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번역논문] 롤프 렌토르프, 사 6장 연구, 구약논단 2007년 가을호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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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구성의 틀에서 본 이사야서 6장 연구 Rolf Rendtorff, in: Kanon un

롤프 렌토르프, 이사야서 구성의 틀에서 본 이사야서 6장 연구

Rolf Rendtorff, “Jesaja 6 im Rahmen der Komposition des Jesajabuches”,

in: Kanon und Theologie, Neukirchen-Vluyn 1991, 162-171.

번역: 박경철(한신대)



I


이사야서 주석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는 지난 십 년간 진행되어 온 구약성서주석의 일반적 동향의 일면이기도 하다. 구약성서 주석 전반에 걸쳐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이사야서 연구에 있어서도 역시 해당된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구약성서 비평작업들이 포기되지 않는 것 처럼, 다양한 방법론의 대두와 함께, 여러 구약학자들에 의해 보다 더 진척된 방법론적 결과들의 자리들 내에 이사야서 연구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주석 방법론들의 발전과 또한 진척된 차이들과 함께 이제 다양한 새로운 방법론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1). 이들 중 대부분은 비록 하나의 실험적 연구들이긴 하지만,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거의 백년 이상 적용되어 왔던 방법론들을 첫 술에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그 어떤 완결된 대안적 모델로 대체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 발전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기론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본다. 이는 그 둘이 서로 상이해서 경우에 따라선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이를 적용시킬 한 방법론에 그 어떤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는 지금까지 있어온 방법론들을 고수하려는 경우이고, 또 다른 경우는 새로운 방법론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문제들은 제임스 바(James Barr)와 챠일즈(B.S. Childs)의 논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의 신앙 논쟁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2).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이들의 공통의 관심들을 위해 유익하지 못한 것이 생긴다면, 이는 스스로 만든 결과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약성서학 내부에서 연속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새로운 논제들은 그들이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무시하거나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지적들에 대해 자주 부정한다. 나는 이런 위험이 특별히 구약성서를 순전히 문학적으로만 보려는 대표적인 학자들 대부분에게서 보여진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불란서와 앵글로 색슨계로 특징지워지는 현대 문학비평학이 그렇다. 그 위험은 지금까지의 구약 연구보다 더 많아 보인다. 이들중 대부분은 지금까지의 구약학 연구와의 연속성에 관심을 두려고 하질 않는다.

이 문제는 챠일즈나 제임스 샌더스 그리고 다른이들이 더 발전시켰던 ‘정경비평’ 논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경비평’의 논의는 비록 구약성서 본문의 최종 형태에 결정적 관심을 표명하지만, 현 최종본문은 오랜 역사를 통해 나타난 결과물이고 다양한 경우들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을 이해하고 실질적으로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본문의 주석 작업을 위해서 그 이전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보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각자 관심이 어떤 것에 그 우위를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어떤 것이 ‘본래의 것’ 인가를 찾기위해, 본문의 이전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분석에 우선권을 둘 것인지, 아니면 비록 본문이 복잡한 이전의 역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해도, 무엇보다도 현재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에 그 우위를 둘 것인가 하는 차이이다3).

내가 보기론 이 두 문제제기는 모두 옳다. 이 둘을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논쟁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구약신학계에선, 특히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단 하나의 방법론만이 지배해 왔던 듯싶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다시 배워야 하고 다른 문제제기들과 방법론적 논제들을 가능하고 정당하게 고찰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국제 구약학계에 잘 받아들여지리라 본다.


II


지난 십 년간 이사야서 연구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두 가지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이사야서 저자에 대한 의심이 아주 크게 불거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이는 오토 카이저(Otto Kaiser)이다. 그에 의하면 ‘진짜’ 이사야의 말을 건질 수 있는 건 전혀 없고, 이사야라는 이름으로 묶여져 문서로 나온 가장 첫 번째 수집물은 기원전 6세기 내지는 5 세기라는 것이다4). 그래서 주석가는 근본적으로 문학적 작업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보다 후대 문헌들에 대해서 작업을 해야 한다.

2. 이사야서 안에서 전체를 싸고 있는 편집 또는 구성에 대한 문제가 언제나 빈번하게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조짐이생겨나고 있었다5). 여기서도 역시 본문의 현재 모습에 기인하는 특히 문학적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지금까지 이 둘이 상호 연관되어 비치지 않았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이다. 내가 보기엔 근본적으로 해석학적인 문제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카이저는 전반적으로 본문의 통일성 있는 각 단락들로부터 그의 주석의 출발점을 삼았다. 이는 비록 전제들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곤 하지만, 예언자가 했던 말들의 진정한 ‘삶의 자리’에 대해선 더이상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작은 단편’에 대한 고전적 양식비평사의 이해를 여전히 붙잡고 있던 셈이었다. 그는 본문이 자라나는 역사에 대하여, 여러 ‘손길들’, 작업자, 편집자 등으로 표현하지만, 어떤 하나의 총괄적 구상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들의 실제 모습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완 반대로 멜루진(R.F.Melugin)과 아크로이드(P.R.Ackroyd)의 연구들에는 카이저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이사야서) 전체를 움켜잡고 있던 구상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려 하는 것들이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슈테크(O.H.Steck)의 이사야서 35장에 대한 연구6)는 방법론적으로 그 중간 자리를 차지하는 매우 눈여겨볼 것으로 여겨진다. 슈테크의 작업은 한편으론 그가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던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방법론들과는 달리 매우 힘차고 설득력 있는 견해로, 이사야서 35장을 “이사야서의 첫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을 연결 지어주는 하나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전체 ‘대이사야서 편집’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의 작업은 많은 면에서 카이저의 방법론과 유사하게 자주 세부적인 면에서 문서비평적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III


나는 아래에서 여러 본문들에 대해 강력하게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보다 큰 관련성의 차원에서 시험코자 한다. 이는 1984년 나의 논문7)의 테제들을 진척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본문들, 즉 어느 정도 이미 알려져 새로운 논의들이 이끌어 지기도 했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았던 12장과 35장 그리고 1장과 33장 같은 본문들에 제한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사야서 전체 여러 다른 본문들과 서로 많은 면에서 관련을 맺고 있는 본문이다. 이는 우연히 아무런 의도도 없이 이루어진 게 아니며, 또한 그냥 약간의 ‘손질’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정말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본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슈테크가 ‘독립될 수 없는 본문’8)이라고 가리킨 바로 이사야서 6장에 관한 것이다. 이는 슈테크가 카이저의 말처럼 ‘앞을 향해 열린’9) 소명(기사)이라 유형 지은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Kontext)은 무엇인가? ‘비망록(Denkschrift)’(6,1-8,18 아울러 9,6)인가? 이것이 “독립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사야서의 다른 부분들인 ‘제2이사야’, ‘제3이사야’와의 관련들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우선, 나는 이사야서 6장이 무엇에 대해 ‘열려’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가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완고한 신탁’(Verstockungsvertrag)의 목적은 무엇인가? 주석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에 일치하고 있는데, ‘제1이사야’(1-39장)의  배경 속에선 그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구할 순 없다는 것이다10). 대답이 반드시 이 장(章)들로부터 또는 ‘비망록’의 배경과 근접한 것으로부터 간접적으로 해명되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미래에 있을 야훼의 주권 행사를 고대하며 그것이 집행될 것에 대한 하나의 선언”에 관한 것은 아닐까?11)

그렇다면 대답은 8장 17절의 소망의 말 속에 혹시 담겨 있는 것인가(카이저)12)? 성구사전을 찾아보면 8장 17절에 나오는 םחנפ רחתסה(역자 주: ‘얼굴을 가린다’) 표현 용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어찌 대하시는 지에 대한 진술로써 54장 8절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 다시 나온다. 다시말해 ‘위로하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이사야서 두 번째 부분인 40-55장 안에 나온다는 것이다(그밖에, 역사를 회고하는 64장 6절에 한 번 더 나타난다). 미래에 대한 표상은 8장 17절을 넘어 심판이 완전히 이루어 진 그 이후의 미래로 나아간다. 구원은 앞에 놓여 있으며,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웠던 것을 끝마치실 것이 선포되고 있다.

이제 완고한 신탁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본문에는 다음 단어들이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האר/עמשׁ(‘듣다/보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עדי/ןיב(‘깨닫다/알다’)이다(6:9b.10b). 이 밖에 10절 상반절에서 이 완고한 신탁은 매우 분명한 어조로 나타난다: 백성의 마음이 ‘둔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무감각해지고, 반응도 없어진다. 아울러 그들의 귀도 막히고 눈도 감기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주의해서 볼 것은 ןיב/עדי(‘알다/깨닫다’) 단어 짝은 이미 이사야서 서론에 나오는데(1,3), 거기서 이스라엘의 모습은 서로 상반되어 나타난다: 하늘은 듣고, 소와 나귀는 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여기서도 문맥상 분명해 지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것이며(4절), 그로 인한 심판의 결과가 뒤따른다(5-7절). 이 점에 있어서 이사야서 1장은 바로 독자들에게 6장의 완고한 신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다. 왜냐하면 6장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아도, 독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화가 미쳐 있는 근거가 그들의 죄에 있음에도, 그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련은 다음에서 더 분명해진다. 즉, 이사야 스스로도 자신에게 부여된 신탁을 전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자신의 죄(תאטח/ןוע)로부터 놓임을 받게 된다(6:7). 이사야는 자신 역시 죄지은 백성의 한 일원으로 이 죄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1:4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ןוע דבכ םע אטח יוג).

이스라엘에게 놓여 있는 완고함은 그들이 자신들의 고집을 완전히 벗어 던져 버릴 때까지 계속된다. 이는 41장 20절에 강조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되돌아 올 수 있도록 광야를 풍요한 곳으로 바꾸실 것이다(17-19절).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를 보고 알게 될 것이다(ועדיו וארי ןעמל). 이 모습은 6장 10절 하반절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알지 못한다”(ןיבי ובבלו ... הארי־ןפ). 물론 이 선포가 저들이 완전히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저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을 없애버리질 못했다. 아직 저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וניבי אלו ועדי אל). 왜냐하면 저들의 눈은 감기어서 볼 수 없고 저들의 마음은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44:18, 참고 19절).

40-55장 안의 다른 본문들에서는 소경과 귀머거리에 대한 비유의 말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고는 언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42:16과 18절이하 그리고 43:8절이 그렇다. 클레멘츠(R.Clements)는 이 본문들과 이사야서 6장의 완고한 신탁 본문과의 상관성을 잡았다13).

독자는 이와 나란히 다른 선을 따라갈 수 있을 텐데, 이는 독자가 몰이해와 죄 그 사이의 관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39장 안의 여러 종말론적 본문들 안엔 죄가 이미 벗겨진 것으로 선포되어 있다. 27장 9절엔 이스라엘이 이방의 제단들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그들의 죄가 깨끗함을 받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 쓰인 용어들은 바로 6장 7절과 아주 가깝다는 것이 눈에 확 뜨인다14). 33장 24절엔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선포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있다: “거기에 사는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으리라”15)

무엇보다도 이 주제는 바로 40-55장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미 40장 2절에서는 1장 4절을 재고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ןוע דבכ םע אטח יוג(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에게 선포되는 것은, 그들의 ןוע(죄)가 용서함을 받았으며, 그들의 תאטח(죄악)에 대한 보상이 다 치러진 것이다16). 43장 22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의 희생제의가 그들의 죄의 문제와 상반되어 나타난다. 이는 희생제의가 직접적으로 죄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 1장의 모습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비록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고통을 주었지만, 이제 이것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도록(24절 이하) 하나님은 저들의 죄를 다 지우신다. 50장 1절에서도 역시 이런 사실이 엿보이는데, 이스라엘이 팔리운 것은 바로 저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4장 22절에 또 다시 나타난다. 44장 23절의 찬양구는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기에17), 그 앞 단락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종’인 이스라엘의 죄를 씻으시고, “내게로 돌아오라(ילא הבושׁ), 내가 너를 깨끗케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요구한다. 6장 10절의 “완고한 신탁”은 바로 저들이 되돌아 올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בשׁו...ןפ). 이 방해가 이젠 없어졌고 이스라엘은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주는데, 6장 10절에 뒤따라 나오는 ול אפרו(그가 고침을 받으려고)는 40-55장 안에 그와 일치하는 것들이 여럿 발견된다. 53장 5절 같은 것이다. 6장 10절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는 바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인 반면에, 53장 5절 ‘하나님의 종’에 대해 말하는 곳에선, 그의 고난을 통해 이를 말하고 있는 단체(우리)가 고침(치료)을 받는다(ונל־אפרנ)18). 그밖에도 이사야서 6장에서 보았던 것들이 야훼의 종에 대한 진술들에서도 보인다. 즉, ‘야훼의 종이 소경의 눈을 열게 할 것이다’ 같은 것이다(42:7 [또한 어둠 속에 살던 이들의 ךשׁח יבשׁי 해방] 참고 9:1). 야훼의 종 역시 소경이고 귀머거리 였고,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이 그에게 미쳤으나(42:19-25), 그가 이제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여셨고(50:4 이하), 어둠 속에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새로운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10절).


IV


이사야서 6장에 대해 개방되어 있는 또 하나 분명한 점은 “주여, 언제 까지 입니까?”라는 질문과 예언자가 받은 대답인(11절) “성읍이 황폐해 지고, 빈집들이 되고, 밭마다 황무지(הממשׁ)가 될 때까지”의 상황들이다. 이 선포는 이사야서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장 7절에서 땅이 황폐해 질 것이 선포되었고, 6장 11절에서 고조되어 나오는 황폐해진다는 단어 הממשׁ 가 여기서 두 번 쓰이고 있다. 이는 또한 40-55장에서 또 다시 등장한다. 예루살렘의 재건과 주민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49장 이하에서 주된 주제이다. 아울러 용어에 있어서 역시 6장 11절과 관련된다는 것은 명백하다19). 49장 17절 이하엔 예루살렘이 재건될 것이 선포되는데, 저들의 폐허지와 황무지들(ךיתממשׁ)이 이젠 비좁아 질 지경으로 새로운 주민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54장 1-3절엔 새로운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הממושׁ־ינב(‘홀로된 여인의 자식’ 1절)20)으로, 다시 주민들이 모여 살게 된 성읍들은 תומשׁנ םירע(‘황폐한 성읍들’ 3절)로 나타난다. 끝으로 이는 한 번 더 62:4에 크게 강조되어 나온다: “누구도 너를 ‘버림받은 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너의 땅을 더 이상 ‘황무지’(הממשׁ) 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사야서 6장은 단지 시간상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내다보고(또는 뒤돌아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서 자체 안에서 40장 이하에 계속 이어지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사야서 6장의 “언제까지 입니까?”를 기억하고 있는 독자는 그 관련을 알고 있다. 동시에 하나의 커다란 줄기가 이어지고 있음을 독자는 안다, 곧 이사야서 첫 번째 장으로부터 이사야서 6장의 완고한 신탁을 거쳐 40장 이하의 구원의 선포로 이끌어지는 것 말이다.


V


멜루진과 아크로이드는 이사야서 6장과 40장에 나타난 찬양구가 서로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21). 두 본문 모두 그 처음에 환상(6:1-3)과 아울러 계시의 말씀을 듣는 장면(40:1-2)이 나온다. 그런 다음 각각 찬양의 소리(לוק)가 두 번 나오는데, 처음은 부연하고 있는 ארוק(ה)(‘(그)음성’ 6:4 과 40:3), 그리고 두 번째는 רמא(‘말하다’ 6:8 과 40:6)와 함께 나온다. 두 번째의 말하고 있는 자의 음성은 각기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예언자에게 향한다: 6:8의 질문, “내가 누구를 보낼까?”는 문맥상 예언자에게 향하는 것이고, 40:6의 명령형 “외쳐라!”는 곧이어 예언자로 하여금 “내가 무엇을 외치리이까?”22) 라는 질문을 이끌어 낸다. 6:8에서 이 음성은 분명히 주님('adonaj)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문맥상 예언자가 그 이전에 이미 주님(’adonaj)이 보좌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본 것과 일치한다(1절). 40:6에선 이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분명치 않다. 이것이 신적인 음성이라는 것은 문맥으로부터 나타나지만, 이것이 야훼 자신인지 아니면 하늘의 사자(使者)가 말하는 것인지는 결정지을 수 없다.

40장에선 3절의 부르는 자의 음성은 6절의 것과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그 음성은 예언자에게 사명을 맡기기 전에 우선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부르고, 온 자연을 향해,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이 돌아올 길을 준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면 또는 이 일로 인해 자연스레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 kabod 가 나타날 것이다(5절). 그렇지만 6장 4절에서 부르고 있는 이 소리하곤 어떤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ארוקה(그 음성)을 스랍들의 것으로 보고 이를 복수로 번역한다23). 그렇지만 언제나 이 부르는 자가 야훼 자신인지 아닌 지의 문제가 제기되곤 하였다24). 40장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역시 모두 같은 찬양구 구조의 평행이 보여주는 것처럼 두 번 다 같은 이의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영광’ kabod 에 대해 언급한다(6:3; 40:5). 6장에 나온 이 단어는 1-39장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면에서 볼 때 매우 주목할 만 하다25). kabod 가 지니는 입장과 기능은 두 본문에서 서로 상이하다. 6:3에선 스랍들이 부르는 찬양 가운데 온 땅에 퍼지는 것이고26), 반면에 40:5에서는 ‘모든 육체’를 위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와 상응해 6:3에선 환상 이야기를 이끄는 서두에 나오는 반면, 40:5에서는 ‘부르고 있는 자’의 말 속에 들어 있다. 이는 두 본문의 찬양구 사이엔 무언가 하나 옮겨진 것이 있다고 보인다.

이 두 본문의 분명한 평행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여기 ‘고전적’인 두 가지 답변이 있다. 하나는 한 본문에 ‘문학적으로 종속’ 된 것이 다른 본문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만약 이사야서 6장이 이사야의 것이라고 할 때, ‘제2이사야’ 처음은 바로 이사야 본문에 대해 문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제2이사야에 대한 이해를 결정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공통의 어떤 ‘대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소명설화’로써? 엘리거(K. Elliger)는 이사야 40장에서 “제2이사야의 소명체험의 한 메아리”를 보았다27). 그는 이를 다른 예언자들의 소명기사들과 관련지은 유형들에 대해 반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구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이다. 두 본문은 이사야서의 기본적인 관점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서로 대응하고 있다: 즉, 심판 선언의 절정, 6:8 이하 완고한 진술에 보이는 심판의 불가피성과 죄가 지워짐으로(40:2) 이제 구원 선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사전에 심판이 없이는 구원선포란 아무 기능도 갖고 있질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완 반대로 6:8이하의 완고한 진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는 40장 이하에서 처음으로 풀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6장 첫 단락은 40장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 구조를 잡아갔을 것이다.


VI


문학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본 구성의 관점 하에선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서 40장 이하의 여러 본문들과 많은 면에서 상호 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두 본문은 그들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 서로 완전하게 이해되어진다. 이것이 이 논문의 첫 의도를 달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구성에 다다르게 된 문제를 통시적으로 접근할 때, 본문의 연대라든가 또는 전승된 문제들과 문학적으로 무엇에 종속되어 있는가 하는 여러 문제들은 요즘 논의의 연구들에선 현저하게 나타나질 않고 있다. 내게 있어서 좀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본문에 대해 공시적으로 자유롭게 관찰해 들어가자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통시적 연구들이 해 온 문서비평의 문제제기들에 대답하려 들지 말고 말이다.

내게 두 가지 면에 있어서 분명하게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는 우선, 공시적 연구에서 드러난 여러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 그 구성상의 관련들을 고찰하려는 것은 본문이 말하려는 의도를 밝히자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문제제기들을 통해선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되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구사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주석가들은 그들의 분명한 관찰들이 통시적으로 접근해 생성 연대과정들을 재조정할 수 있는 식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미 제1단락에서 밝혔듯이 통시적인 문제제기들은 바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지배해 왔던 방법론들이 달라지지 않은 채로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새로운 고찰들의 조명아래 시험되어져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개념을 빌리자면 “학문의 혁명적 구조”28)가 오늘날 구약성서학에서 ‘위기’의 단계에 처해 있는 것이다. 쿤은 인지되어 가고 있는 위기로 인해 여러 상이하게 나타날 징조들을 밝히 묘사해 주었다. 한 구약성서학자가 위기의 증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는 그러기를 아예 원치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풀려고 하기보다는 그 대신에 옛 방법론들을 보다 근본적이고도 확실하게 적용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이는 어느 정도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제기된 문제들에 하나의 통일된 것 보다 더 늘어난 여러 방법론들을 가지고 접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반드시 구약성서학에 해가 되는 것 만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1) 이에 대해 J. Barton, Reading the Old Testament. Methode in Biblical Study (1984)를 참고하라.


2) 이에 대해서는 J. Barr, Holy Scripture. Canon, Authority, Criticism (1983)과 B.S.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1979) 를 참고하라.


3) 이에 대해선 R. Rendtorff, Between Historical Criticism and Holistic Interpretation: New Trends in Old Testament Exegesis, in: VT.S. 40 (1987) 298-303을 참고하라.


4) O. Kaiser, Das Buch des Propheten Jesaja. Kap. 1-12, ATD 17 (51981)


5)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R.F. Melugin, The Formation of Isaiah 40-55, BZAW 141 (1976) 특히 177 쪽 이하; P.R. Ackroyd, Isaiah I-XII: Presentation of a Prophet, in: VT.S 29 (1978) 16-48 (그의 같은 논문으로, Studies in the Religious Tradition of the Old Testament [1987] 79-104), 같은 이, Isaiah 36-39: Structure and Function, in: Von Kanaan bis Kerala. FS J.P.M. von der Ploeg, AOAT 211 (1982) 3-21 (그의 같은 논문으로, Studies, 105-120); R. Rendtorff,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VT 34 (1984) 295-320; O.H. Steck, Bereitete Heimkehr. Jesaja 35 als redaktionelle Brucke zwischen dem Ersten und dem Zweiten Jesaja, BEThL 81 (1989) 361-406


6) O.H. Steck, Bereitete Heimkehr. Jesaja 35 als redaktionelle Brucke zwischen dem Ersten und dem Zweiten Jesaja, BEThL 81 (1989) 361-406


7) R. Rendtorff,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VT 34 (1984) 295-320


8) O.H. Steck, Bemerkungen zu Jesaja 6, BZ NF 16 (1972) 188-206, 특히 203.


9) Kaiser의 위의 책 122. 주 13.


10) J.M. Schmidt, Gedanken zum Verstockungsvertrag Jesajas (Is. VI), VT 21 (1971) 68-90 그리고 R. Killian, Der Verstockungsvertrag Jesajas, in: Bausteine Biblischer Theologie. FS G.J. Botterweck, BBB 50 (1977) 209-225를 참고하라.


11) 슈테크의 위의 책, 이사야 35장, 204.


12) 위의 책, 122.


13) R. Clemnts, Beyond Tradition-History. Deutero-Isaianic Development of First Isaiah‘s Themes, JSOT 31 (1985) 95-113, 특히 101-104.


14) Rendtorff의 위의 논문 302 이하를 참고하라.


15) 이 본문에 대한 독일어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 주질 못해 보인다. 원문은 이렇다: 그에게 (분명 시온을 의미한다) 거주하는 백성은 죄용서 함을 받은 이들(ןוע אשׁנ 분사 수동태), 곧 그들의 죄가 이미 씻김을 받은 상태를 가리킨다.


16) Rendtorff 위의 논문 302-304를 참고하라.


17) 40-55장에 나오는 찬양들에 대해서는 F. Matheus, Singt dem Herrn ein neues Lied. Die Hymnen Deuterojesajas, SBS 141 (1990)을 참고하라.


18) 57장 18절 이하에서 구원에 대한 언급이 한 걸음 더 앞에 나아가 있다: 즉, 하나님 스스로 구원(אפר 두 번 사용)하시고 위로(םחנ, 12,1과 40,1을 참고)하시며 평화(םולשׁ)를 창조하신다. ‘위로하다’ םחנ 에 대해서는 Rendtorff의 위의 논문 298-300을 참고하라.


19) O. Kaiser의 위의 책 134, 주 85 에서 상광 본문으로 단지 예레미야와 신 28장을 들고 있지만 이는 이사야서 안에서 평행본문이 아니다.


20)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삼하 13,20에 따르면 다말이 그녀의 오빠인 압살롬의 집에서 혼자 지낼 때, 그녀가 הממשׁ 로 나온다. 이에 따른다면 ‘홀로 있는 여인’은 남편과 아이가 없이 지내는 여인을 말한다. 이는 이사야 62,4에서는 이전에 הממשׁ 라고 불렀던 것을 이젠 새로이 그와 반대 개념으로 הלועב (결혼한 여인)이라고 부른다.


21) R.F. Melugin의 위의 책 83-84; P.R. Ackroyd, Isaiah 36-39, 5-6.


22) 맛소라 본문에서는 רמאו 가 3인칭으로 쓰였고, 쿰란 대이사야 사본과(1QIsa) 70인역(LXX)에는 1인칭으로 나오는데 이 차이는 본문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3) 대부분 그리고 라쉬(Raschi)에게서도: םיארוקה םיכאלמה לוק 그리고 Ibn Esra는 ארוקה ןומהה לוק


24) A. Dillmann, Der Prophet Jesaja, KeH 5 (51890); P.R. Ackroyd, Isaiah 36-39, 5를 참고하라.


25) 35,2는 40,5과 분명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O.H. Steck, Heimkehr, 15). H. Wildberger (BK X/2, 949)는 이를 24,23 처럼 중요한 자리로 여긴다.


26) 시편 19,2를 참고하라. R. Rendtorff, Die Offenbarungsvorstellungen im Alten Israel, in: W. Pannenberg (Hg.), Offenbarung als Geschichte (51982) 21-41(=R. Rendtorff, Gesammelte Studien zum Alten Testament, TB 57 (1975) 39-59),특히 28-29(46-47).


27) K. Elliger, Deuterojesaja, BK XI/1 (1970) 10.


28) Th. S. Kuhn, Die Struktur wissenschaftlicher Revolutionen, stw 25 (21969), 특히 7장과 8장.


2007-09-13 11: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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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목사님, 첨부화일을 열어보니 히브리어가 모두 거꾸로(글자 순서가 뒤바꼈습니다) 나왔습니다. 제 컴퓨터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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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한글버젼에 따라 히브리어가 거꾸로 나옵니다. 전 2002 버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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