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회 주일 설교 모음(주보용-요약)

  12월10일-대림절 둘째주일: “하나님과의 만남”
  박경철
  

12월10일-대림절 둘째주일

제목: “하나님과의 만남”
성경: 구약: 욥 42:1-6 신약: 요한복음 9:13-17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때론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들이 있지요.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참 믿음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귀중한 믿음의 모습이지만 실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욱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될 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기도하며 인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흔히 예로 드는 성서가 욥기입니다.

그러나 성서중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책 중에 하나가 욥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욥기의 내용을 동방의 의인 욥이 견디기 힘든 고난 가운데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킴으로 인해 훗날에 복을 갑절이나 받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욥과 같은 신앙이 교훈과 위로의 본보기로 고난당한 성도들에게 권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42장이나 되는 욥기의 내용 중에서 서론의 1-2장과 마지막 결론부의 42장 끝부분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욥기 3장세ㅓ 42장 전반부까지는 앞서 생각하던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경건한 욥의 모습과는 만히 다릅니다. 욥은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냐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대들고 항변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고난을 당한 욥에게 그의 친구들로 소개된 동방의 지혜의 현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욥기의 대부분은 바로 이 친구들과 욥과 논쟁하는 내용입니다.

친구들의 주장은 성서의 지혜의 전통에 따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벌로 고난이 찾아온 것이니, 욥이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욥은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으며,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내리신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도 않으시고 침묵하고 계시는가를 탄식하며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기를 항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은 세 친구들 중 하나인 빌닷의 말입니다. 이는 욥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가 자신의 지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비록 지금은 미약한 존재이지만 나중엔 하나님이 크게 복 주실 것이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빌닷의 말뿐 아니라, 친구들의 많은 말들은 욥기 전체를 통해서 잘못된 말이 됩니다. 이미 욥기 서론을 통해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욥의 죄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를 통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은 친구들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42장 6절에 가면,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였다고 말합니다. 욥이 회개했다면, 지금까지 친구들과의 모든 논쟁에서 욥이 잘못했다는 말인가요? 친구들이 옳았나요? 그러나 그 바로 다음 절인 7절에서 분명히 하나님이 친구들이 틀렸고, 욥이 옳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서로 상반됩니다. 그렇다면 욥은 무엇을 회개했다는 말이며, 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욥의 회개를 말하고 있는 이 6절을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번역상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다’, ‘위로하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창 6장 5절엔, 하나님이 지으신 보시기애 좋았던 세상은 이제 악이 만연함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해 졌습니다. 이로 인해 6절에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하셨다고 말합니다. 다른 번역에는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나옵니다. 둘 다 모두 ‘나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홍수심판으로 세상을 끝내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어가십니다. 바로 구원에 대한 예표가 이미 노아의 탄생에서부터 언급됩니다. 창 5장 마지막에는 라멕의 아들 노아가 언급되고, 그가 사람들을 ‘안위, 위로’할 것임을 말합니다. 여기 쓰인 ‘안위, 위로’가 바로 ‘나함’입니다. ‘위로하다’의 뜻인 ‘노아’라는 이름이 곧 ‘나함’에서 연유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후회’란 하나님께서 무언가 잘못했고, 이를 다시 고치는 뜻으로서가 아닙니다. ‘위로하다’는 뜻으로 보면,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아픔을 위로하고 새로운 구원사를 이어나가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나함’하시고, ‘노아’(위로자)를 통해 구원사를 펼쳐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 비교한다면, 욥이 ‘회개’(나함)했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잇는 자신을 ‘위로’(나함)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 있다는 표현을 흔히 죄로 인해 금식하며 회개하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욥기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욥은 고난의 현장 그 가운데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실이 바뀌지 않은 가운데서도 욥은 자신의 탄식을 거두어들이고, 자신을 위로한다는 것이지요. 욥의 그렇게 변화된 이유가 42장 5절에서의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듣던 것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게 된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꼈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숱한 말들과, 교리들은 고난당한 욥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찾았고, 대답하지 않는 하나님께 그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려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직접 체험은 그 어떤 교회의 가르침과 수많은 교리와 신학을 넘어섭니다.

오늘 읽은 신약 본문에서 예수의 기적으로 인해 세상을 보게 된 과거 시각장애자로 살았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은 숱한 자신들의 논리로 평가합니다. 그의 부보조차도 유대교로부터 출교당할 것을 두려워해 그가 새로 보게 된 것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예수에 대한 선지자의 여부 논쟁, 안식일법에 대한 그 어떤 교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살아있는 고백과 증언이지요.

우리 신앙인의 본질적 증언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귀로 듣는 숱한 말과 말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이지요. 어떻게 체험합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나요? 직접적 체험은 반드시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이 아니지요. 나의 살아있는 온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논과 밭에서 땀 흘리다 저녁노을의 붉은 빛을 바라보면서도 힘든 오늘의 농촌에서 농촌을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이 생명의 땅을 일구시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체험이지요. 매주 귀로 듣는 설교말씀 백번 보다, 한 번 어느 순간 가슴 깊이서 울컥하며 하나님~~ 을 마주 대하고 변하지 않은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하며 새 힘을 갖는 것이지요. 이것이 살아계신 주님을 마주대하는, 살아있는 나의 고백이며 체험이지요.
2006-12-14 16: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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