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신학 논문, 원고, 컬럼, 번역 글 모음

  [원고] 선교=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기독교사상 2007년 10월호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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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박경철(한신대 구약학 교수)


들어가면서

글의 제목 끝에 물음표를 붙인 것을 보고 ‘선교’ 더 이상 가지도 말고, 보내지도 말자는 말을 하자는 것인가 짐작하고 불쾌한 마음을 갖고 이 글을 대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대한 교계와 사회 내에서의 숱한 논의에 안티기독교의 목소리 중 하나를 또 다시 꺼내려는가 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하는 이가 있을 지 모르겠다.

필자는 제목 끝의 물음표 보다도 오히려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 덧붙인 부제가 주는 무게가 더 힘겹다. ‘선교’라는 제목 때문이고, 그것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 붙였기에 더 그렇다. 그것은 구약학자가 섣불리 ‘선교학’의 분야를 건드린다는 부담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한 두가지 변명이라도 우선 늘어놓고 위의 제목으로 인한 무게를 덜어야 할 것 같다.

첫째, 물음표의 문제는 이렇다. 글이라는게 제목이 있고, 그것도 글의 가장 앞에 오는 것이어서 그렇다. 실은 글의 마지막에 한 줄 쓰고 싶었던 것인데 앞에 온 것 뿐이다. 그러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제목 때문에 선입견을 갖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다.

둘째, 구약성서가 말하는 ‘선교’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가 무엇인지를 새로이 정의 내리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누구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교’라는 개념속에서 구약성서가, 특히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구약성서의 이야기이면서도 너무도 잘 못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구약성서학이 다루는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한 것이다. 물론 지면상 구약전반을 다 다룰 수는 없다.

셋째, 이 글은 본지 지난 9월호 특집(“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우리의 자화상”)에 이어지는 이유로, 그리고 탈레반 인질사태가 끝이 난 이후, 여전히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지는 가운데 ‘선교’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이 글은 금번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탈레반 인질 사태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려는 글도 아니고, 그것이, 아울러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선교가 ‘선교’ 였느냐 ‘봉사’였는냐, 혹은 그 우선권의 문제를 따지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와 ‘봉사’의 적절한 관계의 지침을 마련하려는 취지도 아니다. 그보다는 종교적 행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선교’라는 것과 ‘봉사’라는 사회윤리 및 정의실천이라는 다소 구분되어 보이는 이분법적 구도가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다루어 지고 있는 지를 살피려는 데 본 글의 목적이 있다. 이 본래의 목적을 조금이라도 이룰 수 있다면, 이 글이 금번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관련해 한국교회가 ‘선교’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자신을 다시 한 번 성찰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논의의 장에 구약성서적 근거를 조금 더 보충 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위에 적은 제목은 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선교 =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 이사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위 본문은 기독교인들의 귀에 익숙한 성서구절이다. 특히 신학생으로, 목회자로, 선교사로, 아니 선교적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어느 누구에게도 열려 있는 너무도 익숙한 결단의 고백문이다. 하나님(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골 골짝 빈들에라도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귓가에 들리는 성경구절이며, 입가에 맴도는 요절이다. “선교 =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의 슬로건에 꼭 맞는 성서본문이다. 그런데 성서가 과연 그런가? 바로 그 다음절만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성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파송하는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완 정반대다! 회개는 고사하고 아예 그 가능성(보고, 듣고 깨닫는)까지 일절 차단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러 교회 밖을 나서라는 게 아니라,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없애라는 것이다. 혹이라도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접하지나 않을까, 아예 성경을 불태워 없애고, 부흥집회와 불신자 초청집회등의 모든 복음전파의 기회를 일절 그만두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선교적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이들의 소명의 결단을 위한 성서구절이며 요절이 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성서를 골라 읽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은혜로운 요절일지라도 성서본문이 그 전체 맥락에서 본래 의도하려는 것과 달리, 한 부분만 따로 떼어내어 인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성서읽기와 주석 및 해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금기시 되어야 한다. 독자가 어느 책을 읽고 그 책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대전제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상과 같은 이른바 ‘완고한 신탁’을 내리신 것일까? 사 6장만을 읽는 독자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고 물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읽어오는 독자라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결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완고한 신탁문’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불가성이란 ‘듣지 못함’과 ‘보지 못함’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V.9.10) 쓰인 ‘듣다/보다’, ‘깨닫다/알다’라는 개념은 사 6장에 와서야 비로소 언급된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이 핵심 개념들은 이사야서 가장 처음에 범죄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은 ‘듣고’, 소도 주인을 ‘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의 주인인 야훼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1:2-3). 이사야서 1장은 바로 독자들에게 6장의 완고한 신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다. 왜냐하면 6장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아도, 독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화가 미쳐 있음은 그들의 죄 때문이며, 더군다나 이를 저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심판의 날(“그 날에”)은 사 6장 이전에 이미 줄 곳 언급되고 있다(2:11,17,20; 3:7,18; 4:1; 5:30). 야훼는 이미 자기(야훼)를 버린(1:4)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야곱의 집)을 ‘버리/떠나셨다’고도 말한다(2:6a).

이상과 같이 사 6:9-10의 ‘완고한 신탁’은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런 야훼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이미 범죄한(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은 정해진 것이며, 심판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이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의 심판은 끝이 아니다. 사 6장 끝에서(V.13b) ‘거룩한 씨’가 ‘남는다’는 말과 같이 심판을 면한 구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 또한 사 6장 이전에 이미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읽는 독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 1:9을 통해, 이 책이 야훼의 심판 이후에, 심판을 면한 ‘남겨진’ 이들을 통해 쓰여졌고 읽혀지도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겨진’ 이들이 구원의 날(‘그 날에’)에 ‘거룩하다’고 일컬어 질 것도 이미 사 6장 이전에 언급된 것이다(4:3). ‘완고한 신탁’을 받기 전, 예언자 자신의 ‘악’과 ‘죄’가 씻김을 받는 정화의 주제(6:5-7) 역시, 사 6장 이전에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회복의 예언 안에서 그들의 ‘죄’(1:4,18,28; 3:9)와 ‘악’(1:4; 5:18)이 씻기우는 것과 관련된다(1:18,25; 4:4). 그러면 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심판에서 구원으로 전환되는 그 가능성은무엇인가?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1:2ff).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행위들에 대해 부정한다. 제물을 가져오지도 말고(11-13절), 아예 온갖 종교집회까지도 금지한다(13-14절).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하는 손에 피가 묻어있다는 것이다(15절). 손에 묻은 피는 그들의 악행을 의미하고(16절), 이제 악을 금하고 정의를 찾아야 하며, 그 정의실천의 모습은 사회 약자(고아,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이다(17절, 23절). 이스라엘의 죄악은 정의와 공의가 있던 곳에 폭력과 살인이 판을 치고 있는 실정(21절)이며, 그에 대한 야훼의 심판(24절)과 함께, 야훼의 구원의 모습은 잃어버린 정의와 공의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26-27절). 첫 장에 이어지는 2장은 정의와 공의가 실현된 그 후의 결과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모든 열방이 시온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것이다(2:2). 야훼의 말씀(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하여 그곳으로 몰려온다는 것이다(2:3). 야훼의 말씀을 전파하러 열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언제 그런가? 시온에 정의와 공의가 세워진 다음이다. 정의와 공의가 세워진 곳에 무엇이 이루어 지는가? 모든 민족간의 분쟁, 갈등, 전쟁이 그치는 것이다. 전쟁의 종식은 모든 죽임/살생의 무기(칼과 창)가 살림/상생(보습/낫)의 도구로 바꾸어지는 세상이다(4절).

이사야서 처음(1:2-2:4)에서 다루고 있는, 이스라엘 안에 사회약자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고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면 그곳으로 온 열방이 몰려온다는 구도는 이사야서 마지막(사 65:17-66:24)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 구도는 이사야서 처음과 끝 만이 아니라, 이사야서 첫 번째 큰 단락의 결론부(사 11-12장), 열방신탁의 단락들(13-23장), 이사야 묵시록(24-27장), 야훼의 종의 노래들(42장, 49장)과 예언자 소명기사 단락 (61-62장)등, 이사야 전반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


간단하게 묻고 답해보자. ‘선교’가 무엇인가? 주님의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것 아닌가? 주님의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과 맞추어 이사야서를 보자. 먼저, ‘선교’를 단순히 ‘보내고’,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사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이루어 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사야가 아주 잘 들어 맞는다. 문제는 그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선교’의 요체인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땅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땅의 모습일 것이다. 바로 이것을 이사야가 말한다. 그것이 곧 이사야서 결말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신학이다.

사 65:17a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루살렘’(V.18f.)과 야훼의 구원을 기뻐하는(참고, 사 62:5; 습 3:17) ‘그 백성’(참고, 사 61:7.10; 습 3:14)이다. 그러나 야훼의 새 창조의 대상이 도성 예루살렘 자체가 아니다. 새 예루살렘의 표상은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65:17-19; 66:10-14.20f.). 18절에서는 단어 ‘새로운’이 예루살렘에는 쓰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새 창조는 ‘기쁨’이라는 단어와 연관된다(V.18b). 이 ‘기쁨’은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그 다음 장인 66장에까지 이어진다(66:10f.). 비록 야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말하지만 뒤따르는 본문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하늘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질 않는다. 단지 땅에 대한 보도뿐이다. 즉 새 하늘 창조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제 새롭게 달라질 땅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 65:21과 22절은 야훼의 새 창조의 사회적 배경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V.21:“집을 지은 자들이 (거기로)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원을 지은 자들이 (그들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V.22a:“집을 짓지 아니한 자들은 남이 (지은 집에) 들어가 살지 못하며, 심지 않은 자들이, 남이 (심은 것을) 먹지 못하리라.”

65:22a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에는 착취가 없는 세상임을 그려준다. 이러한 새로운 그림은 동시에 당시의 사회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사회 하층민들의 땀이 착취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은 당시 사회 상류층의 착취계급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사 3:14f.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 3:14f.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빼앗은 것으로 자신들의 집을 채우는 사회 지도자들이 야훼의 심판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참고, 사 5:8). 사 3:14f.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 상류층들에 대한 심판선언이라면, 65:21f.는 앞으로는 가난한 자들이 더 이상 착취 받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이들을 위한 구원선포인 것이다. 사 62:8f.에서도 예루살렘의 구원의 표상은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이 없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들의 것을 빼앗겼던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것을 성전 뜰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전이 곧 해방의 장소요, 더 이상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곳임을 말해준다. 이는 곧 구원의 때는 ‘정의’가 실현되는 때임을 가리킨다(사 62:1b).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시는 야훼는 ‘공의’를 사랑하고, ‘불의한’ ‘착취/빼앗음’를 싫어하기 때문이다(61:8). 사 10:1f.은 사회 하층민들에 대한 상류층의 이러한 불의의 행위를 잘 보여준다. 사회 지도층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의 모습을 가리켜 ‘정의’(쩨데카)를 원했지만, ‘울부짖음’(쩨아카)만 있다고 사 5:7은 고발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울부짖음’(쩨아카)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65:19). ‘쩨아카’(울부짖음)가 들리지 않는 새 하늘 새 땅의 세상(하나님 나라, 하나님 선교)은 곧 ‘쩨데카’(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은 가진 자들이 자행하던 사회 불의에 대한 심판의 선언임과 동시에 억압받던 당시 사회 민중들에 대해선 구원의 선포가 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모습은 65장 마지막 절(25)에서 그 절정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사 65:25은 사 11:6-9의 수용이라고 여겨져 왔다. 사 11:6-8과 65:25에서 나타난 동물들의 평화로운 세계는 강자(이리, 표범, 사자, 곰)와 약자(어린 양, 아기 염소, 송아지, 소, 젖먹이 아이, 젖 뗀 아이)가 함께 사는 모습이다. 그러나 평화의 세계란 약자와 강자가 단지 함께 사는 세상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는 약자가 더 이상 강자의 먹이(희생양)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 전제이다. 이는 약자가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평화는 강자의 폭력이 그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본문에서 강자들(이리와 사자)이 약자들(어린 양과 소)을 그들의 먹이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먹이인 풀(식물)을 먹는 다는 강자들의 먹이의 변화를 언급한다. 싸움과 전쟁, 살육이 없는 평화란 강자들의 약자에 대한 폭력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즉, 이 평화의 세계상에 대한 비유는 인간 사회에서의 강자들의 불의한 폭력과 이 폭력으로부터 약자들의 해방을 빗대고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사 11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세계상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면서 동물들의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 11장의 종말론적 메시아사상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과 ‘땅의 곤궁에 처한 자들’을 향하고 있다. 4절은 당시 이러한 사회 약자들을 억압하는 불의한 사회 상류층을 고발한다. 정의 실천의 요구는 무엇보다도 사회 약자들인 가난한 자들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사회 약자들을 위해 정의를 실천할 때에야 올 수 있다(V.5f.). 사 32장 역시 평화의 세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실천을 말한다. 평화와 정의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요,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화와 안전”(V.17)이기 때문이다.

사 11장이 보여주는 구성은 이렇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정의 실천의 요구(V.3-4)와 함께 이루어지는 평화의 세계(V.6-9)가 전제된다면, 이제 그곳으로 온 민족들이 몰려올 것(V.10f.)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앞서 언급했던 이사야서 전체 구도와 동일하다. 특히 전체 이사야서 결론부인 사 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상은 정의실천의 요구를 그 저변에 깔고 있는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66장에 가서 온 민족들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을 말한다. 특히, 사 11:10과 66:1은 야훼가 계시는 장소에 대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이곳으로 야훼가 온 민족들이 몰려오게 할 것이며, 그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11:10; 66:18). 그러나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이 장소(예루살렘/시온)는 무엇보다도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와서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곧 거기서 정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62:2). 66:18f.는 열방 민족들 중에 선택된 자들이 다시 야훼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다른 민족들에게로 보내어지고 그럼으로써 다른 민족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냄을 받았던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을 데리고 시온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야훼는 이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뽑겠다고 말한다. 이런 표상은 전에 없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런 세계를 가리켜 22절은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야훼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65:17ff.가 말하는 착취가 없고, 강자들의 폭력이 사라지는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전제될 때, 그곳으로 온 민족이 몰려올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 새 하늘과 그 새 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서 전체의 결말이다.

이사야는 말한다.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어디로? 열방으로가 아니다. 지금 불의와 강자들의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다. 가서 할 일은 사회 약자들을 위하여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고, 이는 강자들의 불의를 막아내고 폭력을 그치게 하는 일이다. 모든 죽임을 막아내고 살림을 이루어 내는 일이다. 사회정의가 실현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그곳으로 하나님을 모르던 온 열방이 몰려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선교 =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 요나?


‘선교’하고 ‘전도’라는 말의 차이가 무엇일까? 내용은 같을지라도, ‘전도’는 자기 주변에서도 가능하지만, 왠지 ‘선교’는 어디론가 멀리, 그것도 외국으로 떠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선교’와 관련해서 구약성서에서 그 예로 드는 가장 흔한 본문이 요나서이다. 그런데 예언자 요나 하면 따라 붙는 수식어가 ‘불순종’ 이라는 말이다. ‘불순종한 요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요나서의 이해는, 한국교회를 선교왕국으로 급성장시킨 장본인이 되는 본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했던 요나의 모습이 요나서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순종한 요나’가 요나서의 중심 주제는 결코(!) 아니다.

요나서의 시작은 여느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언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명령)이 임하시는 것으로 나온다.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은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음을 전하라는 것이다(참고, 창 18:20f.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단순히 이것뿐이다. 니느웨의 죄악은 무엇이며,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 저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내용이 없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한다. 그것도 니느웨하고는 정반대의 방향, 당시 세계에서 가장 끝이라 여겼던 다시스(스페인 남단의 섬)로 가는 배를 탄다.

그런데 왜 요나는 도망간 것인가? 설화자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설화자의 의도대로(성서 최종형태 그 모습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도, 요나의 도망의 이유도 설명하지 않던 설화자는 요나의 도망으로 인해 배가 풍랑을 맞게 되는 장면에 가서는 그 상황을 자세히 언급한다. 풍랑을 맞은 배안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요나와 이방 뱃사람들이 어떤 대조를 보여주는지를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나서의 특징이며 목적이다.

주(야훼)께서 풍랑을 일으키자(1:4), 뱃사람들은 ‘두려워’(야라)하고 각자 자기들의 하나님(엘로힘)을 찾는다(5절). 반대로 요나는 잠만 잔다. 그를 본 이방인 선장은 잠만 자는 요나를 꾸짖으며, 자기들처럼 요나도 역시 자신의 하나님(엘로힘)께 기도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6절) 혹시 하나님이 돌이키셔서(슈브) 재앙을 거두실 수도 있다는 것! 이 주제는 이방 니느웨의 왕이 하는 말에서도 나타난다(3:9). 이것이 바로 요나서의 핵심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을 아는 자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요나서는 끊임없이 요나와 이방인의 모습을 대조시킨다. 요나가 제비 뽑혀 자신이 재앙의 원인을 제공했음이 드러나자 뱃사람(이방인)들은 ‘두려움’(야라)에 떨며 어찌하여 요나가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느냐고 질타한다(10절). 이는 그들(이방인)이 이미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믿음(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풍랑이 멈출 것이라고 했지만, 뱃사람들은 매정하게 곧장 요나를 바다에 던져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주(야훼)를 부르며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죽이게) 되는 것이 저들의 뜻이 아님을 구한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이내 풍랑이 멈춘다. 이제 이방인 뱃사람들은 주(야훼)를 ‘두려워’(야라) 하고 주(야훼)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주(야훼)를 섬기기로 약속한다(14-16절). 요나서의 설화자의 관심은 요나가 아니라 바로 이방 뱃사람들의 변화(돌이킴, 슈브)다! 그들이 주(야훼)를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요나가 주(야훼)의 낯을 피한 것에 대해 질타하는 것은, 곧 이들이 이미 주(야훼)에 대한 기본적인 종교적 신앙심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고, 이제 그분 주(야훼)가 풍랑을 멈추게 하심으로 그분 야훼를 섬기기로 작정한다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하나님(야훼)께서 당신의 뜻을 돌이키실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바다에 빠진 요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화자는 주(야훼)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요나를 삼켰다가 다시 그를 뱉어 냄으로 살렸다는 간단한 말만 한다. 요나서 2장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기도만 있다. 주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기도다.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겠다는 서원과 “구원은 오직 주께만 있다”는 요나의 기도를 끝으로 요나는 구원을 받는다. 주(야훼)의 명령으로 물고기가 요나를 뭍에 뱉는다. 이방 뱃사람들은 야훼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야훼께 희생제물을 바쳤지만 요나는 구원 받은 이후 주께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방인과의 대조를 요나서는 계속 이어나간다.

이제 또 다시 야훼의 명령이 요나에게 떨어지고 그제야 요나는 니느웨로 향한다. 그런데 큰 성읍인 니느웨 도시를 둘러보는데 사흘 길임에도 요나는 단 하룻길만 걸으며 단 한마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는 말만 전한다(3:3-4). 설화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요나의 무관심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바로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니느웨의 온 백성들은 금식을 하고, 니느웨의 왕은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찾으며, 힘있는 자들이 모든 폭력을 그치고 ‘돌아설’(슈브)것을 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한다면, 혹시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돌이켜서(슈브) 노여움을 풀고 재앙을 돌이키실지(슈브) 누가 알겠느냐고 말한다. 이방인 뱃사람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한다. 결국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슈브) 그들에게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니느웨 백성들의 돌이킴(회개/슈브)과 하나님의 돌이킴(심판→구원/ 슈브)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심경 변화! 이것이 요나서가 말하려는 중심이다. 이는 4장에 가서 요나의 불평 이야기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니느웨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재앙을 피하게 되자, 이제 요나는 도리어 불평을 늘어놓는다. 불평의 이야기가 기도의 형식으로 나온다. 독자는 요나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감사의 기도를(2장), 그리고 남(이방인 니느웨)이 구원을 받으면 불평의 기도를(4장) 드리는 요나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린다. 요나서 서두에서 설화자는 왜 요나가 도망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이제 마지막 장에 와서 요나의 입을 통해 그 이유를 늘어놓는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돌이키심(슈브)이 주제가 되어 나온다. 이 말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출 34:6)인데, 예언자 요엘이 인용했던 말(욜 2:13)을 요나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엘서에서는 희망의 표현으로 쓰였지만, 요나는 불평스럽게 털어 놓는다. 요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줄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도망의 이유다. 무슨 뜻인가? 요나는 니느웨에 심판의 메세지를 전해야 했다(“40일 후에 멸망”). 그러나 그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예언은 거짓이 되어 버리게 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의 구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그 예언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참고, 렘 28:9). 이미 니느웨의 구원의 가능성을 바라본 요나는 자신이 거짓예언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요나는 신명기 18장 22절을 따른 것 같다: “만일 예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요, 그 예언자가 오만하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설화자는 하나님의 뜻이 에스겔 18장 23절에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는 요나서 마지막 장면에(여러 풍자적으로 쓰인 방식들 중에 하나로) 나타난다. “어찌 내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4:11)며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으로 요나서는 끝을 맺는다.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은 곧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서가 말하려고 한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요나서의 중심 주제는 불순종한 요나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으로 자신의 심판을 돌이키실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곧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12소예언서를 하나의 일련의 시리즈로 읽는 독자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요나서의 바로 앞에 있는 오바댜서가 모든 주제들을 위해 유다의 구원만을 다루고 있다면, 요나서에는 이완 반대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또 다른 면이 전면에 부각된 것이니, 곧 이방인의 구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회개만 한다면 온 인류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전도의 중심은 심판예언의 성취여부만을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 요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빨리 가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외치도록 다그치는 성서가 아니라, 이제 이방인/타종교인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성서로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심판이 구원으로 바뀌는 것은 저들의 사회적 불의와 폭력을 그치게 하는 일이었다.

니느웨의 죄악은 사회적 불의와 부정이었다. 사회적 불의는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하는 강자들의 폭력인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곧 믿음이며 신앙이다. 요나서는 이방 뱃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요나와 자세히 대조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신앙)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 하나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니느웨 백성들의 믿음/신앙이 없는 모습은 곧 저들의 사회적 불의라는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날 믿음과 신앙의 있고 없음이 진정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요나서이다. 요나서의 메시지가 기독교 전도/선교의 메시지로 이해되려면, “믿는 자 천국, 불신자 지옥!”의 진정한 외침은, 종교적/인종적 구분/차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믿지 않는) 자들의 사회적 불의와 부정을 그치게 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외침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요나서가 말하는 ‘하나님 선교’란 무고한 이들을 인질로 삼는 온갖 폭력과 테러에 맞서는 일이다. 아울러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 외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는 강자/대국의 폭력/전쟁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나가면서

‘선교’와 ‘봉사’란 의미를 연결하면서 자주 등장하는 성서의 이미지 중에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성서내용을 조금 고쳐 ‘만약’의 상황을 만들어보자. 사마리아 사람이 조금 더 일찍 도착했을 경우다. 강도가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잠시 멈추어 서서 기달려야 하는가? 이웃에게 베풀 사랑/봉사의 행위는 강도가 간 다음이어야 하는가? 선교지로 떠나는 짐속에 빵과 의약품만이 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한국교회의 선교가 꼭 그래보인다.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강도들은 아직 떠나지 않았고, 강도들은 저 멀리 바다 건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결단하고 떠나려는 우리에게 하나님(이사야서)은 묻고 답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가 갈 곳은 물 건너 저기 이방인에게가 아니라, 사회약자들에게 불의와 폭력이 자행되는 바로 여기라고! 사회정의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실현되는 여기로 하나님을 모르던 온 열방이 몰려올 것이라고!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오직 예수만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앉아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요나서)은 이방인에게 가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개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이방인들이 이제 그의 심판을 두려워 하고 약자들에게 행하는 모든 폭력을 그치라고!


“선교,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어디가서, 누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07-09-13 11: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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