파괴의 결과로 보지 않고, 성전 파괴의 원인으로 본다. 성전 파괴가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에 있기 때문에, 성전이 다시 세워진다고 해도, 성전 파괴 이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스가랴는 ‘금식제의’의 유효성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유효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논쟁적인 문체(참고, 말라기10))로 되어진 4절 이하의 스가랴의 입을 통한 야훼의 말씀은, 땅의 온 백성들(#rah ~[‐lk 학 2:4)과 제사장이 행하는 금식과 탄식이 실제 야훼가 받을 수 있는 것인가를 문제 삼는다(V.5bβ yna yntmc ~wch “너희가 나를 위해 금식했는가?”). 대답의 형식을 취한 예언자의 지난날의 ‘금식제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금식’이 야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음에 있음을 지적한다. 백성들의 마시지 않고 먹지 않는 금식과 마시고 먹는 것이 백성들 자신들을 위해 즐기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V.6). 특별히 스가랴의 ‘금식제의비판’은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의 ‘제의비판’의 성격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의 ‘제의비판’은 근본적으로 제의 자체를 금하는 것에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제의행위의 외형적 겉치레에 있다(참고, 암 4:4f.; 호 8:13; 사 1:10-17; 렘 7:21; 시 50:13)11). 그렇기 때문에 스가랴는 ‘금식제의’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이전 예언자”(~ynvarh ~yaybNh V.7.12)들을 거론하여, (금식)제의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곧 9절 이하에서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이 요구했던(렘 7:5f.; 암 5:24; 사 1:17) 사회 약자들(과부, 고아, 나그네와 가난한 자 “ yn[w rg ~wtyw hnmla)12)을 위하여 사회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11-14절에서 포로로 잡혀가게 된 파국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지난 역사에 대한 기억은 9절에 나오는 사회정의 실천 요구와 관련을 맺고 있다. 지난 역사에 대한 스가랴의 이 기억은 그의 시대 청중들을 위한 교훈임과 동시에 성전 파괴와 멸망의 원인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포로기 이전 요구됐던 사회정의 실천 요구는 포로기 이후 시대에도 여전이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가랴에게 있어서 ‘금식제의’는 성전의 파괴가 그 원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왜 ‘금식제의’가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금식제의’가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성전파괴의 원인에 대한 지난 역사를 거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만을 거론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시대, 곧 성전이 재건되고 있던 그 시대에도 ‘금식제의’가 유효한지에 대한 물음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약자들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라는 말만 강조한다. 스가랴에게 있어서 ‘금식제의’는 곧 ‘사회정의실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제의논쟁’을 다루는 7장의 뒤를 이어 8장에서는 구원의 시대(때)에 사회정의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서의 현 최종형태 본문은 7장과 8장이 “야훼의 말씀이 ... 임했다”라는 표현(Wortereignisformel, 7:1b. 4. 7. 8. 9a; 8:1. 2aa. 18. 19aa)과 ‘예언신탁형식’(Botenspruchformel, 8:3aa. 4aa. 6aa. 7aa. 9aa. 14aa. 20aa. 23aa)13))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교차대구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A 7:1-6         금식물음과 금식비판

        B 7:8-10              사회정의 실천 요구

                C 7:11-14             조상들에 대한 야훼의 심판

                   8:1-13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선포

                C' 8:14                 조상들에 대한 야훼의 심판과 구원선포

        B' 8:16-17             사회정의 실천 요구

A' 8:18-19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금식제의의 의미 변경


아울러 슥 7장과 8장은 스가랴서 처음인 1장과 2장을 그 앞, 뒤를 둘러싸는 구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슥 7:11-14과 8:14에 언급된 이전 역사에 대한 예언자의 기억은 스가랴서 가장 처음인 1:2-6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슥 1장과 7장은 연대표기(1:1.7; 7:1)14)에 있어서 서로 연결된다. 슥 7장 절에 있는 “70년”(참고, 렘 25:11; 29:10; 대하 36:21; 단 9:2f.)15)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탄식하는 햇수로서 스가랴서 첫 부분인 1:12b에 나온다. 1:13f. 에 나오는 예루살렘/시온에 대한 구원선포는 스가랴 8장 서두에 나오는 것이다.16) 이는 스가랴서가 1-8장까지가 그 처음과 끝의 연결을 통해 하나로 묶여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14b           hlwdg hanq !wyclw ~lvwryl ytanq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8:2             hl ytanq hlwdg hmxw hlwdg hanq !wycl ytanq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1:16            hb hnby ytyb ~ymxrb ~lvwryl ytbv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8:3             ~lvwry $wtb ytnkvw !wyc‐la ytbv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나아가 시온/예루살렘으로의 ‘열방순례’에 대한 주제 역시, 슥 1-8장의 첫 부분 1-2장의 마지막인 2:15에 나왔다면, 역시 끝부분 7-8장의 마지막인 8:20-23에 나온다. 이상은 사회정실천 요구가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무적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시대에 맞추어 그 시대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슥 1:12-17과 슥 8:1-15에 나오는 예루살렘/시온을 위한 심판과 구원은 온전히 야훼께 속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재판과정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의무를 지닌다(8:16-17, 참고 7:9; 사 59:3f.) 인간의 의무조항은 구원을 위한 조건17)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15절에 예루살렘/시온을 위해 선포된 하나님의 구원은 16절 이하에서 인간의 의무가 조건화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선포와 구원행위는 오직 그의 주관, 그의 질투심(hanq)18) (8,2f. 참고, V.14b)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무는 오직 구원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정의실천’ 요구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진리의 도성” (tmah‐ry[) 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표시로써, 그 증거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곧 야훼가 예루살렘/시온으로 돌아와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8:3a ~lvwry $wtb ytnkvw !wyc‐la ytbv)19). 야훼는 스스로 구원의 때에 “진리와 정의”(hqdcbw tmab)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시온에 거하시겠다고 한다(8:8). 야훼는 스스로 진리 안에(tmab) 머무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은 서로 서로 진실(tma)을 말해야 한다(8:16).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한 평화의 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평화가 없었으나”(~wlv‐!ya 8:10bα), 이제 구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평화의 씨앗”(~wlvh [rz 8:12aa)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문법정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kyr[vb wjpv ~wlv 8:16). 금식제의는 기쁨의 날들이 되고, 이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실과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wbha ~wlvhw tmahw 8:19b). 그렇게 될 때에 4,5,7 그리고 10월에 행해지고 있는 ‘금식제의’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될 것이다. 결국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이스라엘은 정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20) 이는 이미 13절에 분명하게 제시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지는 저주 또는 축복의 발생은 오직 전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인 야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슥 7장 이하와 사 58장의 관련과 덧붙여 슥 8장은, 이사야서 전체 구성을 위한 중요 주제가 등장한다. V.3bβ에 있는 “거룩한 산” (vdqh rh)은 이사야서 안에서 종말론적 보도 본문(11:9; 27:13; 30:29; 56:7; 57:13; 65:11.25; 66:20)안에 나온다. V.4f.에 나오는 시온에 대한 미래의 상(像)은 이사야 결론 단락의 첫 부분인 ‘새 창조’ 주제를 다루고 있는 65:17-20과 관련된다. 그뿐 아니라 V.20-23안에 나오는 시온순례의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 구성의 중요주제인 것이다(사 2; 56:7f.; 66:18ff. 특히 V. 23).


2. 무엇이 금식인가?


구약성서에서 ‘금식제의’에 대한 상(像)을 가장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입장/모습(像)을 보여주는 본문이 사 58장이다. 사 58장이 말하는 금식은 ‘스스로의 고행’(V.5)으로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지 못해 배고파 고행을 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을 배부르게 하라는 것이다(V.7). 한 마디로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이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가 기뻐하는 금식이다.

슥 7장에서는 백성들이 ‘금식제의’를 계속 할 이유가 있느냐를 질문했다면, 사 58장은 왜 야훼는 우리의 ‘금식제의’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가 하는 탄원이다(V.3). 사 58장은 예언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고발하라는 신탁으로 시작한다(V.1). 그들의 죄로 제시된 것은, 뜻밖에도 그들이 날마다 야훼를 찾고, 야훼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겨하며 무엇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인지를 묻기도 하는 그들의 종교적 행위에 있다(V.2). 이러한 그들의 종교적 모습은 3절에서 ‘금식제의’와 관련을 맺는다. 얼핏 보면 그들의 종교적 행위가 범죄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3절 하반절에서 백성들이 한편으론 금식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향락을 즐기며,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언자의 제의비판은 바로 그들의 위선적 제의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제의행위와 사회적 불의한 처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고발인 것이다. 이사야서는 가장 처음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고 있는 제의행위에 대하여 철저하게 금지를 명한다(1:11-14). 그러나 이는 제의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손에 피를 묻히고 야훼께 나와 기도를 드리는 그들의 위선적인 이중적 삶의 모습이 원인이다(1:15). 진정한 제의는 사회 약자들을 돕고 이들에게 정의를 행사하는 것이다(1:17).

사 58장은 교차대구의 구성으로 그 중심에 진정한 금식제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A  야곱의 집에 대한 고발(V.1b)

  B  백성들이 자신들이 즐겨(#px) 야훼를 찾음(V.2)

    C  자신의 몸(vpn), 고행(hn[)의 금식(V.3a)

      D  금식하며 불의한 폭력행사(V.4a)

        E  이것이 금식인가?(V.5a)

          F  이것이 야훼가 즐겨하는(#px) 금식?(V.5b)

        E'  이것이 금식이 아닌가?(V.6aα)

      D‘  불의한 폭력 금지(V.6aβ)

    C'  자신의 몸(vpn)을 가난한 자(hn[)의 몸(vpn)을 먹임(V.10a)

  B'  안식일에 자신들의 즐거움(#px) 금지(V.13)

A' 야곱의 후손에 구원선포(V.14)



사 58장의 ‘금식제의비판’ 역시, 스가랴의 지적처럼 금식이 야훼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스가랴와 이사야 모두 ‘금식제의비판’에 동일한 문체를 사용한다. 슥 7장의 ‘금식제의비판’에 들어있는 반문형 문장을 보면, 5절 하반절에 의문형 접두사 h 를 쓰고, 6절 하반절과 7절 서두에 의문사 awlh 를 쓰고 있는데, 사 58장에서 ‘금식제의비판’과 함께 자비와 사회윤리적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5절에서 의문형 접두사 h 를 3번 쓰고 있고, 6절과 7절 서두에는 의문사 awlh 를 쓰고 있다.

‘금식제의’를 계속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는 슥 7:3b는 성전이 파괴된 이래로 행해진 ‘금식제의’가 성전이 재건되고 있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에 대한 문제에 있었다면, 사 58:3a는 금식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탄식에 있고, 이는 성전재건이 이미 세워진 그 이후와 관련되는 것이다.21) ‘금식제의’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은 같지만, 사 58은 계속 진행하고 있는 ‘금식제의’에 대한 야훼의 무관심에 대한 탄식에 있다. 이는 포로기 이후 초기의 상황, 곧 성전이 재건되고 있던 때를 말하고 있는 슥 7-8장을 통해서 ‘금식제의’는 계속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가 그들의 ‘금식제의’에 무관심한 문제가 백성들 사이에서 생기게 된 스가랴 시대 그 이후를 암시한다. 이는 이미 사 56장을 통해 이미 성전이 세워진 그 이후임이 보도되기에 그렇다(56:7).

실상 슥 7:3b(rznhhkbah) 와 사 58:3a(wnvpn wnyn[wnmc hml)에서는 금식에 대한 탄식과 질문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 아울러 슥 7장 이하와 사 58장은 모두 사회 정의 실천에 대한 요구가 진정한 금식의 의미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서로의 가장 큰 차이는 슥 7장 이하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사 58장 전체를 ‘안식일’과 관련하여 고려하지 않음으로 사 58장 전체의 의미를 잃어 버렸다는 점이다.22) 그렇기 때문에 사 58장에서 금식에 대한 비판과 사회 정의 실천에 대한 요구의 문제는 사 58장 13절 이하의 ‘안식일 준수’ 주제와 함께 다루어 져야 한다. 스가랴의 시대와 서로 다른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포로기 이후 초기 스가랴 시대에는 안식일에 대한 문제가 사회정의의 문제와는 아직 관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사 58장은 포로기 이후 초기인 스가랴 시대 그 이후에 생겨난 또 다른 상황이라는 점이다. 요약하면, 스가랴 7-8장을 통해 ‘금식제의’의 문제는 성전의 파괴 및 재건과는 관련이 없다. 사회정의 실천 여부에 달린 것이다. 결국 스가랴에게 있어서 ‘금식제의’의 유효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그로부터 이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사회정의를 외면한 ‘금식제의’는 이사야 58장에 와서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안식일’ 주제가 사회정의 문제로 부각된 시점이며, 이를 발 보여주는 본문이 곧 느헤미야서이다. 사 58장에서 사회정의의 요구와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는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본문이 느헤미야서가 되는 셈이다.

사 56장에서는 안식일이 ‘더럽혀지는 것으로부터’ 이를 지키라고 말한다(V.2.6). 안식일과 함께 연결되어 나오는 이런 모습은 구약성서 전체에서 오직 사 56장에만 나온다. 그리고 이는 구원의 조건으로 나온다.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안식일이 더럽혀지는 것으로부터 이를 지키라는 것은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더럽히는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이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또한 왜 구원의 조건으로 말해지는 것일까? 여기서 안식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사회적 정황을 보여주는 본문이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의 정황을 보여주는 느헤미야 본문이다.

느헤미야서에는 안식일이 더럽혀지고 있다는 표현과 함께 그 사회적 정황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느 13:15-22은 이상의 질문인 “누가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는가?”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안식일(15a,19a,21b절)에 유다 안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하려고 술틀을 밟고 물건들을 싣고 나르며(참고, 렘 17:21ff)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난의 내용이다. 느혜미야서에는 안식일과 성전제의의 관련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느헤미야가 안식일에 일을 한 당사자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일도 하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았던 당시 유대의 고위 관리들인 사회상층부들을 향해 그들이 안식일을 더럽힌 당사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점이다(17,18b절). 느헤미야가 이들을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비록 이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 감독해야할 종교지도자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 책임을 추궁하는 것인가? 혹은 오히려 이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인가? 느헤미야의 사회 상층부에 대한 비난의 말은 상층부인들의 사회적 불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가? 이들이 안식일에 일을 허용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난한 자들이 하루라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이것은 단지 안식일에 일을 한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짜여진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랬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이 상층부를 비난 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추측은 실상 느헤미야 5장에 나타난 당시 유다의 상황을 보여주는 본문을 통해서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23)

느 5:1-5은 당시 유다의 열악했던 경제적 상황,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의 절대적 빈곤과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전 유대 공동체 문제로 확산된 것이었음을 자세히 보여준다.24) 가난한 자들의 절대적 빈곤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빚을 갚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게 늘어만 가던 이자25)의 문제였고, 이 엄청난 이자의 빚을 갚지 못해 자식은 노예로 팔려갔으며26), 또한 페르시아 왕에게 받치는 세금27)등의 부담이 근본적인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었다. 느 5장은 이상의 사회적 문제의 책임이 느 13장에서 안식일을 더럽힌 당사자들로 거론된 당시 사회 상층부 관리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5:7). 이 관련을 통해볼 때, 느 5장에서 총독인 느헤미야에게 달려가 오늘날의 말로 하면, 민중생존권쟁탈을 외치던 이들은 느 13장에 나오는 안식일에도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과 동일시되어진다. 결국 안식일이 더럽혀지는 것의 문제는 단순히 안식일에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당시 불의한 사회적 문제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더럽힌 책임이 안식일에 일을 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경제적 부를 챙기는 사회 기득권 세력들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느 13장에서 느헤미야의 사회개혁은 곧 이 사회 상층부들에 의해 저질러진 불의한 것들을 없애는 것으로 이루어진다(성전정화: V.4-14; 안식일을 거룩하게 함: V.15-22; 잡혼금지: V.23-31).

포로기 이후 사회적 불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 58장을 통해 당시 사회 상층부 기득권 세력들이 안식일에도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일을 강제로 시켰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 58:3b는 바로 이런 문제를 비난하는 것이고, 그래서 13절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일꾼들을 주먹으로 치며 일을 시키기를 ‘즐기지’(#px)말고, 안식일을 거룩한 날이라 부르기를 ‘즐기라’(#px)고 요구함으로써 안식일 준수란 곧 사회적 불의의 금지의 요구와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사 58장은 제의(금식)와 사회정의의 문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본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의 문제가 단지 제의적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실천하라는 의미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사 58장은, ‘금식’이란, 진정한 ‘금식’이란, 야훼가 기뻐 받을 ‘금식’이란 사회 약자들을 돌보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4. 나가면서

처음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해보자.

금식,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형식적 종교제의가 된다면 할 필요 없다.

사회정의를 외면한 그 어떤 종교적 행위는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이사야의 지적이며 외침이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금식,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그렇다. 야훼가 기뻐 받으실 진정한 금식을 해야 한다. 내 배를 굶주려 나의 종교적 만족을 즐기는(#px)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없이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다. 금식은 굶는게 아니라, 먹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을 그쳐서는 안 된다!



1) 이에 대해서는 T. Podella, Sôm-Fasten. Kollektive Trauer um den verborgenen Gott im Alten Testament, AOAT 224, Neukirchen-Vluyn 1989, 13f. 주 36; H.-J. Hermisson, Sprache und Ritusim Altisraelitischen Kult. Zur Spiritualisierung der Kultbegriffe im Alten Testament, WMANT 19, Neukirchen-Vluyn 1965, 76‐84 등을 참고하라.


2) Podella, Sôm‐Fasten, 13. 아울러 E. Janssen, Juda in der Exilszeit. Ein Beitrag zur Frage der Entstehung des Judentums, FRLANT 69, Göttingen 1956, 94‐104을 참고하라.


3) 이는 587/6년 5월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다(참고, 렘 52:12ff. = 왕하 25:8ff.; 대하 36:17ff. = 렘 39:8‐10).


4) 엘리거에 의하면 슥 8:18f. 역시 금식에 관한 질문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K. Elliger, Das Buch der zwölf kleinen Propheten II: Die Propheten Nahum, Habakuk, Zephanja, Haggai, Sacharja, Maleachi, ATD 25, Göttingen 81982, 135f.. 그와 반대로 레벤트로브는 이는 전혀 다른 금식과 관련된 질문의 문제라고 본다. H.G. Reventlow, Die Propheten Haggai, Sacharja und Maleachi, ATD 25/2, Göttingen 91993, 75. 그러나 포델라는 스가랴의 답변에 나오는 금식기간의 문제에 대해서 4월(Tammuz) 금식은 렘 39:2; 왕하 25:3f와 렘 52:6f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뚫린 달을 위미하고, 7월(Tischri) 금식은 그달랴 살해(렘 41:1f.; 왕하 25:25), 그리고 10월(Tebet) 금식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점령이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Podella, Sôm‐Fasten, 210.


5) 본문에 대해서는 Elliger, ATD 25, 132‐144; K. Rudolph, Haggai, Sacharja 1-8, Sacharja 9-14, Maleachi, KAT 13/4, Gütersloh 1976, 135‐154; Rex A. Mason, "Some echoes of the preaching in the Second Temple. Tradition elements in Zechariah 1-8", in: ZAW 96, 1984, 221-235, 특히 229‐233; Reventlow, ATD 25/2, 73ff. 등을 참고하라.


6) V.5a 는 7월의 금식에 대한 것이다.


7) V.5은 70년 (참고, 1:12).


8) V.1의 연대표기는 518년 12월 7일이며, 성전재건이 시작(520년)되고 2년이 지난 뒤인 518년과 성전재건공사가 끝난 515년 사이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Rudolph, KAT 13/4, 136. Reventlow, ATD 25/2, 75; Podella, Sôm‐Fasten, 209, 주 8을 참고하라.


9) 레벤트로브는 성전재건공사가 이미 눈에 보이게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Reventlow, ATD 25/2, 75.


10) 참고, E. Pfeiffer, "Die Disputationsworte im Buche Maleachi. Beitrag zur formgeschichtlichen Struktur", in: EvTh 19, 1959, 546-568.


11) 거론된 성서 본문들에 대해서 Reventlow, ATD 25/2, 76를 참고하라.


12) 사회정의 실천에 대한 요구는 가장 오래된 계약법전 안에(출 20:20ff) 들어 있는 사회법과 관련을 맺는다. 참고 O.H. Steck, Israel und das gewaltsame Geschick der Propheten. Untersuchungen zur Überlieferung des deuteronomistischen Geschichtsbildes im Alten Testament, Spätjudentum und Urchristentum, WMANT 23, Neukirchen-Vluyn 1967, 144.


13) Podella, Sôm‐Fasten, 208, 주 2.


14) 스가랴서에 3번 나오는 예언신탁구안에 있는 연대표기에 관련해 주목해보면, 그 표기의 순서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슥 7:1에서는 1:1과 1:7과 다르다. 1:1과 1:7의 연대표기의 순서는 일(日, 1:1에는 빠짐), 월(月) 그리고 년(年)의 순으로 되어있고, 그 뒤에 예언신탁구가 뒤따른다(“야훼의 말씀이 ...에게 임하니라). 반면에 7:1에는 년(年)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신탁구가 뒤따른 뒤, 그 다음에 일(日)과 월(月)의 순서이다. 또한 7:1에는 예언자의 족보가 빠져 있다. 무엇보다도 스가랴의 연대표기는 학개와 다르다. 스가랴 1:7과 7:1에는 월(月)에 대한 바벨론식 설명이 추가되고 있다. 슥 1:7은 슥 1:1과 연대표기의 순서와 예언자 족보의 형식이 같아 서로 연결되고, 슥 1:7은 바벨론식의 월표시 설명를 하고 있는 7:1과 서로 연결된다. 이는 연대표기를 통해서 스가랴서 1장과 7장 이하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장은 7장과 금식과 사회정의 주제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제1스가랴’로 불리는 1-8장은 하나의 단락으로 볼 수 있다.


15) 레벤트로브는 이를 “하나의 상징적 숫자”로 본다. Reventlow, ATD 25/2, 42, 참고,  E. Lipinski, "Rechches sur le livre de Zacharie", in: VT 20, 1970, 25‐55, 38.


16) anq 는 스가랴서 전체에서 오직 이곳 1:4과 8:1에만 나온다.


17) 이에 대해서는 C. Westermann, Prophetische Heilsworte im Alten Testament, FRLANT 145, Göttingen 1987, 182를 참고하라.


18) 명사 hanq 는 구약성서에서 43번 나온다. 오경에 7번(민 5:14[2x].30; 25:11[3x]; 신 29:19) 나오는 반면, 이사야서에 빈번히 나온다(7번: 9:6; 11:13*; 26:11; 37:32; 42:13; 59:17; 63:15, 참고로 에스겔서에는 10번 나옴). 하나님의 hanq 는 이사야서에서 구원과 심판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모든 예언신탁( 사 11:13 제외)에서 anq 의 주어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E. Reuter, anq in: ThWAT VII, 1993, 51-62, 53를 참고하라.


19) 야훼가 거주하신다는 표상에 대해서는 B. Janowski, Sühne als Heilsgeschehen. Studien zur Sühnetheologie der Priesterschrift u. zur Wurzel KPR im Alten Orient u. im Alten Testament, WMANT 55, Neukirchen-Vluyn 1982, 296ff. 를 참고하라.


20) Podella, Sôm‐Fasten, 213.


21) 쇼트로프는 사 58:1-12의 생성연대를 특히 12절의 “오래 황폐된 곳을 세우리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포로에서 돌아오기 시작했던 시점과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했던 그 사이로 본다. W. Schottroff,  “Unrechtmäßige Fesseln auftun, Jochstricke lösen Jesaja 58,1-12, Ein Textbeispiel zum Thema ‘Bibel und Ökonomie’”, in: BI 5, 1997, 263-278, 268f., 그러나 문제는 12절의 표현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에스라-느헤미야 시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의미하는 지는 불분명하다(참고, Podella, Sôm‐Fasten, 222 주 54; W. Lau, Schriftgelehrte Prophetie in Jes 56-66. Eine Untersuchung zu den literarischen Bezügen in den letzten elf Kapiteln des Jesajabuches, BZAW 225, Berlin u.a. 1994, 256; S.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Jes 56-66) redaktionsgeschichtlich untersucht, BZAW 175, 1989, 127f.. 쇼트로프는 사 58장에서 ‘안식일 주제’를 다루고 있는 V.13-14을 전체 58장과 함께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엇 때문에 ‘금식’과 ‘사회정의’ 그리고 ‘안식일’ 주제가 사 58장 전체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 침묵한다. 이는 ‘안식일’ 주제는 없고, 다만 ‘금식’과 ‘사회정의’의 문제가 동일하게 나오는 포로기 이후 초기 시대인 슥 7장과 제대로 비교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 58장은 ‘안식일 주제’가 ‘사회정의 문제’와 연결되고 있는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와 비교하지 못한 것이다.


22) 사 58장 최종형태 본문은 V.12와 V.13이 중요한 핵심단어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쾨넨은 V.12 끝에 bwv. tbvl 가 나오고 V.13 처음에 tbvm 언급되는 것은 하나의 ‘언어유희’(Wortspiel)라고 본다. K.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im Tritojesajabuch, WMANT 62, 1990, 89. 특히 두 절에는 새로운 작명을 말하는 것(arq)이 들어있다.


23) 페르시아 시기 유다에서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특히 W. Schottroff, "Zur Sozialgeschichte Israels in der Perserzeit", in: VF 27, 1982, 46-68, 특히 59ff.; F. Crüsemann, "Israel in der Perserzeit. Eine Skizze in Auseinandersetzung mit Max Weber", in: W. Schluchter (Hg.), Max Webers Sicht des antiken Christentums. Interpretation und Kritik, stw 548, Frankfurt/M. 1985, 205-232"; H. Kreißig, Die sozialökonomische Situation in Juda zur Achämenidenzeit, SGKAO 7, Berlin 1973; H.G. Kippenberg, Religion und Klassenbildung im antiken Judäa. Eine religionssoziologische Studie zum Verhltnis von Tradition und gesellschaftlicher Entwicklung, StUNT 14, Göttingen 1978; M.A. Dandamayev, Persien unter den ersten Achämeniden  (6. Jahrhundert v. Chr.), Beiträge zur Iranistik 8, Wiesbaden 1976; 페르시아 시기에 관한 더 많은 참고문헌을 보려거든  G. Widengren, "The Persian Period", in: J.H.Hayes/J.M.Miller (Hg.), Israelite and Judaean History, London 1977, 489-53등을 참고하라.


24) 이에 대해서는 Kippenberg, Religion und Klassenbildung, 55ff.와 W. Schottroff, "Arbeit und sozialer Konflikt im nachexilischen Juda", in: Luise und Willy Schottroff (Hg.), Mitarbeiter der Schöpfung, München 1983, 104-148를 참고하라.


25)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자금지법과 그것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J. Hejcl, Das alttestamentliche Zinsverbot. Im Lichte der ethnologischen Jurisprudenz sowie des altorientalischen Zinswesens, Biblische Studien 12,4, Freiburg 1907;  S. Stein, "The Lawson Interest in the Old Testament", in: JThS 4, 1953, 161-170; E. Neufeld, "The Prohibitionsagainst Loans at Interest in Ancient Hebrew Laws", in: HUCA 26, 1955, 355-412; H. Gamoran, "The Biblical LawAgainst Loans on Interest", in: JNES 30, 1971, 127-134; E. Klingenberg, Das israelische Zinsverbot in Torah, Misnah und Talmud, Wiesbaden 1977등을 참고하라.


26) 이스라엘의 채무법에 관해서는 F. Horst, "Das Privilegrecht Jahwes", in: 같은 이, Gottes Recht. Gesammelte Studien zum Recht im Alten Testament, ThB 12, München 1961, 17-154, 특히 82-102; Z.W. Falk, "Zum jüdischen Bürgerschaftsrecht", in: RIDA 10, 1963, 43-54, 특히 43-45등을 참고하라.


27)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M.A. Dandamayev, “Politische und wirtschaftliche Geschichte”, in: G. Walser (Hg.), Beiträge zur Achmenidengeschichte, Historia. Einzelschriften 18, Wiesbaden 1972, 15-58, 특히 43-45를 참고하라.


2007-03-22 21: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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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민 햐- 언제 또 이런 글을 쓰셨어요~ 원더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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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생 역시 교수님은 먹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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