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신학 강의 > 2000년 여름학기 베델신학대학, 프랑크 크뤼제만(Prof. Dr. Frank Crüsemann)

5월 29일 1부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서 창 12장과 왕상 17장을 통해 보았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온 민족의 구원에 대하여 전체적인 조망과 함께 특히 해석학적인 문제인 오늘 유대인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하나님과의 관련에 대한 문제에 대해 또 다른 본문들을 갖고 계속 진행하겠다.

특히 오늘은 온 민족의 구원에 관한 것이 주제가 되겠다.

우선 이사야서에 나타난 관점들이다. 이사야서는 구약성서에서 무엇보다도 이상의 주제에 대해 말해주는 중요 본문이다. 특히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다시말해 이사야서 처음 2장의 민족 순례에 대한 본문은 바로 이사야서 마지막 장인 66장에서 다시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바로 이 주제를 갖고 서로 이사야서 전체의 그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사야서 전체는 이 근본 주제를 계속 다루고 있다.

이사야서 2장 본문:

<개역개정>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이사야 2장 2-5절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이사야서 2장은 미가 4장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렇게 성서에서 같은 본문이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한 표시이기도 하다.

이사야서 2장의 종말론적 표상은 말일에 시온이 온 민족들에게 보이게 될 것이며, 그들이 시온으로 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이제 민족들간의 전쟁의 종결과 평화의 길이 보장되기 때문이며, 이는 또한 현재 지금의 문제와 연결되어 여호와의 빛으로 걸어가자는 것으로 맺고 있다.

이사야서 마지막 66장 22-23절에서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으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나아온다는 민족 순례 주제를 담고 있다. 이사야서의 처음과 끝의 이런 주제는 전체 이사야서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고, 이사야서 전체 안에서는 여러 다양한 모습과 강조점들로 이상의 주제를 끊임없이 진행해 간다. 이에 중요한 몇몇 다른 본문들을 거론한다면, 이사야서 19장은 특별히 이스라엘과 열방 민족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민족들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사 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21절에 이미 하나님은 에집트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실 것임이 나타나고 (출애굽 모티브 포함) 에집트 사람들이 야훼께 희생제의를 드릴 것이며, 이전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었던 두 강대국인 에집트와 앗시리아 그 사이로 이제는 전쟁의 길이 아닌, 두 강대국 그 사잇길(이스라엘)에 있는 이스라엘의 야훼께로 경배하러 올 것임이 말해진다.

특히 25절의 각 민족들에게 쓰인 수식어들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 백성 에집트와 야훼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 그리고 야훼의 소유/기업인 이스라엘.

또 다른 중요 본문 하나는 45장 18절 이하(18-23절)이다.

여기엔 창조주 하나님, 이방 모든 민족들이 야훼께 나아온다는 것, 그리고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주제가 모두 연결 되어있다. 23절에 다시 나타나는 중요한 개념인 "모든 육체"는 곧 온 민족이다.

다음 본문은 이른바 사 42장 이하의 "야훼의 종(에베드 야훼)의 노래"라 불리는 본문들이다.

42장 1절 이하에서, 야훼의 종은 특별히 민족들을 위해 부름을 받는 장면을 보여준다. 4절에서 섬들(온 세상, 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야훼의 종은 이들에게 공의를 펼치며, 6절에 바로 이 종은 민족들의 빛이라고 나온다.

이와같이 이사야서 전체에는 비록 여러 다양한 표상들과 강조점들이 들어있지만, 그것들은 온 민족들이 야훼를 경배하게 된다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야훼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의 표상은 신약의 기독론의 중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열방 민족들의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표상을 지니고 있는 중요한 다른 예언서 본문을 더 든다면,

하나는 요엘서 3장1절 이하(한글 성경은 2장 28절 이하)이다. 마지막 날에 야훼는 모든 육체 (온 민족)들에게 영을 부어 줄 것을 말한다.

예언서 외의 본문으로는 십계명 바로 전 이스라엘이 이제 막 시나이에 도착한 상황인 출 19장 5절 이하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지칭하면서 이스라엘의 기능은 바로 온 인류를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온 인류의 야훼 경배를 위한 그 중개자(仲介者) 역할을 이스라엘이 담당한다는 말이다 (야훼 제의는 제사장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제의를 중개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바로 타민족들이 야훼께 제의를 드리러 온다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말이다).

온 민족 관련을 보여주는 또 다른 본문은 바로 민족들의 야훼 찬양 본문들이다. 위에서 보았던 민족들의 야훼 경배 순례에 대한 것들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민족 찬양 본문들은 지금 현재 이스라엘 관련 속에서의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특별히 시편의 많은 민족 찬양시들이 그러한데, 이들은 미래의 종말론적 표상이 아니라, 그 이전의 것들이다. 그 중 가장 짧은 시편(단지 2절뿐)인 시편 117편이 그렇다. 이는 바로 온 인류를 향한 야훼 찬양 권고문이다. 이런 모티브는 전체 시편에 팽배하게 깔려 있기도 하다. 그 중 특별히 시편 96편과 98편이 그렇다.

이상의 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족들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 사상은 신약성서 내에서 특별히 바울의 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바울의 신학은 바로 이방인 선교가 그 과업이었고, 구약성서가 보여준 이상의 주제를 전수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 민족들의 시온 순례에 대한 이상의 본문들을 현재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현재화시킨다. 신약성서시대 뿐 아니라 초대 교회사에서도 이방인 구원의 문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이사야서 2장과 미가 4장의 열방 민족들의 이스라엘 하나님께로의 순례에 대한 표상들에 대하여 이를 당시 그리스도인 "우리"들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대체시에, 바로 우리라고 대표되는 온 민족들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언제나 이스라엘에 대해 부정적으로 봄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관련 맺는다는 점을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 본문 하나를 더 거론하고자 한다. 이는 사가랴 8장 23절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는 민족구원의 미래 표상이 결코 이스라엘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온 인류의 구원의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부르면서부터 언제나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존재한다. 이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서도 그렇다.

이제는 새로운 주제인 민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민족 심판에 관련한 사항이다.

여호수아서에 중점적으로 나타나는 땅 정복시에 팔레스틴에 살던 원주민 이방민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들이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민족 심판에 대한 본문들이 본래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차이들을 밝혀 내는 일들이 중요하다. 여기 두 가지 문제점들이 있는데,

하나는, 민족 심판의 본문들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주제가 단지 민족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구원과 심판 주제는 언제나 항상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민족들의 심판의 문제는 언제나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 12장에 민족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저주를 받을 수도 아니면 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우 특별하게 처리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이미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고 있던 타민족들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런 본문들은 저마다 고정된 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 본문들 안에는 고정된 특정 하나님의 상(像)을 보여 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본문들은 저마다 별도로 그것이 말하는 의미들에 대해 한계를 지을 필요가 있다. 우선 중요한 문제는 전체 열방 민족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특정 일곱 민족들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명기 7장 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절 이하에 이스라엘은 이들 일곱 민족들을 전멸하라고 나온다. 결코 이들과는 어떤 언약도 세워서도,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된다고 아주 심하게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 거론된 일곱 민족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다른 민족들과는 다르게 전혀 언급되질 않는다는 점이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어디에도 이들 민족들과 이스라엘이 관련된 역사사건은 전혀 언급이 없다. 이스라엘의 현실 역사와 관련된 민족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윗 시대 이후 그 어떤 역사적 자료에도 이들은 나오지 않는다. 이 민족들의 언급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대한 회상이다. 즉 땅 정복시기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실제 신 7장 본문의 역사 배경은 분명 앗시리아 침략의 위험에 처해 있던 시기를 반영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안에 이미 그 이전, 즉 이 시기인 앗시리아 침략 그 이전부터 이방 민족들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그러한 표상이 존재했었는지는 무엇으로도 증빙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본문의 중요성은 본문에 대한 연대층에 따른 재구성이 아니라 본문이 보여주는 그 신학에 있다고 하였다. 본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이는 곧 이스라엘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본문 신명기 7장과 또한 그 다음 여호수아서에까지 이어지는 그러한 내용들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신 7장 4절에서 이방 민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유는 저들의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과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심판 선포의 배경인 이스라엘의 타락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방신들 숭배의 문제는 바로 당시 이스라엘 내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7장 끝인 25절 이하에서 이방 신상들을 불태우라는 요구는 이방 신들의 우상이 이미 이스라엘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들을 모두 철저하게 제거하라는 요구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런 이방의 신상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다른 이방 민족들이 심판을 받는 것과 똑 같이 심판을 받을 것임이 적용된다. 이방 민족들에 대한 철저한 진멸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내에 있었던 이방 신상들에 대한 철저한 제거를 반영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안에는 분명 이상과 같은 잔인한 폭력의 문제, 진멸 사상이 들어있다. 이는 결코 이스라엘 내에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여러 다양한 관점들을 갖고 계속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시편의 많은 시들 안에 그렇게 잔인한 폭력의 문제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러한 폭력을 다루는 본문들이 중도에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이야기되어졌으며, 무엇 때문에 전수되었는지 즉, 각 본문들이 이 문제들에 대해 각자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각 본문들이 처한 구체적인 각자의 상황들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본문들은 언제나 현실적으로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각자의 관점들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이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땅의 문제로 그 안에는 언제나 각 민족간에 실질적인 갈등 관계들이 있었다. 비록 거기 등장하는 이방민족들에 대해 성서는 그들이 언제 어떻게 그 땅 안으로 들어 왔는지, 그 이전에 그들이 거기에 살았었는지에 대해서조차도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이스라엘과 땅의 문제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것이다. 땅 문제로 인한 갈등관계는 항상 실질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기독교 신학의 문제는 신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이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데 있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련, 이스라엘 땅과 또한 이와 함께 연관된 실질적인 여러 갈등의 문제들과 관련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제외하고선 이는 가능하지 않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철학적인 신 개념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면서부터 이스라엘과 온 인류와 관련을 맺는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그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 이스라엘을 통해 온 인류가 이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이다.