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회 주일 설교 모음(주보용-요약)

  10월22일-창조절 여덟째주일: "하나님의 변심"
  박경철
  

✞ 10월22일-창조절 여덟째주일
제목: “하나님의 변심”
성경: 구약: 요나 3:9-10; 신약: 마태복음 26:39-42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 결심한 것이 오래가지 못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흔히 끈기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때로 우리는 무언가 결심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마음먹은 것을 삼년, 삼십년이 가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반면에, 그완 정반대로 삼일까지 갈 것도 없이 하루만에, 아니 당장이라도 마음먹은 것을 고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고집을 피울 것이 따로 있지...’라고 말할 때 그 안에 담긴 바램이지요.

우리는 지금 내 마음에 결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그것이 평생을 두고 지킬 것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을 고쳐야 하는 지를 생각해 봅시다. 결심한 것을 평생토록 지키기란 쉽지 않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결심한 것이 진정 바르지 못한 것임에도 그 결심을 지금 당장 포기해야 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요? 하나님도 당신의 뜻을 바꾸신 경우도 있을까요? ‘하나님의 변심’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돌이키게 하는 것일까요? 이런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서가 구약의 요나서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성도들 대부분의 경우 요나서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달리 이해하고 있습니다. 흔히 요나서 하면, ‘불순종한 요나’를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고, 멀리 도망가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요나서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나서가 말하고자하는 본질은 ‘요나의 불순종’에 있지 않습니다.
요나는 왜 도망했을까요? 요나서의 시작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배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에 가서 요나서는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의 이야기를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 합니다. 거기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뱃사람들은 이방인들이라는 것이고, 풍랑을 만나자 저들은 저들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완 반대로 요나는 잠만 잡니다. 이방인 선장인 요나를 깨우고 하는 말이 요나서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 내용입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1:6)

‘하나님의 변심’에 대한 말이지요. 이 말은 니느웨의 왕(이방인)의 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3:9)

이방인 왕의 말대로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그런데 하나님의 변심으로 말미암아 요나가 화를 내게 되고, 성서는 그제야 요나가 왜 도망갔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하나님의 변심’ 때문에 요나가 도망갔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변심의 이유로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심에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을 베푸신 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왜 요나는 불평을 늘어놓는 것인가요? 요나는 아예 자신을 이제 죽여 달라고 까지 말합니다(3절).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참 예전자와 거짓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구분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예언자의 예언의 성취 여부에 다려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에 심판을 선언 했다가,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심이 거짓 예언자가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거짓예언자에게 다가올 죽음의 심판을 원치 않았던 것을 항변하는 것입니다. 일면 요나의 말이 맞아 보일수도 있지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요나서는 이에 대한 직답을 하지 않고, 요나의 발언 뒤에 하나의 에피소드를 전해줍니다. 요나와 박넝쿨의 이야기이지요. 뜨거운 햇볕에 말라버린 박넝쿨에 대한 이야기를 빗대어 하나님의 말로 요나서는 끝을 맺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0-11)

하나님의 변심의 제일 근거는 곧 ‘생명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거짓 예언자가 됨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했다면, 수많은 생명들의 죽음으로부터 이를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변심, 그의 돌이키심을 요나서는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을 위한 하나님의 변심의 중심에는 곧 악으로부터의 돌아섬에 있습니다. 인간의 폭력, 악으로부터의 돌아섬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돌아섬과 일치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요나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끝까지 당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은 대표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의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의 응답이지요.

독생자 예수의 마지막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당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고 그로 하여금 그의 잔을 마시도록 한,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한 하나님의 바꾸지 않은 결심 말입니다.
요나서에 보이신 하나님의 변심과 예수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은 하나님의 결심은 서로 대조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생명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동일하게 보여줍니다.

요나서의 하나님의 변심이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길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결심은 고난의 희생과 헌신을 통한 생명 구원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두 모습 모두를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시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변심과 결심의 마음을...
2006-10-29 00: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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