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신학 강의 > 2000년 여름학기 베델신학대학, 프랑크 크뤼제만(Prof. Dr. Frank Crüsemann)

5월 15일 2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문제.

십계명 서문 처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는 것은 그 다음에 따르는 출애굽과의 관련 속에서 이는 마치 사람들끼리도 제일 먼저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을 밝히 듯, 이름은 한 인격에 대한 첫 표현을 담고 있으며, 이는 모든 것이 바로 그 이름과 관련된다는 말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 인간과의 관련에서 그 정체성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선 6가지로 나누어 그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첫번째로 야훼 이름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서하나님이 이름을 갖고 있는 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의 하나님이란 다른 일반 종교에서도 통용되는 신에 대한 표상일 뿐이다.

이름 자체에 대한 문제에서 첫째로, 4 자음 글자 ࠄࠅࠇࠉ 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이미 이는 공식적으로 발음할 수 없다는 전통이 있었다 (회당등에서..). 이는 특별한 독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케레 푸티품(히브리어 문법설명 참고)이다.

성서 내에는 많은 야훼 이름이 포함되어 (이사야후, 예레미야후, 야후...) 나타나는데, 그 본래의 발음에 대한 학계의 재구성의 시도들은 그러나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구약성서에 이는 약 7천번 이상 쓰인 단어다. 이는 전형적인 히브리어 이름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문장형 이름 (Satzname)이다. 3인칭 남성형, 하야(sein동사) ࠄࠉࠄ 형으로, 옛 형태 하와 ࠄࠅࠄ 에서 온 것이다. 이를 문법상 히필형(사역형)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칼형(일반 능동형)으로 볼 지에 대한 논의들 모두 가설들이다. 대체로 학계에선 하야 동사가 사역형이 없기 때문에 이를 칼형으로 본다. 여기서의 'sein'동사는 그리스식의 어떤 무시간적 한 존재를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형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 속에서 그는 어떤 일을 일으키는(생기게 하는) 이로써 나타내어진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시는지 성서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출 3장 과 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아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 자신의 이름 계시한다. 이 두 본문은 모두 출애굽,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해방사건을 처음 시작하는 그 시점과 관련된다.

출 3장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하나님 자신의 말로 시작(4절), 이전 족장 역사 서술 (6절), 해방과 자유를 위한 출애굽 관련 (7절), "함께 하는 자" (11절), 하나님 이름에 대한 질문 (13절)과 그에 대한 대답 (14절):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나는 나다). 그의 이름을 묻는 3인칭 문장형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1인칭으로 나온다. 앞 절에서 "함께 있는 자"로 표현된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강조된 의미로서의 대답이다. 15절에서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는 이름은 테트라그람-거룩한 자음 4자-, 족장들과의 관련, 그리고 "영원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는 이 본문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외 다른 내용이란 없다. "함께 하는 이"의 자기 계시는 그의 약속이며, 이는 바로 이스라엘과의 관련이다.

하나님 이름의 오용에 대한 금지와 관련하여, 무엇 때문에 마소라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릴 수 없게 한 것인가? 특히 발음상의 그 어려움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가? 본래의 발음은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종교사적연구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과 관계를 맺는다. 이는 단지 한 하나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다신 세계에서 신들은 인간들과 같이 각자의 이름들을 갖고 있다. 각자의 이름을 통해 그를 부를 수 있고, 다른 신들과 구분을 지을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인격으로써 자기 정체성과 관련한다. 특히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계명은 그 이름이 그로 인해 상해를 입는 것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곧 인간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남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것에 대한 금지인 것이다.

이는 바로 십계명의 거짓증거 금지 계명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한 금지와 그에 대한 대체 발음의 과정들을 보면, 주전 3세기경, 모세오경인 토라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퀴리오스'(주)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고, 실상 이는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문제를 갖고 있었다. 주전 2세기경의 쿰란에서 나온 문서들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이름은 더 이상 발음될 수 없는 것으로 나온다. 주후 70년 이후 성전이 무너진 이후로는 더 이상 회당에서도 야훼의 이름은 더 이상 불리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신비로움"과 관련을 맺는다. 유대교에선 그 신비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대신에 그에 대한 대용으로 자주 사용한 것이 바로 퀴리오스, 주(主)라는 뜻인 "아도나이" 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일반적인 주인을 가리키는 한 칭호로서가 아니라 단지 발음상의 문제로 인한 하나의 특별 형식(Sonderform)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독일어 루터 성경 등에 고유한 한 칭호처럼 대문자를 사용하여 "Herr" 주(主) 라고 쓰는 것은 본래의 의미와는 잘못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로 "이름"을 뜻하는 "쉠"ࠎࠚ 앞에 정관사를 써서 "그 이름" "핫쉠" ࠎ৒ࠄ 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대신에 그 이름을 불러야 하는 곳에서 "핫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아람어 "이름" 을 뜻하는 "쉐마"에서 온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과 기독교의 관련은 무엇인가? 매 예배시 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한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기독교에선 하나님의 그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즉 하나님이 자기 이름과 함께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한다는 것에 대해 기독교는 알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이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기 앞서 첫 번째 문제는 무엇보다도 번역상의 어려움과 다음으로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다. 구약성서 수많은 본문들에서 하나님에 대해 여러 모습으로 타내는데, 항상 그의 이름은 특별한 역할을 한다. 만약 이를 단순히 "하나님"으로 일괄적으로 번역할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한 본문을 예로 든다면 잘 알고 있는 창 22장의 아브라함의 이삭 희생제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본문에서 특히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곳들에서 주의하여 번역해야 한다. 1절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이는 엘로힘이다. 1절로부터 10절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이는 엘로힘이다. 11절에서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정면에서 바로 야훼 이름이 등장한다 (14절 여호와 이레). 본문은 종교사적으로 당시 어린이 희생제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곤 한다. 당시 이방신들 내에서 신들의 명령에 부모가 이를 순종한다는 내용들이지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시킨 것을 스스로 막으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발음과 사용에 있어서 오늘날 흔히 외래어를 그대로 수용해서 발음하는 것과 같이, 유대교에서도 사용하는 "아도나이" 라는 대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와 함께 이의 오용금지에 나타나는 신비로움의 감춤이 동시에 작용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어떤 절대자로서의 개념을 지니지 않고, 언제나 한 백성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이는 해방과 자유와 관계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다음시간엔 시편 82편을 통해 이상의 주제들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알아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